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기독일보DB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교회 석학인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가 "퀴어 신학의 주장과는 달리 세리와 창녀는 예수를 만나 그릇된 생활을 청산했다"면서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다섯 번째 글을 내놓았다.

김영한 박사는 기고글을 통해 "예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 성소수자의 친구'였으나 죄된 생활에서 나오도록 저들을 치유하셨다"고 말하고, "죄란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지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낙인이 아니"라며 "예수도 죄인(세리와 창녀)은 사랑했으나 죄(수탈, 불법, 음란)는 미워하셨다"고 했다.

이어 김 박사는 "성소수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행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 강조하고, "성경은 동성애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며, 탈동성애자들의 증언은 동성애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증명한다"고 했다. 다음은 김 박사의 기고글 전문이다.

I. 예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 성소수자의 친구"였으나 죄된 생활에서 나오도록 저들을 치유하셨다.

퀴어 신학자들은 세리나 창기도 천국에 들어간다고 다음같이 왜곡한다: "당시 죄인을 대표하는 것은 '세리와 창녀'였다. 이들은 부도덕하고 더러운 죄인으로 비난받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종교적으로 소외당했다. 이들과 가까이 하고 사귀는 것 자체가 부정하고 부도덕한 일로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는 기꺼이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는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세리나 창녀도 그들이 소수자고 죄인이기 때문에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새 삶을 살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해야 한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 의하면 예수는 참으로 세리나 창녀의 친구가 되었다. 저들과 먹고 마시며 함께 지냈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세리들의 착취에 협력하거나 창녀들의 부도덕하고 불윤적인 생활에 동조하거나 이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죄인으로 낙인 받은 저들에게 다가가 저들의 대화상대가 되면서 이들의 상담자가 되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거룩한 인간애와 신성의 능력으로 이들에게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들로 하여금 잘못된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생활에서 나오도록 하였다.

예를 든다면 예수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수가성의 여인,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 여인과 대화하면서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를 가르치시고, 이 생수를 달라는 여인에게 '너 남편을 데려오라'고 명하신다. 예수의 거룩성에 압도당하면서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삶을 실토한다. 예수는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격려하면서 새 삶으로 인도하신다. 예수는 간음하여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고 가르치신다. 예수는 동성애자의 인격을 사랑하시나 이들이 죄된 성중독에서 돌이키도록 가르치신다. 동성애자도 참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면 이성애자로 변화받는다. 성령의 거룩한 힘이 동성애자들의 성중독을 변화시킨다. 오늘날에도 많은 동성애자들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새 삶으로 변화함을 받고 있다.

II. 죄란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지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낙인이 아니다.

1. 퀴어 신학의 죄 정의는 정치신학적 정의로서 사회윤리적 통념을 무시

퀴어 신학은 죄를 체제(體制)가 사회적으로 찍은 딱지요 낙인이라고 다음같이 왜곡한다: "예수는 당시 유대사회의 법체계에 의해 더러운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고,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했다. 법에 의해 더러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이웃으로 받아들였다...예수는 기존사회의 법과 통념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죄인으로 규정함으로써 다수성에 근거한 도덕적 우월감에 편승하지 않았다." 이러한 퀴어 신학의 죄에 대한 정의는 정치신학적 정의로서 현존하는 독재 정치 등에 저항하는 반체제적 행위를 변호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죄에 대한 정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1970년대 유신독재나 북한 김정은 독재체제나 나치같은 파시즘 체제에 대하여는 적용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양식과 상식이 통하는 민주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을가 의문이 된다. 그 구체적인 예가 초등학생 남제자와 성관계를 가진 여교사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교사가 초등학생인 제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규범을 어긴 것을 본다. 사법당국은 사회적 양식에 따라서 여교사를 사회적 풍기를 문란한 죄를 지었다고 질책하였다. 양식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법당국의 판결은 바른 것으로 본다. 그래야 사회는 건강하게 지탱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미성년 제자와의 성관계는 개인적 사회적 죄

