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진행한 '초기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에서 서울신대 목회신학연구원 원감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가 발제한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어니스트 길보른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박문수 박사는 "동양선교회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은 거리로 나가 노방전도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도방법에 부정적이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전도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박 박사는 "한국에서 복음전도관은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 빈이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과 함께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조국에 순복음(Full Gospel)을 전하기 위해 때만 기다렸다"며 "그래서 김상준과 정빈은 전도관을 열기 위하여 서울의 번화가인 종로 염곡에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세를 얻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내 걸고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매입을 위해 5천달라가 필요하므로 Electric Messages 를 통해 기도부탁을 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건물을 얻어주고 복음전도관을 시작할 정도로 지원하고 떠났다. 전도관이 정식으로 시작된 때가 5월 30일이었다"며 "복음전도관은 무교정 전도관이 세워지고, 김혁준에 의해 물화의 출입이 많고 사람의 왕래가 잦은 진남포 개항장에 새로운 진남포 전도관이 1908년 5월에 설립되었다. 그리고 강태온에 의해 1909년 6월 9일에는 경기도 개성에 개성전도관이 세워졌다. 그리고 아현교회가 건축되었다"고 전했다.

박문수 박사는 "카우만은 「하나님의 부흥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내 한 복판에 자리잡은 중앙전도관은 헐리고 한 쪽에 벽돌로 된 서점이 붙은 새로운 벽돌건물이 옛 건물을 대체하고 있다. 전도관은 48×60이 될 것이며, 한국식 마루로 되어 약 600명 가량이 앉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은 1912년 봄에 완성되었다"며 "동양선교회는 이 건물을 짓는 책임을 어니스트 길보른의 아들인 E. L. 길보른에게 맡겼다"며 "반면에 중앙복음전도관 건물은 성서학원 건물보다 진척이 빨랐다. 그러나 예정보다 늦어져 3월 31일에 봉헌식을 하였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러나 신생교회의 구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자활을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바로 이때 길보른은 일 본에서의 경험을 살려 더욱 내실있게 한국선교에 나섰다. 길보른은 1910년 11월 「전보」에 복음전도관 사역자들의 하루일과를 자세하고 소개하고 있다"고 박 박사는 말했다.

"그들은 매우 바쁜 조직이다. 매일 아침 기도회와 성경공부 후에 구도자와 신자를 방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전날 믿겠다고 약속한 구도자들을 주어진 주소를 가지고 찾아서 그들이 진정으로 거듭났다고 확신할 때까지 여러 차례 방문하여 복음을 전한다. 그 다음 모든 사역자들은 돌아와서 간단한 기도회를 가진 다음에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저녁 집회를 시작한다. [...] 처음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기 전에는 그들을 구도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길보른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 땅에도 성서학원이 세워지기를 기대했다"며 "하나님은 한국에 성서학원이 세워지는 것을 분명히 원하셨다. 그때 한국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물질이 보내졌다. 본국에서 2만 달러가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준비 되자 하나님께서는 성서학원을 책임질 사람을 서둘러 우리에게 파송하였다. 그들은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스타홀 성서학원의 존 토마스 목사 부부이다"는 '초기한국성결교회자료집'의 글을 인용해 소개했다.

그러면서 "동양선교회는 복음전도관과 성서학원을 동시에 지으려고 했다. 전도관 건물을 위한 대지와 비용은 일찍 마련되었지만 성서학원을 위한 비용이 준비되지 못해 시일이 늦어졌다"며 "결국 1911년 여름에서야 성서학원의 대지가 확정되어서 복음전도관과 성서학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박 박사는 성서학원의 전경을 소개한 글을 인용하며 "도심지에 있는 전도관과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훈련받고 있는 22명의 학생들은 6월 10일 월요일에 새로지은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 한국인과 선교사들이 모두 생각해 왔던 성결총회가 열릴 예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10일에 루디아 채플이라고 부르는 강당에 모두 모였다. 선교사 주택은 왼쪽 가장자리 꼭대기에 있어 다른 모든 건물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 바로 아래 왼쪽 가장자리 맨 아래 건물은 여자 기숙사로 1층의 긴 건물이다. 오른 편에는 바로 강당이 있고 강당 바로 오른쪽에는 식당 건물이다. 오른쪽 가장자리 맨 아래에 멀리 떨어진 건물은 남자 기숙사이다"고 했다.

