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의 복잡한 시선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해 한 번 쯤은 혼란스러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과연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의 복을 누린 국가요 예루살렘이 그 이스라엘의 복 된 수도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육적 조상 ‘셈족’이 복을 누리고 그 셈족 후손 이스라엘이 특별한‘복’을 누린다는 이스라엘 선민 신화는 정말 사실일까? 트럼프의 생뚱맞은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선포’로 인하여 중동이 다시 혼란의 화약고가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노아 아들 가운데 셈을 그 조상으로 한다. 셈족 모두가 이스라엘의 후손은 물론 아니다. 셈에게는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이라는 5 아들이 있었다. 그 5 아들 가운데 아르박삿의 여러 후손 중 이스라엘 민족이 계시의 말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롬 3:2). 그런데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벨렉의 조상이며 벨렉은 아브라함의 5대조이며 아브라함의 여러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스라엘)이었다. 이 야곱의 12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인 유다에게서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아브람(아브라함)은 첫 번째 히브리인으로 지칭된다. 그런데 ‘에벨’에게서 ‘히브리’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하필 그 많은 히브리인 가운데 겨우 야곱 후손들만 특별한 복을 누린단 말인가? 그런 성경적 해석은 찾아볼 수 없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 사도 바울이 지적한 육적 이스라엘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다가 사도가 된 바울은 혈통 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다(롬 3:28). 뼈 속까지 철저한 유대인이면서도 사도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갈 6:15). 사도 바울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복 되다(갈 2:16)고 했다. 기독교는 유대교가 아니요 율법의 종교도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럼에도 육적 이스라엘이나 역사적 예루살렘을 구원의 특별한 징조로 삼는 신학이 있다. 개혁 신학은 그 같은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가?

그렇지만 ‘온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고 사도 바울도 말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롬 11:26). 인류 역사를 세대별로 구별(주로 1천년 단위)하는 세대주의에서 온 신학적 해석법이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때에 일찌감치 두 나라로 갈라져버렸다. 이 두 왕국은 주전 722년(앗수르에 북이스라엘 멸망)과 586년(바벨론에 남유다 멸망)에 멸망해버렸다. 우리 고조선이 망한 것보다도 근 500년 전 일이었다. 이후 남유다 왕국이 성경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귀향하기는 하였으나 10지파가 중심이 된 북이스라엘은 잡혼이 유행하면서 사마리아인화 되어 그 존재감이 사라져버렸다. 귀향한 유대인들조차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국을 구축하지를 못한다. 일명 “마카비” 왕조가 잠시잠간 유대 왕국을 세웠을 뿐이다. 그리고 유다 왕국 멸망 이후 2,500여년이 지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뒤 유대인들은 다시 팔레스틴 땅으로 모여들었다. 그 동안 유대인들은 혈통적으로 다양하게 뒤섞여버렸다. 순수 유대인 계보는 찾기가 어려워졌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온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일까? 과연 오늘날 혈통 상 온전한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혈통 상 온전히 순수한 이스라엘을 찾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일 것이다.

칼빈이 본 이스라엘

그래서 칼빈은 이들 ‘온 이스라엘’을 영적 이스라엘(유대인과 이방인 전부) 즉, 구원의 대상 전부를 말한다고 보았다. 필자는‘온 이스라엘’이란 칼빈이 말한 영적 이스라엘이든지 아니면 모든 시대, '선택된 모든 유대인'(무차별적인 모든 유대인이 아님을 명심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본다. 즉 '온'이라는 말이 단하나 예외 없는 집단적이고, 전체적이며,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대주의 신학

