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복음주의 어원

복음주의의 어원은 종교 개혁 시대로 올라간다. 복음주의는 독일에서 루터 교인들과 개혁주의자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던 개념이었다. 처음 반개혁주의자들은 개혁주의자들을 루터파 교도(Lutheraner) 또는 마틴파 교도(Martianer)라 불렀으나 1521년 루터는 복음주의자(Evangelisch)라고 고쳐 불렀다. 미국 복음주의 기관지 『오늘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가 복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고 또 조지 갤럽은 30%라고 했다.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이런 복음주의 안의 갈등을 상세히 잘 서술한 학자다. 그 갈등 가운데는 성경과 과학에 대한 견해차가 포함되어 있다. 블러쉬(D. G. Bloesch)는 먼저 복음주의를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구별한다. 둘째는 이단적인 것에 반하여 정통적인 것 셋째는 현재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하여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신학적 탐구보다는 생활과 체험을 강조하는 입장을 가리키고 영어권 나라에서는 침체된 교회 활동에 대해 영적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하였다. 맥그라스(Alister McGrath)는 이 복음주의의 주요 원천으로 종교개혁과 청교도 운동 그리고 경건주의를 든다. 즉 16세기 종교 개혁 시대의 복음주의는 반카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으며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복음주의는 1720년대 시작된 제 1차 각성운동과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 1714-1770)의 설교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절정에 달했다.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리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를 통해 영국교회 갱신 운동이 일어났으며 미국에서는 에즈베리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 2차 각성운동은 19세기 초 찰스 피니 등의 주도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신앙의 분리를 촉구하여 훗날 진화론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과학과 종교의 긴장을 불러일으킨 면도 없지 않다.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성

이렇게 종교개혁,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로 그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한 복음주의 운동은 과학적 사고와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와 같은 현대의 도구를 사용하면서 조금씩 분화 되고 보다 세련화 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주의 진영의 다양성을 가져다주고 과학적 해석에도 혼돈을 야기한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한 맥그라스는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에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는 분명 명백한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이 충분하다. 여기서 신학적 방법론에 관한한 어느 정도 일반화가 가능해진다. 복음주의는 청교도 작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가 남긴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freedom; in all things, love/ in necessariis unitas, in non-necessariis livertas, in utrisque caritas)이라는 명언처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훼손되지 않는 한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다. 아무튼 오늘날 복음주의는 우리 시대의 주도적 세계관과 대면하면서 복음주의적 지성을 담아내야 하는 기로에 서있다. “복음주의는 과학에 있어 진화론을 부정한다”고 말한 의사 출신의 명설교자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목사는 “복음주의자는 이성과 학문의 위험성을 아나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리를 버리는 일에 익숙한 포스트모던의 상황에 복음의 진리를 담아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과학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출현할 수 없었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복음주의 과학관

그렇다면 복음주의 과학관은 어떤 것일까.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들 복음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맥그라스는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바른 전통,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성령의 주권, 인격적 회심의 필요성 그리고 복음 전도의 강조가 일반화된 복음주의의 여섯 가지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6 가지 복음주의의 특징을 토대로 볼 때 복음주의 과학관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큰 영역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성경의 권위와 전통>: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와 창조주에 대한 초대 기독교의 믿음은 확고하다. 창조주는 우주와 역사의 통치자요 주관자이다. 이것은 플라톤(Platon)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나 플로티누스(Plotinus)가 말하는 선을 뛰어넘는 ‘초 본질적 존재’와도 다르다. 인격을 지닌 주권자이다. 물론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 창조주와 자연으로 나아가려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성경이 계시하는 증언을 기초로 이 창조주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했음을 인정하여 왔다. 이 우주의 시간과 공간과 빛과 어두움을 포함한 모든 물질은 무(無)로부터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 모두 창조의 영역에 속해 있다(골 1:16). 또한 그 창조주는 힌두교나 이슬람교처럼 이 세상에 무관심한 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인정하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은 부정하는 일종의 초월신론(超越神論)인 이신론(理神論, Deism)도 성경의 영역이 아니다.