이어 "존 토마스 목사가 1919년 3월 기미년 독립운동의 피해조사 차 강경교회에 시 찰갔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일경으로부터 구타당해 병을 얻게 되었고, 1920년 2월 일본 경호원이 호놀롤루까지 보호하는 가운데 귀국하였다. 그 사건 이후 이듬해에 영국인 윌리엄 헤슬롭이 한국감독을 맡았는데 그의 부인이 병을 얻어 곤란을 겪자 1년 뒤 귀국하게 되었다"며 "이후 길보른 목사가 1921년에 조선 감독의 임무를 겸직하여 내한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5년 동안 봉직하여 한국성결교회의 발전에 충성하게 된다"고 했다.

또한 "길보른 선교사는 1925년 10월 25일에 동양선교회 총재로 중국에까지 건너가 선교활동을 펼쳤다"며 "1907년 카우만과 길보른은 중국의 상해에 로벗 모리슨이 그 땅에 온 것을 기념하는 100주년 기념집회에 참석하러 갔다. 서로 각자의 방에서 하나님은 중국 땅에 동양선교회를 시작하라는 계시를 두 사람에게 주셨다"고 했다.

그는 "길보른은 '1907년 그 날에, 카우만 형제와 나는 상해 호텔에서 [하나님께] 그 땅을 요구했다. 아무런 일도 없이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 비전은 떠나지 않았고 결코 흐려지지 않았고, 반대로 선명해 졌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박문수 박사는 "동양선교회가 중국에 들어가기 1년 전에 찰스 카우만은 소천하였다. 동양선교회의 대표직은 길보른이 담당하였다. 어니스트 길보른은 거의 20년 전에 받았던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이루게 되었다. 큰 아치형의 다리가 중국으로 이어지는 비전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했다"고 했다.

동양선교회 회장인 어니 부부가 동양에 신앙 선교사(Faith Missionary)로 길보른에게 임했던 극적이고 독특한 부르심을 소개하는 글은 "당시에 길보른은 특이한 구체적이고 의미심장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환상 중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연결된 아치형의 큰 고속도로를 보았다. 그 다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닿았고, 또 다시 한국으로부터 세 번째로 중국에 닿았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그 고속도로는 직접 천국에 연결되어진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됐다.

그러면서 박문수 박사는 "중국은 1925년에 대격변의 상태에 있었고, 어니스트 길보른과 선교사들의 지도자는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려고 상해에 도착했다"며 그러나 그때 "선교사들은 수백명이 떠나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중국에서 기독교는 100년이나 후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했다.

덧붙여 "상해는 떠나는 선교사들로 득실거렸다. 호텔은 복도나 침실에서 숙박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거친 침대는 떠나는 승객들에게 제공되는 출발하는 화물선에 설치되고 있었다. 어떤 베테랑 선교사는 임시로 YMCA 샤워실에 짐을 푼 20명의 사역자들에게 말하기를 '이런 때에 동양선교회는 중국사역을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라고 했다"며 "공교롭게도 이 선교사는 중국에서의 사역을 위해 최초의 본부를 설치하려는 동양선교회에 집을 빌려준 사람이었다"고 했다.

박문수 박사는 "길보른과 그의 동료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불안감이 사람들을 영적 실체에 대한 갈급함을 주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별히 상해의 젊은 사람들 가운데 복음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 있었다"며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담대한 메리 스톤 박사와 제니 휴즈 양이 시작한 베델선교회(a Bethel Mission)의 무료시설을 제공 받아 널찍한 공간을 가진 훈련센터를 지을 수 있었고 하나님은 중국에서도 동양선교회를 번창하게 하셨다"고 했다.

이어 "1949년 죽의 장막이 덮칠 때까지, 세 성서학원을 통해 성령충만한 목사들과 전도사들을 배출하였다. 많은 졸업자들이 신앙을 위해 자기 피를 바쳤고, 생명이 위험한 다른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영 웅적으로 증거하였다"며 " E. L. 길보른 선교사의 두 아들 에드윈과 엘마 형제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중국이 공산당에게 점령당하자 1949년 한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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