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증진센터 이한별 소장.
북한인권증진센터 이한별 소장. ©북한인권증진센터 제공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지난해는 UN세계인권선언 70주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대한민국에서 북한인권 문제는 쉽게 거론되지 못했다. 오히려 같은해 북한인권재단은 폐쇄됐고, 최근에는 해킹으로 지역의 하나센터 탈북민들 정보가 노출돼 신변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북한인권단체들 혹은 탈북민들에게는 어려운 시기인 듯 보인다.

이에 탈북민이며 기독교인으로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북한인권증진센터 이한별 소장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듣고 간증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지금 현재도 북한 땅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특히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이들과 강제 억류되어 있는 우리 국민들이 있다"면서 "이 분들의 생사가 위급한 상황이다. 이런 분들이 하루 속히 석방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이 일에 나서 주신다면, 북한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서 대통령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한별 소장은 한국외대에서 중국어와 법학(문학사) 등을 전공하고, 연세대 일반대학원 통일학협동과정(통일학 석사)을 마무리 했다.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전 안양시청에서 공무원으로 북한이탈주민 상담 및 6.25전쟁 납북피해 신고접수 등을 담당했으며, 통일전문가 단기양성 국외연수(독일,체코) 등을 다녀오면서 사명 받음을 느꼈다.

그간 북한인권법 제정 활동 및 유엔 북한인권현장사무소 유치촉구활동 등을 벌였으며, 탈북민긴급구출과 북한인권 개선 캠페인, 북한인권 침해 조사 및 기록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더불어 북한인권 그림전(단체전) 등 2018년 11월부터 탈북화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주로 북한인권 문제를 사람과 가족의 이야기로 그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공무원 및 중학생 안보강의, 교회, 방송출연 등 다수의 강의 경력도 갖고 있다. 다음은 이한별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Q1. 간략하게 본인과 '북한인권증진센터'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1999년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시기에 탈북을 했습니다. 그 당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아사해서 굶어죽는 것을 직접 봤습니다. 저희 또래 학생들은 학교로 못나가고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친구가 꽃제비가 되는 그런 상황도 많이 봤습니다. 그 때 저희 어머니가 중국에 자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위부의 감시 대상이 되면서 더 이상 북한에서 살기 어려워져 탈북을 했습니다. 중국에서 2년 9개월 지내다가 한국에 왔고, 한국에 와서 대학교를 다닌 후 안양시청 공무원 3년 2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탈북민인권침해신고센터’를 설립해서 탈북민들의 인권침해 실태를 보고서로 국제 사회에 알렸습니다. 특별히 북한인권을 위한 UN북한인권현장사무소가 서울 종로에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에 2016년도에 탈북민들의 인권침해 실태 보고서를 제출하고 정부기관에 (단체를) 등록하면서 ‘탈북난민’이란 용어가 국제법상에는 옳지만 대한민국 정부기관에 등록할 때는 그 단어보다는 다른 용어를 썼으면 좋겠다고 해서 ‘북한인권증진센터’로 명칭을 변경해 설립 했습니다.

제게는 북한인권 단체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북한인권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저희 오빠가 2009년 강제 북송 당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또 그 전에도 어머니께서 2002년도와 2004년도에 두 차례 강제 북송되면서 북한인권 실태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지 잘 알게 되면서 북한인권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라오스 탈북청년 강제북송 사태가 있었는데, 그 때 자원봉사 하면서 북한인권 단체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지금 현재 제3국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탈북여성들이 인신매매 피해를 많이 겪고 있습니다. 10대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겪고 있는데, 국제 사회가 다 금지하는 미성년자에 대한 인신매매이기에, 이런 실태가 너무 심각해서 그런 여성들을 구출하도록 요청하는 일을 저희 단체에서 하고 있습니다. 10대가 아니라도 20~30대 여성들도 긴급 구출을 요청하면 저희가 구출하고 있습니다. 2016년 5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구출한 여성이 15명 정도 됩니다.

Q2. 지난 해 말 소장님과 북한인권 단체들이 참여했던 자카르 코리아 대회가 마무리 됐습니다. 소기의 성과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한다”는 이 ‘자카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며 이 대회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북한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계속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또 실천하는 그런 활동을 하고자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제일 박해가 심한 사람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고, 정치범 수용소 문제 해결을 촉구했었다. 그리고 또 오빠가 2009년 강제 북송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고, 생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를 알고자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작년 12월 김정은이 서울에 온다는 이야기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이 자카르 기간 동안 북한인권 이야기가 북한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얘기하면 북한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고 숨기고 싶고 치부처럼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정부도 직접적으로 북한에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도적 지원을 하더라도, 남북 정상이 회담을 하거나 만났을 때는 제일 심각한 이 인권 문제가 거론돼야 된다고 봤습니다. 결국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서 자카르 코리아 대회를 하게 됐었습니다.

