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하나님의 창조- 선한 세상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선한 모습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과학이 환경, 물리, 화학, 생명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은 창조의 섭리와 조화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에덴동산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과 생명은 함께 더불어 아름다운 선순환을 이루었다. 그 세상이 그만 무너져버렸다.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 속에 하나님과 맺은 먹거리 언약을 무시한다.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여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에 인류는 탐욕을 드러냈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그렇게 깨져버렸다. 하지만 그 파괴적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인간 탐욕은 인간과 온 우주에 아주 낯선 악(惡)을 선물하였다. 그렇게 인간은 에덴동산을 상실하였다.

인간의 타락- 화학 세상에도 우주적 붕괴를 초래하다

화학(化學) 없는 세상이란 없다. 솔직히 화학 없이는 인간도 세상도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화학은 세상과 인간 삶의 일부분으로 생명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들은 24시간 화학과 더불어 움직인다. 그런데 타락의 결과, 이 화학 안에도 붕괴가 임하였다. 인류는 세상 환경 속에서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긴장과 투쟁 속에 내몰리고 죽음 앞에 모든 생명이 결코 영원히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에덴동산 추방 이후 체험해 왔다. 화학 세상 속에도 선순환은 사라지고 낯선 악(惡)이 스며들었다. 심지어 자연 속 천연 물질 속에서조차 독(毒)이 생겨났다.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는 일찍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모든 물질은 독극물이다. 독극물이 아닌 물질은 없다. 단지 독극물이 아닌지는 투여량으로 결정될 뿐“이라 했다. 사람이 생명을 치료하는 약에 있어 투여량을 결정하는 여러 이유가 바로 이 ‘독성’ 때문이다.

인간 탐욕이 부른 대참사 화학제품 공포,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그 화학의 성격을 조심스레 살피면서 새로운 조작과 사용법을 알기 시작했다. 불을 사용하고 화학의 본질도 조금씩 알게 되면서 화학적 조작과 합성의 방법도 알게 되었다. 이것들은 세상에 없던 식품, 첨가물, 약품, 농약, 화장품, 플라스틱, 에너지 같은 다양한 공업용품, 화공약품 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 화학합성품들은 분해도 잘 되지 않을 뿐더러 생태 속에서 마치 생체호르몬처럼 작용하면서 다양한 급성, 만성 독성을 야기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가습기 살균제 대공포, 오염된 계란 대소동, 휘발성유기화합물 성분을 포함한 생리대 참사 등은 바로 그런 편린을 드러낸 사건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노케미족’(No-chemi)으로 살아야 할까?

모두가 방치한 화학제품 관련 사건으로 인한 공포는 화학제품에 대한 우려와 제조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면서 최근 친환경제품을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이른바 ‘노케미족’(No-chemi)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천연물에서 소박한 화장품, 주방용품, 세제, 첨가물 등을 찾으려는 시도는 바람직한 일이긴 하다. 필자는 자녀 셋을 키우면서 무수한 무명 기저귀를 갈아주고 빨았다. 아마 수만 장의 기저귀를 빨고 말렸을 것이다. 그래도 힘든 줄을 전혀 몰랐다. 많으면 하루 10장 이상 일회용 기저귀를 거침없이 갈면서 편함을 추구하며 비용부담과 화학부작용을 걱정하는 요즘 젊은 부부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화학합성품에만 독이 있는 건 아니다. 지상에서 가장 독한 독들은 실은 자연독들이다. 주로 세균으로부터 나오는 독이다. 포도상구균(葡萄狀球菌)같은 식중독 균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4대 독소도 모두 세균독이다. 클로스트리디움 보툴리눔(Clostridium botulinum)이라는 균에서 분비되는 보툴리눔톡신과 파상풍균이 내는 파상풍균독소, 디프테리아균이 만들어내는 디프테리아톡신, 토양 세균의 일종인 간균(桿菌)이 내는 Gramicidin이 모두 세균독이다.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성형의 재료인 보톡스는 바로 이 지상 최고의 독을 가공해 쓴다. 이렇게 자연이든 화학합성품이든 “노케미족”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래도 정말 노케미족으로 살려면 먼저 인터넷, 자동차와 아파트, 스마트폰 그리고 모든 전자제품들을 모두 버리고 탈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자연인이 장수할까?

‘노케미’를 추구하는 자연인이 현대과학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보다 반드시 장수한다는 보장도 없다. ‘노케미’로 살았던 100년 전, 평균 수명 50세에도 못 미치던 우리 조상들의 평균 수명을 보라! 유기농식품이 때로는 농약 친 식품보다 훨씬 위험할 수도 있으며 우리 몸에서도 무시무시한 방사선을 내뿜는 다는 것을 아는가? 농약 안 친 불량 감자의 푸르스름한 부분에 있는 솔라닌은 살충제 파라티온만큼 강한 독성이 있다. 불량한 콩, 땅콩, 시금치, 옥수수, 된장 등에는 자연 곰팡이가 내뿜는 아플라톡신이라는 강력한 간암 유발물질이 있다. ‘자연’이 곧 ‘안전’과 동의어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노케미족’이 우리 사회에 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 과학기술의 성과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과 찬사에서 벗어나 환경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인식을 싹 틔웠다는 효과는 주었다고 본다.

회복과 샬롬,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이 참 된 복인가

탐욕은 곧 우상이요 사망을 불러낸다고 성경은 말한다. 화학합성제품의 범람은 결국 큰 이윤을 챙기려는 인간이 지닌 탐욕적 본성과 편함을 추구하는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인과응보처럼 보인다. 성경은 이런 세상에 대해 분명 부정적인 종말론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교회는 이제 탐욕을 축복이라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금수저와 갑질할 수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이 출세이고 최고라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복이라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에너지 과소비를 조장하는 것들이야 말로 세상 오염과 환경 파괴의 탐욕적 주범들이다.

성경은 모든 발전을 무조건 죄악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개발이 약자들을 억압하고 약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환경에 큰 참사를 가져다주는 개발이 아닌 지 늘 주위를 살펴야 하고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속가능한 발전이 과연 무엇일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과 언약과 땅과 관계성과 공법과 정의와 사랑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노케미족’으로 산다는 것이 또 다른 개인적 이기주의 일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세상을 거스른 예수

세상을 거스른 예수님처럼 교회와 성도는 세상을 거슬러 가야한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어떻게 사셨을까? 예수님의 삶은 세상과 너무도 달랐다. 예수의 5대 무기는 뜻밖에도 세상과 다른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며 멸시받고 없는 것(자)들이었다(고전 1:25-26). 예수는 '약한 것이 무기'였고 늘 약자의 편이었다.

환경 문제에도 이 같은 영적 원리는 적용된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여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은 이 세상 복이 아니라 유혹(참사)의 도구일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탐욕은 결국 모든 종류의 환경오염의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조국 교회는 이제 마치 욕망의 환타지를 부추기는 듯 한 미숙한 믿음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도자들부터 과소비적 탐욕의 삶을 버려야한다. 성경은 젖이나 먹고 단단한 것을 못 먹는 자는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 했다(히 5:12-14). 거듭되는 화학제품 참사에 눈물을 흘리며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동굴 속에서 나와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전 4:20).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嚴威)와 참된 지혜를 바로 보는 길이다(롬 11:22). 조국 교회여 미숙한 탐욕의 동굴 속에서 하나님의 바른 창조 세상으로 이제 제발 나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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