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모습. 정말 많은 어린이들이 줄을 서서 맛있게 필리핀식 '닭죽'인 Arroz Caldo를 맛있게 먹고 있다. ©최상용 선교사

[기독일보=선교] 18여 년 전의 일이다. 동토(凍土) 모스크바에서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메트로 주변엘 가서 찬양을 하며 노방전도를 했다.

영하 15도가 넘는 강추위 속에서도 러시아 청년들과 한국 유학생들은 전자 기타와 스피커, 마이크와 신디(사이저)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때론 쏟아지는 눈 속에서도 우리는 신디 반주에 맞춰 찬양을 하며 전도지를 나누어 준다. 차가운 날씨에 노래를 부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기타를 치는 알료사가 가장 안쓰럽다. 코드를 잡는 손가락이 금방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쳤다. 하지만 70년간 공산주의에 얼어붙은 그들의 영혼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하는 열정은 모스크바의 강추위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노방전도를 하던 중 한 흑인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름은 네가쉬, 에티오피아 군 장교출신이었다. 우리교회에 나오고 싶다며 그 자리에서 약속을 하고 그 다음 주부터 교회멤버가 되었다.

네가쉬는 틈만 나면 나에게 에티오피아에 6,000달러면 교회를 세울 수 있으니 에티오피아에 교회를 세우자며 조르다시피 했다.

난 어느날 모스크바에서 에티오피아로 교회를 개척하려 가게 되었고 함께 간다던 네가쉬는 바로 전날 머리를 빡빡 깍은 극우주의자 스킨헤드족에게 맞아 이빨이 부러져 나와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에티오피아보다는 모스크바병원이 나으니 모스크바에 남아 치료를 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혼자 에티오피아행 러시아항공기 아에로플로트를 타고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갔다.

그때 러시아성도들이 에티오피아가 어떤 곳인데 혼자서 가냐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나는 “내가 소련 올 때도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지 않으냐? 에티오피아에 아는 이 한 명 없지만 난 약속했기에 에티오피아로 간다”고 선포하며 교회개척을 위해 러시아에서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로 또 하나의 선교여정을 떠난 것이다. 복음전도자의 길이기에…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하니 네가쉬의 동생이 마중 나와 있었고 난 그 다음날 아디스아바바 남쪽끝에서 북쪽 끝까지 네가쉬 동생과 함께 걸었다.

찌는 무더위에 걸어다니는 외국인은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두려움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순간 어린아이들이 모여 들며 동전을 달라고 떼를 쓴다. 아이들에게 거리에서 돈을 줘서는 안 된다. 한 번 주면 떼거리로 몰려와 잡고 늘어지기에 감당할 수가 없다. 특별히 여성은 더 조심해야하는 것이 동전을 주면 어느새 아이들이 몰려와 핸드백까지 열고 손을 집어넣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들은 그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 주저앉아 버리기까지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긍휼의 마음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난 다가오는 아이들 한 명 한 명 을 끌어안았고 그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올렸다. 에티오피아의 거리는 달리는 차량으로 피어오르는 먼지들과 찌는 더위로 불쾌지수가 오를 수 밖에 없다.

거리의 엄마들은 상처로 푹 패인 젖가슴을 드러낸 채 나오지 않는 젖을 갖난 아이들에게 물리고 구걸을 하고 있다. 부스럼과 종기투성이인 아이들에게는 파리들이 50여 마리씩은 붙어 윙윙거리며 따라 다니고 있다.

정부에서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 Street Children(거리의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모습. 한 그릇 '뚝딱'은 기본이다. ©최상용 선교사

그때부터 난 밥퍼사역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목욕시설이 둘 딸린 집을 임대를 했고 거리의 어린이들을 불러 옷을 태우고 갈아입히며 그들의 주식인 밀가루로 만든 큰 전병인 '인제라'를 먹이기 시작했다.

△제1코스 : 옷을 벗는다. 벗은 옷은 불로 태운다. △제2코스 : 남자아이는 남탕으로 여자아이는 여탕으로 들어가 현지인 자원봉사들 남녀 청년들이 각각 몸을 씻어주고, △제3코스 : 준비해놓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제4코스 : 인제라를 먹는다.

난 이렇게 거리의 어린이들에게 밥을 먹였다. 결국 교회를 세우기보다는 배고픈 어린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게 우선인 것으로 결론을 내고 5개월 13일간을 아디스아바바에 머물렀다가 동토 모스크바로 다시 돌아갔다.

과거 서역지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섭씨 40도를 웃도는 필리핀 타클로반의 더위는 수도 마닐라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뜨겁다.

두 달 전에는 타클로반이 섭씨 50도를 넘었다고 한다.

나는 일주일에 1, 2회 따가운 햇살을 피해 150여 명 어린이들에게 무료급식을 실시하고 있다.

두 번째 제자인 현지인 제시카(26세)와 어머니 네니타(Nenita)가 이른 아침부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Arroz Caldo(아로스 칼도)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의 닭죽과 똑 같은 요리다.

위생적이고 영양가 넘치는 맛있는 닭죽이기에 어린이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도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산모에게도 좋은 음식이냐고 물으며 큰 통에 닭죽을 타간다.

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최상용 선교사의 필리핀 타클로반 '밥퍼사역' 모습. 한 끼도 해결하기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에게 이 닭죽은 너무나 큰 힘이 된다. ©최상용 성교사

닭죽에는 건더기가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한 끼 식사 값이 달라진다. 나는 쉐퍼 네니따가 말한 것 보다 닭 두 배를 더 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건더기를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든 어린이들이 닭 두 조각씩은 더 먹을 수 있었다.

무료급식을 조금만 더 알려도 어린이들 수 백 명이 몰려온다. 그래서 150명 어린이만을 부를 때는 조심히 부른다. 마치 제 새끼 감싸듯이.

한 끼 500명 어린이들에게는 밥을 먹일 수 있어야하는데 눈으로 당장 열매가 보이는 사역이 아니기에 당장 열매를 보고자하는 이들에게는 별 매력이 없다. 하지만 밥퍼야 말로 가장 귀한 사역이다.

그래서 2,000여 년 전 어느 들판에서 예수께서는 5,000여 명에게 밥을 푸지 않았나?

마태도 마가도 누가도 요한도 4복음서 네 기자가 모두 오병이어의 예수님의 밥퍼사역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타클로반에서도 예수님의 밥퍼가 지속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타클로반 산호세 들판에서 오늘도 밥을 푼다.

■ 최상용 선교사는…
부산에서 태어난 최 선교사는 그리스도대학교 졸업 및 총합 총회신학원을 수료하며 목회의 길을 시작했다. 러시아 선교에 큰 뜻을 품고 국내 러시아 선교 초창기 모스크바로 떠나 10여 년을 러시아 선교를 위해 헌신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모스크바국립대에서 언어연수까지 수료했다. 에티오피아 거리의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무료급식 사역을 시작으로 지금은 필리핀에서 남은 여생을 헌신하기 위해 밥퍼·물퍼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 후원계좌 : 농협 352-0435-0928-03 최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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