주님 재림 직전에 좀 더 의미심장한 말투로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는 극적인 회심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세대주의 신학이다. 그들은 그 중요한 표적을 예루살렘 회복으로 본다. 그래서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 예루살렘의 동정에 유난히 관심을 갖는다. 도대체 예수님 재림 때까지 지상에 온전한(조금도 다른 종족이 피가 섞이지 않은) 유대인이 있을까? 결코 있을 수 없는 비성경적 거짓말이다. 또한 그들이 동시적으로 모두 돌아온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관과 정말 맞을까? 성경은 그런 구원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는 ‘그리하여(롬 11: 26절)’를 ‘그리고 그 후’라 해석하여 ‘그리고 그 후’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고 본다. 하지만 헬라어 ‘후토스’는 우리 개역개정판처럼 ‘그리하여(이리하여)’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리고 그 후’로 하면 특정한 어떤 시기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다는 뜻으로 왜곡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억지 번역이 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하여’로 번역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믿음과 회개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외면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하다가 재림 직전 어느 순간에만 집단적으로 회심하여 돌아온다는 사상은 성경적 바른 해석과 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미숙한 주장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받는다는 의미를 육체적 또는 민족적인 이스라엘 전체로 보려는 것은 성경과 동떨어진 거짓 주장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방인 전체가 아니듯이 온 이스라엘 역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닌 것이다. 주후 2000 여 년 간의 역사 속에서 전체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예수를 모르게 하여 그냥 죽도록 외면해 놓고, 미래 어떤 시점의 시간대에 와서 따로 이스라엘 전체만 구원 받도록 한다는 특권 사상은 결코 성경적인 바른 사상이 아니다.

유대인들의 시련

제2차 세계대전 이전과 1941-1945 사이 핍박받은 유대인들의 시련을 보여주는 유대 인구 통계 자료가 있다. 당시 러시아는 280만 명⇒120만 명으로 급격한 인구 축소가 있었고 루마니아(80만⇒35만), 폴란드(325만⇒300만), 헝가리(40만⇒30만), 불가리아(6만⇒1만 1천), 독일(23만⇒18만), 리투아니아(15만 5천⇒13만 5천), 라트비아(9만5천⇒8만 5천), 이탈리아(4만5천⇒7천5백), 체코(31만 5천⇒27만) 등 유럽 유대인구 증가 지역은 전무하였다(Edited by Eli Barnavi, A Historical Atlas of the Jewish People, Schocken Books, New York, 233).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시련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통계다. 세대주의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때야 말로 주님이 오셔서 이들을 구원하셔야 되지 않았을까? 세계 대전 중 유대인들은 정말 심각한 시련 가운데 있었으나 결코 그런 일은 없었다. 신앙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이스라엘에게 별난 복은 없었던 것이다.

순수 유대인들은 있는가?

오늘날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도 없을뿐더러 디아스포라 이후 유대교 신앙도 많이 달라졌다. 다양한 기독교파가 논쟁하듯 유대교도 종교적 색깔에 따라 하레디(극정통유대교인), 다티(종교적인 유대교인), 마소르티(전통적 유대교인), 힐로니(세속적 유대교인) 등으로 균열하였다. 이들 종교적 색깔조차 서로 다른 유대인을 어떻게 모두 구원한다는 것인가? 그러한 보편적인 성경적 진리는 없다. 그래서 쾨슬러는 <13 지파>(Arthur Koestler, The Thirteenth Tribe), 1976)라는 책에서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거의 없다고 제시하기도 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팜플렛 광고를 찍으려다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막던 다혈질적이고 완고하고 신경질적이며 아주 인색한 정통 유대인 젊은이에게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필자의 장녀의 유대인 친구 안나가 있다. 안나는 서류상으로만 유대인 일뿐 유대교도 이스라엘도 신앙도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산다. 안나는 자신이 유대인의 피가 몇 % 섞인 유대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독일의 유대인 배려정책 덕으로) 러시아에서 독일로 이주하여 살다가, 유대인들에게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필자 딸의 안내로 유대인들을 위한 무료 유대청년 이스라엘 관광 연수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소개 받고 공짜 이스라엘 여행을 신나게 즐겼다. 안나가 더 유대인인지 아니면 늘 유대인 회당을 목사인 아빠보다도 훨씬 더 잘 알고 키부츠 유대공동체를 최소 5군데 이상 체험한 우리 딸이 더 유대인에 가까운 것인 지.

참 된 선민은 누구인가

성경은 어떤 특정한 민족이 특별한 복을 누릴 거라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특정한 시기에 육적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회복과 함께 주님께 돌아온다는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의 견해가 아닌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온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한 구절은 문자적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즉 믿는 자, Remnant),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믿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같은 것이다. 결국 ‘셈족’ 이스라엘이나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이 특별한 ‘복’을 누린다는 주장은 일부 극단적인 유대인들의 주장일지는 모르나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해보자. “혈통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 기독교에는 “신앙의 이스라엘”, “신앙의 예루살렘”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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