창원 지방법원은 2017년 11월 14일 자기가 담임인 초등학생 남제자와 성관계를 가진 여교사를 징역 5년에 선고하면서 그녀의 행위를 "개인적 사회적 죄"라고 명명했다. 재판부는 미성년자 의제 강간, 미성년자 의제 강제추행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여교사 A(32)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80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재판부는 "정신적 육체적 약자이자 훈육의 대상인 만 13세 미만 미성년자를 성적 쾌락과 유희의 도구로 삼은 것은 교사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며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학생과 그 학생을 맡긴 학부모 모두의 신뢰를 저버린 심각한 배신행위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린 행위이다"라고 판결했다. 피고인은 "피해 아동이 어른스러워 서로 좋아하는 마음에 사랑하는 사이라 생각하고 성관계를 했을 뿐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이용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변소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 변소는 만13세 미만의 초등학생의 경우 법적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성관계가 예정된 사랑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점을 자백한 것"이라며 여 교사의 발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가 미성년자에게 평생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를 준 것은 좁게는 피해 아동과 그 학부모에 대한 개인적 범죄일 뿐 아니라 넓게는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던 건전한 성도덕과 초등 공교육을 무너뜨린 사회적 범죄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재판부의 판단은 마찬가지로 동성애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동성애는 비록 두 사람이 서로 인정했다 하드라도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중독의 행위에서 비롯되어 사회적으로 풍기(風紀)를 문란하게 된다는 점이다.

3. 예수의 사회적 소외자들 사랑은 저들의 불법을 인정하신 것 아니라 회개와 새 삶을 촉구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죄인을 새 사람으로 바꾸는 사랑의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는 사회적 죄를 부정하지 않고 죄인을 인격적으로 회개하도록 인도하셨다. 예수는 오히려 당시 바리새 종교가 사회적 소외자들과 죄인들을 배척함으로써 제도적 종교 윤리가 지니는 상대성과 한계를 드러내고, 법과 윤리가 근거해야 할 토대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시했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었으나 도덕적인 죄(십계명 범함)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회적 소외자로서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지 않고 이들을 외면성만을 보고 판단하는 바리새적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셨다. 예수는 체제에 의하여 낙인 찍힌 자들을 그대로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는 이들 세리나 창기나 불법자들을 품어주시고 이들이 자신들의 죄(세금 수탈과 음란)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새 사람과 새 삶을 살아라고 초대하였다.

4. 퀴어 신학의 죄 이해(사회적 낙인)는 하나님 계명 불순종이라는 성경적 죄 이해에서 이탈.

퀴어 신학은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 훼손, 하나님 계명의 불순종이라는 역사적 기독교의 성경적 개념에서 떠나서 민중신학이 시도한 것처럼 지배체제가 법체계에 의해서 찍은 사회적 낙인(烙印)으로 간주한다. 예수는 당시 사회적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나라로 초대했다. 그러나 예수는 저들이 회개하고 옛 삶에서 돌이키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도록 인도했다. 민중신학이 세리나 창기의 죄된 행위의 변화를 언급하지 않는 것처럼 퀴어 신학도 동성애자들의 괴기한 성행위의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적 기독교의 성경적 가르침과는 다르다. 퀴어 신학도 "법과 윤리가 근거해야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이란 죄를 미워하는 거룩한 사랑이다. 예수는 가르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III. 예수는 죄인(세리와 창녀)은 사랑했으나 죄(수탈, 불법, 음란)는 미워하셨다.

