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오 목사(미국 시온루터교회 한인 담당목사)

한국은 5월 8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반면, 미국은 어머니 날과 아버지 날을 구분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6월 셋째 주일을 아버지 날로 지킨다. 첫 아버지 날은 스포켄 (Spokane) 도드(Sonora Smart Dodd) 여사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어머니 날이 지켜 진지 2년 후인 1910년 5월, 교회에서 어머니 날 설교를 듣던 그녀는 홀로 6남매를 키우며 고생하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아버지의 생일인 6월 5일을 아버지 날로 제정할 것을 제안했다. 목사님은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이유로 19일을 아버지 날로 정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아버지 날에 대한 지지가 확산되었으나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로 연방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가 결국 62년 후인 1972년 닉슨 대통령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도드 여사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문득 종교개혁가 루터의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필자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사실 종교개혁과 개신교회를 생각할 때 늘 루터에만 관심을 갖다 보니, 실제로 루터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루터의 아버지에 대해 묘사할 때, 일부 루터 연구가들은 그가 사제가 되기로 결단하고 수도회로 들어간 루터의 결정을 반대하는 완강하고 고집 센 아버지로 묘사하기를 좋아한다. 과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권위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을까?

루터의 아버지는 한스 루터(Hans Luther)로 독일 무르군드 (Moogrund) 의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스는 당시 가난하고 하류 계층의 농부로 살기 보다, 새로운 독일 중산층 그룹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한스는 가족 농장을 물려받지 않고, 아이스레벤(Eisleben) 그리고 후에는 멘즈필드(Mansfeld)로 이주한다. 거기서 한스는 지역 구리 광산에서 일하게 되었고, 후에는 적어도 6개의 광산과 두 개의 주조 공장의 일부를 소유하며, 그 지역의 중요한 유지가 된다.

아버지 한스는 루터가 사회적으로 좀더 높은 지위를 갖기를 원했기에, 루터가 법대에 진학하기를 원했다. 당시 법률가가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돈과 명예와 사회적인 지위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법학을 공부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러나 1505년 7월 2일 고향집에서 에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스토테른 하임(Stottemheim) 근처 마을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우뢰를 만났다.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를 경험한 루터는 땅에 엎드려 "수도사가 되겠다"고 기도했다.

1505년 7월 17일, 루터는 에르푸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은자 수도원(the Monastery of the Observant Augustinian Hemits)에 들어가게 된다. 한스도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막상 아들이 학교를 떠나 수도회로 들어갔을 때 큰 실망을 했다. 당시 수도사는 대다수 일반 신도들에게 그다지 존경 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에 학업 성적이 뛰어난 루터가 명예와 부가 보장되는 법률가를 포기하고 사제가 된다는 사실을 한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루터가 사제로 부름 받고 첫 예배를 집례하는 날, 루터는 아버지 한스로부터 어떤 위로의 말을 들을까 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제가 신부가 되는 것을 왜 그렇게 말리셨습니까? 지금 저는 이 생활이 참 평안하고 경건합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 한스는 버럭 화를 내며 많은 귀빈들이 있는 앞에서 루터에게 호통을 쳤다. "너 배운 학자 놈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구도 안 읽어 보았냐? 네 부모가 이렇게 늙도록 고생하는 것이 누구 때문이냐?"

평소 아버지 한스는 아들 루터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루터가 문학 석사 학위를 받을 때 법전을 한 권 선물하면서 표지에 존칭어를 쓸 만큼 루터를 아꼈고, 루터 또한 부모님을 지극히 존경했다. 2년전 아들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며 화를 냈던 한스의 분노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정진오 목사 제공

이를 두고 많은 루터 연구가들이 루터의 아버지 한스를 완강하고 고집 센 아버지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아버지 한스의 겉모습만을 보고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지 못한 결과이다.

실제로 아버지 한스는 루터가 첫 예배를 집례할 때 20여필의 말을 끌고서 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아들의 첫 예배 집례를 보기 위해 왔으며, 예배 후 피로연을 위해 상당한 돈을 지불하였다.

완강한 아버지 한스 루터였지만 루터가 케이티(Katie)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들의 세 자녀 Hans, Elisabeth, and Magdalena 가 태어났을 때도 먼 길을 마다 않고 아내 마가렛트(Margarethe)와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

이런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졌는지, 루터는 1526년 6월 7일 낳은 첫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한스(Hans)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한스가 원했지만 아버지 루터가 이루지 못한 법률가로서의 꿈을 그의 아들 한스가 이루어 낸다.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어머니는 따듯하고 사랑과 헌신의 모습으로 기억되지만, 아버지는 엄하고 완고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특별히 한국의 유교 문화 속에서 어머니를 구박하고 자식들을 홀대하는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얕은 듯 하지만 아버지의 속정은 깊다. 때로는 가족에게 억지도 부리고 성질을 냈다가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 깊은 속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버지이다. 가족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겉으로 강한 척 하는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다. 마치 루터의 아버지 한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또 하나 지금도 루터처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회자가 되거나 기독교인이 된 분들이 많이 있다.

목회자나 교회가 사회적으로 존경 받기는커녕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금, 우리 주위에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의 길을 걷는 분들이 있다. 사회적인 높은 지위와 명예를 뒤로하고 영혼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 분들이 있다. 절실한 기독교 신자지만, 막상 자신의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것은 반대하는 가정도 있다.

하나님이 타락한 중세 교회를 개혁하고자 루터를 부르셨듯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도 다시금 하나님의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그들을 부르셨다고 믿는다. 때로 목회자의 길이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개혁을 향한 길에 좌절도 있고 실패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 붙들고 나아간다면, 교회는 다시금 깨끗해 질 수 있고, 잃어버렸던 명예와 존경도 회복되리라 믿는다.

오늘은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으로 한없이 약하고 정이 많은 우리의 아버지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보자.

필자인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jjeong@zionbelleville.org 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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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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