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수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 중 지금까지 '한국과 영어권 내에서는 연구서가 전무할 정도로 학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사이먼 그리네우스(Simon Grynaeus, 1493-1541)를 한 역사신학자가 조명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13일 오전 7시30분 한국기독교학술원(한국기독교연합회관 910호) 진행된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 제19차 월례기도회 및 종교개혁신학 특강에서 한병수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는 '사이먼 그리네우스 (Simon Grynaeus)의 신학과 종교개혁에의 기여'를 주제로 발제했다.

그는 먼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몇 사람의 특출난 영웅들이 발휘한 교리적 목회적 지도력에 의해서만 주도되지 않았다"며 "막후에서 종교개혁 운동의 성공적인 정착과 진전의 밑거름 된 사이먼(Simon Grynaeus, 1493-1541)과 같은 인물들도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인물들에 버금가는 존중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이먼은 하나님의 뜻과 복음이 일하도록 '막후에서'(hinter den Kulissen) 평강과 겸손의 자리에 어떻게 머물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보여준 탁월한 범례라고 한 블라지의 진술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사이먼에 대해 "정밀한 번역가, 열정적인 문헌학자, 논리적인 철학자, 경건한 신학자, 성실한 교육자, 잔잔한 개혁자, 평화의 지도자란 호칭이 적합하나 이 모든 별칭들이 그냥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로마서 주석이 헌정된 대상자란 지배적인 이미지 아래 묻히고 만 인물이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종교개혁 무대에 등장하여 당시의 여러 인물들(멜랑히튼 및 칼빈)에 의해서는 존경과 칭찬을 받았으나 이후의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것에 부응하는 관심과 대우를 받지 못하였던 한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라며 "종교개혁 초기에 바젤의 개혁자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도시를 개혁주의 신앙으로 이끌었던 신실한 신학자", "비록 왕성한 신학서적 집필보다 고전 문헌 발굴에 보다 집요한 애착을 보였으나 보름스 회의에 유일한 스위스 대표자 자격으로 참석할 정도의 공인된 권위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을 바젤에 공고하게 정착시킨 유력한 가문을 일으킨 주역"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사이먼의 역사적 '간과'는 소수의 특정한 인물 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추앙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몸이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적정하게 수행하게 하고 그것에 상응하는 서로간의 존중과 배려와 관심과 신뢰가 각자에게 골고루 주어지는 것이 교회 전체에 큰 유익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임에 분명하다"며 사이먼의 업적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한병수 박사는 칼빈과 사이먼의 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칼빈은 자신이 주석계에 입문하며 쓴 첫번째 데뷔작을 헌정할 정도로 사이먼을 존경했고 인정했고 동의했던 것으로 사려된다"며 "칼빈의 로마서 주석 헌정에 대해 사이먼은 칼빈과 칼빈의 이름이 자신에게 자랑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우정이 나에게 최고의 명예가 된다'고 하였으며 자신을 향한 칼빈의 우정과 신뢰(amicitia et fide)를 '이 세상의 모든 선한 사람들 중에 이보다 더 경건한 우정이 없을'(cui nihil in vita est sancta omnius bonorum amicitia potius) 정도로 높이 평가하며 당시 미래가 총망되던 젊은 청년 칼빈에게 예를 갖추어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고 했다.

그는 '주석가의 으뜸가는 덕목으로 칼빈과 사이먼이 공감했던 명료한 간결성(perspicua brevitas)'에 관해서도 언급하며 "사이먼이 칼빈보다 인생의 16 년치 선배이고 칼빈이 사이먼의 수업을 들었을 것이라는 높은 가능성에 비추어 본다면 '명료한 간결성' 덕목에 대한 사이먼 입장의 중요성은 작지 아니함이 분명하다"며 "그 방법의 결정적인 동기는 사이먼의 기하학 이해에서 찾아진다"고도 언급했다.

또 칼빈과 사이먼의 관계성은 칼빈의 로마서 주석이 출간된 1539년 이전부터 형성됐다며 두 사람이 교환한 서신의 일부 내용들을 소개했다.