유대교 출신인 사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속과 부활의 주가 되며 창조주임을 확신하면서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복음주의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복음주의라는 언어는 없었으나 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은 오늘날 복음주의의 뿌리가 됨은 물론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에 성경이 기록되었으며 비록 그리스도가 과학의 시대를 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과 그리스도라는 이 두 기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이 두 기둥과 이 두 기둥에 뿌리를 둔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그들을 따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룩한 정통 교리를 중심으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복음주의 과학관은 복음주의의 근간이 되는 성경이 증거하고 정통 교회가 고백해 온 모든 교리와 전통의 범위의 신학 방법론을 벗어나지 않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루터와 더불어 복음주의자의 뿌리와 같은 칼빈의 신학 방법론 가운데 적응의 방법에 주목하게 된다.

<둘째 자연 계시의 역할>: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 없이도 인격적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부정하나 피조 된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 계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복음주의 과학관은 자연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 자연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이 발현됨을 믿는다(시 19편 ,롬 1:20, 사 40:26). 문제는 자연 계시 자체가 인류와 우주의 온전한 복음(창조-타락-구속-새창조)을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자연 계시 속에도 하나님의 공유적, 비공유적 특성 가운데서 나타나는 완전성, 영원성과 같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삼위일체적 사역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들이 증거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자연 계시 안에는 창조 자체를 믿는 다른 종교들(카톨릭, 유대교, 이슬람, 힌두교, 영지주의 등)과 차별되지 않는다는 고민이 있다. 창조과학, 지적설계운동이나 진화론 문제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부딪히는 고민이기도 하다. 필자가 지적설계가 복음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복음적 지적설계>라는 말을 표방해야 한다고 충고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다.

<셋째 적응의 방법>:
마지막으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성경해석법인 적응(Accommodation)의 방법을 가지고 해석한다. 적응의 방법은 피동적 해석법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요 청지기로서 미래의 자연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적응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원과 윤리에 대한 반성경적 주장에 대한 적극적 반응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복음주의 과학관의 실천적 모색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주의자들과 과학 시대의 태동

16-17세기에 들어 인류의 과학적 사고에 혁명이 일어난다. 이 시대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us, 1473-1543)로부터 뉴턴(Issac Newton, 1642-1727)에 이르는 동안 고전적 근대 과학(classical-modern science)은 고대 및 중세 과학의 대부분을 무효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5)와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바로 16 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인물들이다. 루터와 칼빈은 근대 과학을 향해 꿈틀거리며 역동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자연 과학의 바람을 결코 피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던 시대를 살았다. 비록 자연과학도는 아니었으나 당대 영적 지성의 상징적 인물들이었던 루터와 칼빈은 과학에 대해서도 어떤 식으로든 신앙적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히 칼빈의 경우 점성술이나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결코 적지 않았다. 과학이 꿈틀대던 루터와 칼빈 시대는 천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였다. 루터와 칼빈은 과연 신학과 종교와 자연과학의 긴장과 충돌을 상징하는 쿠페르니쿠스의 태양계 중심설에 대해 어떻게 해서적 접근을 하였을까? 당시는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지구 중심설이 성서의 지지를 받는 듯 여겨지던 시대였다.

