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호 씨.   ©크리스천포스트

[미주 기독일보] 지난 5월 26일 장애인 탈북자 지성호씨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오슬로 자유포럼'에서 북한 인권 참상을 고발했다.

1990년대 북한에 김씨 가문 세습정권의 무능함으로 흔히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극심한 기근이 발생한 데다 러시아의 지원까지 줄어들며 400만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장애인인 지성호씨가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자유를 찾아 탈북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지성호씨의 강연 내용이다.

"1994년 이후 고향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그 중에는 같은 반 친구도 있었다. 당시에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수업을 듣기 위해 교실 의자에 앉아있던 친구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북한 사람들은 굶주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시작했고, 하루 하루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나무 껍질과 풀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도 먹을 수 없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배급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졌고, 김정일은 북한에서 가장 기아가 심각한 곳부터 식량을 공급하지 않았다. 그들을 굶어 죽이려는 의도였다.

'제22호 수용소(Camp 22)'로 알려진 정치범 수용소는 고향인 회령의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탄광 근처에 있었는데, 죄수들은 매일 1,200톤의 석탄을 캐내야 했다. 나는 이 석탄을 가득 실은 열차에 올라 타 석탄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당시 14살이던 나는 밤이면 어머니, 그리고 12살 여동생과 함께 열차에 올라 석탄을 훔쳤다. 열차가 역에서 출발해 서서히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몰래 열차에 올라타 준비해 온 부대에 석탄을 담았다.

1996년 4월의 이른 아침,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는데, 그 때 내 인생에서 너무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움직이는 열차에 올라탔는데, 나와 같은 도둑들이 여러 명 열차에 타 부대에 석탄을 담고 있었다. 이들은 온 몸이 석탄으로 인해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그 때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인지 나는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리고 내가 원래 뛰어내리려고 계획했던 다음 정거장으로 열차가 가고 있는 중에 나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 나는 갑자기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깜빡 정신을 잃은 동안 나는 열차에서 떨어졌고, 기차가 나의 왼쪽 다리 위로 지나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왼쪽 다리는 저쪽에서 나의 몸과 힘줄로만 연결되어 있었다.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고, 나는 지혈을 위해 손으로 다리를 움켜잡았다. 그 때 나는 내 왼손의 세 손가락도 열차에 의해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열차에 의해 짓이겨진 부분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나왔고,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영하의 추위는 나의 고통을 더 극심하게 했다.

그 때 여동생이 피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는 나를 발견했고, 여러 친구들에게 알려 나를 겨우 병원으로 옮겼다. 북한은 무료 국민 건강 보호 시스템이 있지만, 실제로는 돈을 내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의약품과 의료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다. 나는 거의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치료를 받았다. (그는 이 부분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지금도 톱으로 내 다리의 뼈를 잘라낼 때 났던 소리와 자르는 동안 이리 저리 흔들렸던 몸의 흔들림을 기억한다. 수술을 하는 동안 의사가 내가 의식을 잃고 죽지 않도록 뺨을 때렸다.

나는 아무런 약이나 극심한 통증을 잡아줄 진통제를 받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매일 밤마다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의 가족들을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고, 남동생이 쓰레기더미를 뒤져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나 국수 등을 가져와서 손으로 형인 나의 입에 넣어주었다. 내가 회복하는 동안 남동생과 여동생은 들에서 풀을 먹거나 산에 있는 버섯으로 연명했다.

여름이 되자, 절단 부위 주변의 살들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냄새를 맡기 힘들 정도의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다리의 뼛 조각들이 염증이 생긴 피부에서 돌출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무려 8개월(240일) 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통증이 사라졌고, 나는 내가 어릴 때 놀렸던 사람들과 같은 불구자가 됐다. 내 인생에 더 이상 미래는 없고 자살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18살이 되었을 때, 나는 목발을 짚은 채로 먹을 음식을 찾아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중국의 개들이 먹는 것이 북한에 있는 나의 가족들이 먹는 음식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쌀을 메고 북한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경찰(인민안전원)에 잡혔다. 그 경찰은 나에게 "너 같은 쓸모 없는 불구자는 우리 나라의 수치"라면서 "위대한 영도자의 존엄을 실추시키고 손상을 입혔다"고 소리쳤다.

그들은 나의 쌀을 빼앗은 후에 나를 심하게 고문했다. 내가 불구자라는 이유로 더 심하게 매질을 했다. 또 나의 상처 부위에 대해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을 퍼부었다. 이것은 내가 북한에서 탈출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는 동기가 됐다. 내 동생과 나는 탈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와 내 남동생은 북한의 여러 곳을 거쳐서 드디어 밤에 두만강을 건너게 됐다. 이 때 나는 깊은 곳에 빠져서 물을 너무 많이 먹었고, 그렇게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다. 내 동생이 나를 물가로 건져내 겨우 살았다.

목발에 의지한 채 한 발로 절뚝거리며 겨우 탈북한 나는 이후 탈북자 지원단체의 도움으로 중국을 지나 라오스, 미얀마를 거쳐 태국에 이르기까지 무려 9,656km(6,000마일)를 도보나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해 여행했다.

나와 내 동생은 중국에 도착한 이후 서로 이별을 했다. 둘이 함께 있다 잡힐 경우, 둘 다 처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부분 보도로, 때로는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해 중국을 한 달 동안 횡단했다. 한 번은 라오스에 있는 산을 넘어야 했는데, 너무 가파른 정글 지역이어서 자신이 없었지만 목발에 의지한 채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던 중 나는 더 이상 힘이 없어서 '결국 이곳에서 죽겠구나,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하고 울기 시작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말 죽고 싶었다.

그 때 나는 마침내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구해주세요. 저는 한국으로 가려고 합니다. 저를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세요"라고.

나의 기도는 응답됐다. 왜냐하면 나는 태국에 안전하게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2006년 한국에 도착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술을 받고 의족을 하게 됐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나의 탈북행 가운데 함께 하시고 도우셨다고 믿는다.

나는 이 기쁨을 나의 아버지와 함께 나누고 싶고, 이 행복의 세계로 아버지를 모셔오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내가 남동생이 탈북을 한 이후에 나의 엄마와 나의 여동생도 탈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북한 인민 안전원에서 찾아와 아버지를 체포해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고문하고 외바퀴 손수레에 실은 후 빈집에 버리고 가벼렸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는 꿈을 이루었다. 졸업 후에 나는 북한인권을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나우(Now, Action and Unity for Human Rights)를 알게 됐다.

지난 4년 동안 나우는 100명의 북한 어린이, 장애자, 소녀들을 구출해 한국행과 한국 정착을 돕고 있다.

한편, 이날 강연을 마치면서 지성호씨는 자신의 9,656km(6000마일) 탈북 여정을 함께 했던, 아버지가 만들어준 목발을 하늘 높이 들었다(사진 참고).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나는 죽음의 직전에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승리에 이르렀다"며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북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외쳤다.

* 이 글은 크리스천포스트에 기재된 블로그 포스팅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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