퀴어 신학자들은 예수는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셨을 것이라고 다음같이 피력한다: "예수는 그들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대상화하거나 타자로 보지 않고, 그들의 심정과 처지에서 그들의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보고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오늘 살아 계시다면 예전에 세리와 창녀를 사랑하고 존중했듯이 동성애자들을 존중하고 사랑하셨을 것이다."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 의하면 예수는 세리나 창녀를 저들의 입장에서 긍휼과 인자를 가지시고 대했으나 저들이 죄된 행위를 인정하지는 아니하셨다. 예수는 이들이 죄된 행위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도록 저들을 선도하셨다. 예수는 이들 소외당하고 정죄 받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들 아흔 아홉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하셨다(눅 15:7). 죄인(세리나 창녀 등)이 죄(수탈과 음란)를 회개하고 그 죄된 행위를 끊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 예수는 동성애자들이 괴기한 행실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시기를 원하시고 기뻐하신다. 예수는 동성애자들의 인격과 영혼을 사랑하시고 저들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예수는 세리나 창기들이 죄된 관습에서 돌이키기를 요구하셨듯이 오늘날에도 동성애자들이 저들의 괴기한 행실에서 돌이키고 정상적인(이성애적) 삶을 살기를 요구하신다.

IV. 성소수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행동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1. 동성애 행위가 윤리적 잘못이 아니라는 퀴어 신학자의 견해는 성다수자의 정상적 윤리에 어긋난다.

퀴어 신학자들은 예수가 성소수자 동성애자들 편에 서서 저들을 이해해주었을 것으로 왜곡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심정으로, 소외당하는 이들 자신의 심정과 눈으로 소외당하는 이들을 보고 사랑하고 가까이 했다...게다가 오늘의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도덕적으로 적극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주류사회와 다수의 편견과 차별로 고통을 겪고 있다... 다른 사람이 그들의 삶과 권리를 재단하는 것은 동료시민에 대한 폭력이고 행패이다.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시민에 대한 민주시대의 예의이고 상식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듯이, 오늘 우리는 성소수자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퀴어 신학자들은 이 문장에서 동성애자들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잘못이 아니라고 보고 있으며 동성애자들이 주류사회의 편견과 차별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왜곡하고 있다.

여기서 퀴어 신학자들은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소수자(창녀, 세리, 반체제 인사, 동성애자, 다문화인 등)가 되는 것이 바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을 왜곡하고 있다. 사회적 소수자는 다수자에 의하여 권익을 빼앗길 수는 있으나 그것의 시정(是正)은 법의 공정한 집행으로 막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가 된 것 자체가 의롭다고 말하는 것은 편파적인 윤리관이 되어 버린다. 퀴어 신학자들의 친(親)성소수자 견해는 동성애 행위는 성다수자의 정상적 성관습에 어긋나며 사회적 풍기를 문란케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성다수자들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낼 때까지는 이들에 대하여 아무런 공개적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2. 퀴어신학자들은 동성애자들의 에이즈 헌혈로 인해 죄 없이 죽은 아기와 젊은이들, 그리고 노부부의 인권과 억울함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동성애자들과 이들 지지자들 및 퀴어 신학자들은 남성 간의 항문 성관계를 인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상 이들 중 그 누구도 동성애자들의 에이즈 헌혈로 인해 죄 없이 죽은 아기와 젊은이들, 그리고 노부부의 인권과 억울함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억울한 일이 헌혈로 일어나는 일은 한국질병관리본부에서 에이즈(AIDS) 익명검사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 익명검사는 에이즈 의심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보건소에 가서 하는 것이고, 에이즈 감염(感染) 사실에 대해서는 검사받은 본인 이외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즈 익명검사 결과는 보건소도 누가 검사를 받았는지 알 수가 없고 에이즈 감염자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던 국가가 이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는 무책임적인 제도적 허점을 가지고 있다. 한국질병관리본부의 이러한 방침이 정의로운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에이즈 익명 검사가 에이즈 헌혈로 인해 비동성애자들을 에이즈 감염에 노출시키는 제도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이 정의인가?

3. 성경은 진리란 다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에 있다고 가르친다.

