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푸른교회 조성노 목사   ©푸른교회

장마철에는 자고로 지겹다고 느낄 만큼 비가 자주 와 줘야 제 맛입니다. 또 그래야 모내기로 땅바닥을 드러낸 저수지도 다시 채울 수 있고, 장마에 이어 찾아오는 폭염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장마철인데도 아직 비다운 비가 한 번도 안온 것 같고 연일 무더위만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마 전선이 활동하고 있지만 제대로 비는 오지 않는 경우를 흔히 마른장마라고 합니다. 중부지방의 올 여름 강우량이 평년의 1/10 수준이라고 하니 정말 심각한 마른장마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도 어느 무더운 여름날 우물로 물 길러 나온 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요 4:7)고 하셨습니다. 유대지방에서 바리새인들의 박해를 피해 그의 본거지인 갈릴리로 가시는 도중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하시다 목이 마르고 시장하신지라 먹을 것을 사오도록 제자들을 마을로 들여보내신 후 때마침 야곱의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어느 여인에게 그렇게 물을 구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원래 역사적 전기를 쓰려 하지 않고 주님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또 요한만큼 주님의 인간적인 면을 과감하게 드러낸 사람도 흔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 우물가에서 목말라 물을 구하시던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상에서도 <내가 목마르다!>(요 19:28)고 하십니다. 그 소중한 최후의 순간을 보도하며 왜 하필이면 <내가 목마르다!>는 절규를 전하고 있는 걸까요? 이것 역시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얘깁니다.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목말라 하시던 주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역시 목말라 고통하시던 육체를 가지신 인간이셨습니다. 마가복음서에도 주님의 인간적인 감정을 묘사한 소박한 기록들이 많이 나옵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비정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시고, 때로는 탄식하시고, 또 사람들의 불신앙을 이상하게 여기시기도 하고, 그를 잘 이해하고 따르는 자들은 사랑스럽게 생각하시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이 많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복음에는 그런 표현들이 없습니다. 그게 아무래도 주님의 초월성을 전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리스도의 초월성을 강조하며 처음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요 1:1, 14)이라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철저화한 요한이 또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디테일하게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인정에 약해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신 주님이야말로 정말 나약한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요한은 바로 그 육체를 가지신 너무나도 인간적인 주님에게서 오히려 그분의 초월성과 신성을 본 것입니다. 지독한 파라독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분이 또한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가 하면, <네게 물을 좀 달라 한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고도 하며 생수를 줄 수 있는 분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지금 내게 <물을 좀 달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나를 향해 내민 손을 외면하고 초월자를 만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게 요한복음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의식의 종교 혹은 관념적인 종교사상에 대한 무효선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내민 손을 외면하고 이 교회냐 저 교회냐 이 산이냐 저 산이냐를 따지는 것은 다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은 주님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 <내게 물을 좀 달라!>는 이웃들 속에서 꼭 주님을 만나십시오!

※ 푸른교회 '노나라의 별이 보내는 편지'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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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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