그는 "특별히 칼빈과 파렐이 1537년에 로잔에서 작성한 제네바 신앙고백 및 교리문답 문헌에 근거하여 아리우스 사상의 협의가 있다고 비방하한 소르본 신학자 삐 에르 카롤리(Pierre Caroli)와 심각한 신학적 대립에 부딪혔고 그런 대립의 소식이 바젤에도 전해지자 칼빈은 1537년 5월에 사이먼에게 서신을 띄워 카롤리의 터무니 없는 비방과 관 련된 사태 전체를 설명하며 바젤에 흩어져 있는 경건한 사람들로 하여금 왜곡된 소문에 호도되지 않고 사태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제네바 교회의 신앙고백 및 칼빈의 이 서신을 다른 동료들과 두루 공유해 달라고 부탁했다"며 두 사람의 두터운 신뢰 관계를 설명했다.

또 "이에 사이먼은 카피토(Wolfgang Capito, 1478-1541)가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해서 괴이한 소문(rumor)과 이로 인하여 겪는 제네바 교회의 고초에 대해 알려 주었다고 말하였고, 제네바 고백서(confessio)가 바젤에 도착 했을 때에 이 고백서가 '자신에게 충분하지 않다(non sibi satis)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전적인 찬동을 표하였다"고 그는 전했다.

그러면서 "사이먼은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분명히 밝힌)칼빈의 삼위일체 교리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며 "자신의 글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믿음의 벗이 정교하고 신중한 붓으로 풀어낸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공감하고 있었다"고 한 교수는 덧붙였다.

그러나 "칼빈과 사이먼의 관계에 순풍만 분 것은 아니었다. 칼빈과 파렐에게 보내어진 1538년 3월 4일자 사이먼의 편지가 역풍의 대표적인 사례이다"며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 짙었던 기존의 서신과는 달리 여기서는 비판과 대립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사이먼의 논지는 칼빈과 파렐이 베를린의 루터주의 성직자 피터 쿤츠(Peter Kuntz)와 세바스찬 마이어(Sebastian Meyer)에 대한 적대감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고 말하며 "정치적인 이유는 쿤츠가 지금 베를린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이고 신앙적인 이유 는 지금의 갈등이 '사탄이 광기를 발산하되 가장 강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시도하는'(Satanam saevire potentissime et conari modis omnibus nos divellere) 상황의 일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서신의 전반적인 논조는 칼빈에게 양해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칼빈이 쿤츠와 화평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며 "사이먼이 보기에, 갈등에 임하는 자세에 있어서 쿤츠와 마이어는 칼빈과 파렐에 대해 그래도 '지극히 친밀하게'(amicissime) 다가서는 자세를 취하는데 '가장 친애하는'(carissime) 칼빈은 '너무나도 심하게 적대적인'(longe infensissimum) 태도를 취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칼빈이 분개한 이유를 사이먼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사이먼은 베를린의 두 성직자가 '극도로 야만적인'(perquam rusticani) 성향을 가졌으며 그들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자신도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고 인정했다"며 "그러나 한 형제가 아무리 미개하다 할지라도(quantumvis inculti) 마음의 목적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교회에 대한 열심을 보고서도 그 '형제를 내버릴 수는 없다'(non possum fratrem abiicere)며 사이먼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칼빈의 처신을 책망했다. 그리고 부드럽게 변하여 쿤츠와 화해하게 된 파렐의 본을 따르라고 권고했다"고 전했다.

한 교수는 "이렇게 20대 후반의 젊은 칼빈에게 서신으로 전한 사이먼의 책망과 충고는 결코 두 사람의 사이 를 이간하지 못하였다"며 "오히려 서로에 대한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다졌다는 사실이 앞에서 살핀 1539년 칼빈의 로마서 주석 헌정에서 분명히 확인된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렇다고 칼빈이 사이먼의 모든 것들을 다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사이먼이 가진 취약점도 잘 간파하고 경계하는 태도도 취하였기 때문이다"며 "특별히 칼빈은 성찬에 대한 사이먼의 미간행 저작에 대해 비록 그것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사이먼이 '애매한 교수법'(ambigua docendi ratione)을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경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계 는 미미한 것이었고 칼빈과 사이먼 사이에는 대체로 선후배와 친구의 우호적인 관계성을 계속 유지했다"고 강조했다.

한편, 특강에 앞서 진행된 경건회 및 기도회는 안명준 박사(평택대)의 사회로, 김병훈 박사(합신대)가 설교, 배경식 박사(한일장신대)가 기도했다. 이어 합심기도 시간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이남규 박사/합신대),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을 위하여(박상봉 박사/합신대),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의 임무완수를 위하여(김성욱 박사/웨신대)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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