역사적 정통 기독교에 의하면 진리는 다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소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에 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인격이며 그의 가르침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는 대제사장 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기도하신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진정한 기독교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수가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동성애를 가증한 일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심정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성소수자들 자신의 심정과 처지에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성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예수는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아는 길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1-32). 동성애자들이 예수의 계명에 거하면 예수의 제자가 되고 진리(동성애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를 알게 되고 진리가 저들을 동성애에서 자유케 하리라고 가르치신다.

V. 성경은 동성애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성경에 의하면 어린 양의 피로 대속받지 못한 자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다. 행실이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2). 우리 한국사회에도 최근에는 매년 퀴어 축제가 열리면서 동성애 물결이 들어오고 있다. 이는 말세의 징조이다. 사도 유다의 경고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절). 사도 유다는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는 구절에서 동성애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소돔과 고모라와 이웃 도시의 동성애자들의 음란한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불의 형벌이 있었다고 교훈하고 있다.

사도 유다는 다시 마지막 때 있게 될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 17-19). 그리고 사도 유다는 마지막 때 신자들이 가져야할 삶,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동성애로부터 지키는 거룩한 믿음의 삶에 관하여 교훈하고 있다: :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20-21). 오늘날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이 요청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삶과 생각을 지키며, 그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중보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VI. 탈동성애자들의 증언은 동성애가 선천적이 아니라 후천적임을 증명한다.

1. 탈동성애자들의 양심선언은 동성애가 후천적인 성적 중독에서 오는 것을 증명한다.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동성애가 자신들의 윤리적 책임이 아니라 "유전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가 자연적이며 정상적이라고 변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변에 동성애자였다가 동성애 중독(中毒)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많은 사례를 국제적으로 접하고 있다. 동성애자였다가 치유를 받은 김정현은 그의 글 "동성애자 양심 고백서"에서 다음같이 양심 선언을 하고 있다: "저의 경우 치료한 지 4년 정도 됐을 때 식성을 비롯하여 남성에 대한 성집착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식성에서 해방된 것이 지금도 감격스럽습니다. 동성애는 극복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중독 치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치료를 계속 해나갔을 때 동성애의 욕구에 대한 내부 군열이 미세하게 진행되고, 거대 빙산이 붕괴되는 것처럼 때가 되면 급속히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탈동성애 치유사역자 이요나 목사도 과거에 동성애 중독에 빠졌다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성령의 치유에 의하여 해방을 경험한 대표적 사례를 제시해주고 있다.

김정현의 증언에 의하면 동성애가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1973년 정신장애 목록에서 삭제 된 것은 1970년대 게이 행동주의자들이 의사들을 상대로 온갖 협박과 압력과 로비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021건의 동성애 치료 보고가 있었는데 그 자료들이 모두 폐기되었다고 한다.

2018년 5월 5일 미국 위싱턴에서 최초의 탈 동성애 퍼레이드가 개최되었다고 뉴스워크지가 보도하였다. 탈동성애자들의 거리 행진은 미국에서 처음 열린 것인데 이것을 주도한 탈동성애자들(ex-gay)은 2016년 50여명의 게이들이 사망한 게이 클럽 총기난사에서 살아남은 동성애자들이다. 대변인 루이즈는 그날 이후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술에 취해 지내며 HIV 감염으로 인도하는 난잡한 성문화인 동성애를 중단하기로 결단했다고 한다.

2. 우리는 동성애자들의 처지에서 사랑으로 대하고 중독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탈동성애자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이들의 인권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아들 딸이 동성애자가 되어 여자 또는 남자 같이 행동하고 다른 남자나 여자와 성관계를 가져도 좋으냐?"는 질문이 제3자에게 제기된 질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아들 딸의 문제가 되었을 때 우리가 허용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독선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 이들의 처지에 대하여 이해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는 창조의 질서에 위반되는 병적인 증상(중독)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동성애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저들의 처지에 서서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도와야 한다. 이들은 불행하게 동성애 중독이라는 성 해방 물결의 강도를 만나 쓰러진 자들이다. 이들에 대하여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의 태도를 가지고 저들을 중독에서 구출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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