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백석대 채영삼 교수

‘내 안에 그 목사 있다’는 그 말이 계속 목에 걸린다. 그게 맞는 말인데, 시원치가 않다. 틀린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답이 갖는 신학의 한계 때문이다. 신학을 해도 인성이 부족하고, 인격 없는 신학, 목회가 문제라는 도덕론도 해결 같지가 않다.

양들을 이끌고, 신학을 가르치는 자의 실족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를 인용하는 것,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혹시 우리 맘은 편하게 해줄지언정, 그 죽은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책임 있는 설명인지 나는 모르겠다.

안 믿는 사람도 아니고, 초신자도 아닌 분들이 극악한 범죄를 저지를 때 받는 충격을 설명하는 방식이, 그래도 우리는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라면, 우리의 신학은 교회가 맞닥뜨린 이 시대의 문제를 외면할 뿐 아니라, 계속 반복할 확률, 어둠에 어둠을 더할 확률이 높다. 문제가 나왔는데 답을 못 찾으면, 문제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해야 할 성경은 차라리,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사 5:4)가 아닐까.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런 충격을 묘사한 말씀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받으셨을 그런 충격이다.

또 이런 말씀,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누가 부끄러운가. 우리의 선한 양심과 행실로 세상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라는, 이토록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이 인용되었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오늘 날의 신학이, 복음이, ‘거듭난 심령의 회복된 양심’에 대하여 제대로 다루고 말하고 있는가. ‘인간의 양심으로는 구원 못 받는다, 다 죄인이다, 의인은 없다’만 알지, 그 구원 받은 자의 ‘회복된 양심’이야말로 이 땅을 사는 교회의 신앙의 본질적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가.

예수 믿고 천당만 가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심령은 회복된 양심으로 살게 되어 있다. 구원은 있는데, 세상 사람들도 알아듣는 ‘양심’은 버린 신학, 버린 교회, 버린 목자들, 그게 이 시대에 교회가 직면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교훈의 목적, 신학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딤전 1:5)이라고 가르치는 신학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언제까지, 인간의 윤리 도덕의 인과응보의 원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만 알고 있을 것인가.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게”(딛 2:11-12) 하신다는 것은 왜 버려두는가.

반쪽 신학을 붙들고 있는 한, 답은 시원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어렵지만,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교회가 이 땅을 살아갈 때, 축복, 성장, 혹은 구원의 확신보다 더 절절하게 가져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회복된 양심’이다. 믿음은 우리의 죽어있던 ‘양심’을 회복시킨다.

죽은 시신 앞에서 하는 기도의 기적이 아니라, 회복된 선한 양심이 아이를 살리는 것이다. 구원론이 전부가 아니다. 교회가 이 땅의 제사장 공동체로서, ‘선한 양심’을 회복해야, 세상도 알아듣는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반쪽 신학에 만족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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