루터는 결코 자연에 무지한 학자가 아니었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모든 자연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존재함도 인정하였다.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 본질의 완전성과 아들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이 현존함을 인정하였다. 다만 루터의 관심의 중심은 달랐다. 루터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관심보다 과학의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에 좀더 집중한다. 아란트(Charles P. Arand)는 루터의 창조론(Luther's Thought on Creation) 강좌에서 루터의 요리문답 제 1조에 나타난 창조론과 그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루터는 후기 작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란트는 창조주와 창조물 간의 경계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과의 구분 그리고 하나님의 가면(Larva Dei)으로서의 피조물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피조물은 존재의 낮은 질서에 속한 것에 멈추지 않는다. 피조물은 오히려 신적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렇다고 인간이나 피조물이 창조의 중심이 아니다. 루터는 철저히 인간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 초점을 맞춘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주 하나님은 광대한 은하수로부터 미세한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창조물을 만드신 분이다. 하나님은 무로부터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 또한 창조주는 인간들을 다른 창조물로부터 구분한다. 하나님은 세계의 일부분이 아니요 세계는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다. 이것은 과정 신학(과정신학은 진화론을 긍정함)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루터의 창조 신학에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루터는 어거스틴처럼 자연 중의 삼위일체흔적(베스티기움 트리니타티스)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루터는 아버지를 문법, 아들을 변증법, 성령을 수사학으로 비유하곤 했다. 그럼 칼빈은 어떠했는가. 앤드류 딕슨 화이트(Andrew Dickson White)는 ⌜과학과 신학의 전쟁 역사⌟(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1896)에서 “칼빈은 창세기 주석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통상 시편 93편 1절을 인용하면서 이 문제에 도전했고 어느 누가 감히 성경의 권위 위에 코페르니쿠스의 권위를 올려놓으려 할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안티기독교인이었던 러셀(B. Russel)은 서양 철학사에서 화이트가 주장한 이 내용을 반복해서 인용하면서 칼빈을 공격한다. 심지어 최근의 토마스 쿤(T. S. Kuhn) 조차 이 구절로 칼빈을 공격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칼빈을 반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고 인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위의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꼼꼼히 살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칼빈의 어느 책에도 위의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칼빈은 시편 93편 1절에 대한 주석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지동설을 유지하고 천동설을 주장하는 해석학적 오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사실에 대한 분명한 강조를 말한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하고자 감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문헌은 결코 없다. 로젠(E. Rogen)은 화이트와 반대로 칼빈의 모든 텍스트를 찾아보았으나 칼빈이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들어본 일도 없고 따라서 그에 대해 어떤 태도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호이까스(R. Hooykaas)도 칼빈은 한번도 코페르니쿠스를 언급한 적이 없으며 칼빈이 말했다는 ‘인용구’는 모두 가공의 산물임을 지적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칼빈이 죽기 25년전(1539) 마르틴 루터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가 카톨릭의 인물이었고 칼빈보다 루터가 카톨릭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칼빈이 코페르니쿠스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칼빈의 저서나 관련 문헌에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일까? 여기서 칼빈의 신학적 방법론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칼빈이 설혹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해도 그리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그것을 공적으로 논평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코페르니쿠스가 죽은 후 거의 반세기 동안이나 그의 태양 중심설은 지지자들을 거의 얻지 못하였다. 겨우 한 대학교(스페인의 Salamanka 대학)에서 가르쳐졌으며 보댕(Jean Bodin, 1530-1596)이나 몽테뉴(1533-1592) 같은 16세기 후기의 학자들도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침묵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이후 반세기가 지나서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에 의해서 본격 부활된다. 신학자로서의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관심의 대상이었더라도 자신의 저작 가운데서는 간과되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저서에 나오지도 않는 이 코페르니쿠스를 비난했다는 낭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인용이 되었던 것일까? 샤프(John Sharp)는 멜랑히톤의 물리학 서론(Intia Doctrineae Physicae)에서 인용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세상이었다. 칼빈은 과학을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칼빈은 자연과학에 대해 열려있었으며 자연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칼빈은 과학적 연구를 적극 권장하였으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질 세계와 인간의 몸은 모두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거한다. 칼빈은 천문학과 의학 연구를 모두 적극 추천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더 많은 증거와 지혜와 섭리를 알게 되는 일이었다. 과학이 하나님의 과학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칼빈과 루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창조 신앙의 반열에 있었다.

다만 칼빈은 성경을 관점과 관심이 다른 책으로 보았다. 성경은 천문학이나 고도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책이 아니었다. 성경은 전문 과학 서적처럼 대할 책이 아니었다. 칼빈은 분명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종교적 동기를 부여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자연은 조금 일그러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아름다운 책으로 본 것이다. 피조세계의 연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훌륭한 도구였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이었다. 1645년과 그 이듬해 과학에 헌신한 사람들의 부정기적 모임으로 출발한 영국 왕립협회(The Royal Society) 회원 대부분이 청교도적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칼빈은 성서 해석에 있어 자연 과학을 결코 부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국 왕립 협회(royal society) 회원의 압도적 다수는 칼빈주의 청교도들이었다. 하지만 칼빈은 과학과 과학자 만능의 엘리트주의자가 아니었다. 칼빈에게 있어 분명한 것은 성경의 종교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원리였다. 칼빈이 보기에 하나님의 영(靈)은 특별한 사람들만 배려한 고등 교육 기관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통 학교를 개설하시는 분이었다. 칼빈의 해석학에 대한 평택대 안명준 박사의 명쾌한 논문인 칼빈의 해석학에 있어서의 간결성과 용이성(Brevitas et Facilitas)의 방법론은 칼빈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모세는 지식인 뿐 아니라 무식자의 선생으로도 소명을 받았다. 그래서 칼빈은 천문학이나 기타 난해한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성경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보아야 할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계속)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창조신학칼럼 #조덕영 #조덕영박사 #조덕영소장 #조덕영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