자카르 코리아 대회 기자회견
지난해 말 자카르 코리아 대회 기자회견에서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오빠에 대해 알리고 있는 이한별 북한인권증진센터소장 ©기독일보 DB

Q3. ‘자카르 코리아’ 행사의 일환으로 소장님은 특별히 단독 기자회견을 열었고,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오빠가 북송된 당시에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 상황인지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2009년 오빠가 저희 도움을 받으려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사실 완전 탈북은 아니고 그냥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겁니다. 그런데 당일 날 중국 변방 군인들에게 잡혀서 강제 북송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오빠가 변방 군인들에게 자기를 풀어달라고 빌었나 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남한에 있기에 자기는 강제 북송되면 죽는다고, 제발 자기를 풀어달라고 간구했는데, 야속하게도 중국 군인들이 그 내용까지 서류상 그대로 적어서 북한에 오빠와 함께 송환했다고 합니다. 2009년도는 김정은이 북한 보위부를 장악할 때입니다. 당시 북한의 보위 사령부에서 (누군가) 남쪽하고 통화를 하면 간첩으로 누명을 씌울 수 있고, 반역죄 씌울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 때 보위부 사령부에서 내려와 오빠를 조사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보냈습니다.

오빠에게는 두 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하고…가족이 없어졌어요. 아내와 강제이혼을 시켰습니다. 오빠 생사확인을 할 수 있는 가족이 없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저희가 생사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실태에 대해서, 2016년도 서울에 있는 ‘북한 인권 현장 사무소’에 저희 오빠 생사 확인을 요청하는 서류를 제출했고, 2018년 8월에 북한이 유엔이 답변을 보냈는데, 북한은 “정치적으로 음해할 목적으로 생사확인을 요구하는 건 답변할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그런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게 되는 현상이 유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피해자 가족들이 침묵하는 게 아니라 자꾸 이런 문제를 논의하고 거론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빠 생사확인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지게 됐습니다.

Q4. 얼마 전 하나센터 해킹으로 탈북민들 정보가 유출되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번의 경우가 아니라도, 최근들어 달라진 분위기로 말미암아 탈북민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가 불안감으로 탈북민들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일단 북한하고 관계가 좋아져야 하기 때문에, 탈북민들은 북한에서는 반역자란 죄명을 씌우고, 배신자로 죄명을 씌워 불러버리기 때문에 북한과 사이가 좋을 때 우리 탈북민들은 묻혀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 자기 고향 땅을 목숨을 걸고 떠나려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정말 절박하고 생계에 대한 위협이 있으니…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도록 압박해 버리니까…인간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그런 상황에서 탈북을 하는 것이지, 다 나쁜 사람들이라서 탈북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남북정상이 회담할 때 우리는…탈북민에 대한 관심도가 사회적으로 떨어지고, 과거 정부와는 다르게 다 묻혀져야 하고…북한인권 단체 가운데 조사 받은 곳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국가 지원도 많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북한 인권법에 의하면 재단도 사실 설립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는 재단을 폐기할 정도였고, 재단 이야기는 다 들어갔습니다. 북한 인권을 이야기하는 민간단체들도 지원 받을 수 있는 법적 조항들이 사실 북한인권법에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 아직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센터 해킹사건도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까지 유출됐기 때문에 많은 탈북민들이…탈북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민들도 많이 있거든요. 특히 2017년 탈북한 분들도 있습니다. 저희 단체도 2017년 탈북한 분들도 구출했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많이 불안해합니다. 남한에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가서 고문을 받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고 그러는데, 그런 것들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불안으로 작용할지 저도 당사자로서 너무 공감이 되고 우려가 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정부에서 탈북민 관련된, 또 정부 산하 기관들이 더 (탈북민) 보호에 더 애쓰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스웨덴 탈북꽃제비 강제송환 중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이한별 소장.
스웨덴 탈북꽃제비 강제송환 중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이한별 소장. ©북한인권증진센터 제공

Q5. 탈북민 출신으로서 북한인권 증진을 위해 정부에, 또 국민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 부탁드립니다.

국민들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또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절박합니다. 특별히 또 우리 국민들이 북한에 억류당한 분들도 계십니다. 선교사님들도 계시고. 이런 분들이 생사가 위급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한데, 우리는 너무 둔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국민들 가운데 알고 계신 분들도 있지만, 좀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앞으로 있을)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꼭 좀 거론해 주기를 바랍니다.

Q7. 사모님이시기도 합니다.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또 남편인 북한정의연대 대표 정베드로 목사님을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사실 북한에 있었을 때, 저희 친할머니가 그루터기 신자셨는데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또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 그 때 당시에는 그것이 기도하는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한국에 와서 교회를 다니면서 ‘아 그 때 아버지께서 기도를 하신 것이구나’를 알았습니다. 고난의 시기 한참 힘들 때, 아버지께서 항상 특정한 방향으로 앉으셔서 머리 숙이고 주무시지는 않는데 계속 몸을 흔드셔서 ‘무슨 생각을 많이 하시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 아버지가 기도를 하셨구나’ 싶습니다. 또 아버지께서 전쟁 시기 태어나셨는데, 어머니를 통해서 당시 아버지가 영아세례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할머니께서 목사님께 찾아가서 받았다는 것이지요. 저희 집안은 그런 집안이었는데 저는 그런 것을 하나도 몰랐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제가 어린 나이라 말을 또 잘못하면 집안이 다 추방당하니까 (말을 조심하셨던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는 기독교 박해는 정말 심하잖아요? 기독교를 아편으로 분류하고 김일성이 기독교인들을 엄청난 박해를 했었습니다. 그걸 아니까 부모님은 저의 입단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단지 한 번, 아버지께서 “신이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 한다”는 한탄을 하셨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 때 어린 마음에 ‘아 우리 아버지는 신을 믿는구나’ 이 정도까지는 알게 됐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8살 때 북한의 장진호 전투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그걸 봤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 연합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마지막에 기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 막연히 기도해보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존재인지도 몰랐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한국에 와서야 접하게 됐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대학 청년부 여름 수련회 갔다가, 그곳에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속사 사건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단지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마음의 감동도 있고 영접도 했지만, 그러나 좀 더 하나님을 절실하게 믿게 된 계기는 2007년 12월 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준비하는 시기였는데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 때 교회 청년 한 분이 빌립보서4:6을 보내주면서 힘내라고 했었습니다. 그 말씀이 너무 많이 위로가 됐었죠. 이후 말씀을 계속 읽고, 말씀에 너무 심취하고, 하나님 말씀을 많이 묵상하고 그랬습니다. 어떤 때에는 다윗처럼 시편을 읊기도 했습니다. 찬양도 하고. 그러다 보니 성령의 감동으로 어느 순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고, 성령의 감동이 밀려와 그동안 닫혔던 영적인 것들이 많이 열리며 더 하나님을 간절히 믿는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장은 평생 가는 것이기에, 저는 지금까지 믿음이 성장하는데도 10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해 갈 것입니다. 믿는 탈북민들도 계속해서 믿음이 성장해야 하는 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탈북민이 교회 갔다가 정착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사실 큰 도움보다도 관심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 분이라도 와서 말을 걸어주고, 불편한 것이나 한국 사회에 적응 하는 것에 이야기도 해주고. 그렇게 말 붙여 주는 것에 대해 저는 굉장히 감사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아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인간적으로 발을 붙이는 데에서 굉장히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어가면, 말씀에는 힘이 있죠. 말씀이 들어가면 닫혔던 마음이 많이 열리고 영혼 구원이 이뤄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정베드로 목사님 만난 이야기를 해볼게요. 제가 2010년 안양시청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독일에 통일전문가 국외 연수를 갔었습니다. 당시 동독 니콜라이 교회를 갔는데, 하나님께서 독일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신 이유는 독일 사람들이 정말 교회에서 통일을 위해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광장 밖으로 나와 기도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통일을 위해 같이 예배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에 평화적인 통일을 주셨다는 마음의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니콜라이 교회에 제가 가진 돈도 다 헌금하고 우리 한반도에도 그런 평화적인 통일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를 했었습니다. 또 독일에 가서 중앙기록 보존소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통일을 준비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을 갖고 연세대 통일대학원 석사 과정에 진학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SNS에 정베드로 목사님이 서울역에서 통일광장기도회를 한다는 홍보글을 올렸습니다. 그 행사에 참석해서 정 목사님를 처음 만났습니다. 또 목사님이 인권활동을 하고, 중국에서 탈북민들을 돕다가 1년 반 정도 감옥생활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감동이 있었죠. 저도 가족이 인권 침해를 당한 피해자이기에, 북한인권 봉사활동을 목사님 단체에서 하게 되면서 목사님과 인연이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거리에서 집회 중인 북한인권증진센터 이한별 소장.
거리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북한인권증진센터 이한별 소장. ©북한인권증진센터 제공

Q8. 여성의 몸으로 어려운 북한인권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어떻게 어려움은 극복하셨나요?

사실은 북한 인권 활동을 처음 하면서 3년 반 정도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거의 매일 울 정도로. 처음 1년 반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그 뒤 2년, 3년은 정말 월급도 없이 이 활동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도 힘들지만, 정말 힘들었던 부분은 이 일에 대해 남한 국민들이 공감하지 못하고 참여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굉장히 안타까웠습니다. 또 ‘북한인권’ 하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보는 시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북한인권’은 정치를 넘어 ‘사람’과 ‘가족’의 이야기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면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를 많이 못하고, 이를 알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더불어 인권 활동을 하는 것은 정책 제안을 할 수도 있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러나 탈북민 출신으로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우리도 한국사회에 정착하는 사람인데, 정부에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우리 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을 감수하고 그런 얘기를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NGO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부도 견제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발언들을 해야 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저에게는 많은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극복할 수 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다면,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가 참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기운을 잃거나 낙심했을 때 정 베드로 목사님도 옆에서 많이 기도해 주었고, 더불어 주변에서 기도해주고 교회들이 동참해 주고 그래서 극복이 가능했었습니다.

Q9.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 현재도 북한 땅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또 우리 국민들도 강제 억류 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생사가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런 분들이 하루 속히 석방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이 일에 나서 주신다면, 북한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서 대통령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이 주축이 되고, 국민이 힘을 가지고 나선다면 ‘우리가 북한인권 문제를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에 많은 분들이 참여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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