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중앙교회 임석순 목사
한복협 중앙위원, 한국중앙교회 임석순 목사.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회개시키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마4:17) 회개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세상을 왕과 주인삼아 세상만을 바라보며 놓지 못하던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자리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백성을 이렇게 돌아서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지 못하고 실패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입니다. 실패하신 적도 없고 실패하실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다 이루었다고"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70인을 세워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파송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70인을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는 사람들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패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돌아선 자가 된 우리를 통해 아직 돌아서지 못한 자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을 계속 하시고 싶은 주님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회개한 자로서 이 세상에 보내졌습니다.

즉 돌아선 자, 회개한자들은 자랑스러운 복음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런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이 땅에 보내졌으니 예수님처럼 죽는 것이 목표입니다. 물론 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부활생명의 증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약속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역시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약속만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에서의 삶의 여정을 이겨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선진들, 그리고 모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약속을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이미 약속을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인생을 소망할 뿐이었지만 우리는 예수님과 묶여져 이미 영원한 삶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이미 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이 어느 곳에나 도사리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사람들 중에도 뱀을 대하는 모습은 제각각입니다. 어떤 이는 뱀에게 대항하지도 못하고 물려서 죽습니다. 어떤 이는 뱀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뱀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어딜 가나 뱀이 있기 때문에 삶이 무척 힘듭니다. 어떤 이는 뱀을 집어 들고 밟고 다니는 용기와 담대함이 있습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음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막16:16-18) 이것이 바로 회개한 자, 하나님과 영원히 묶여 있는 자, 큰 복을 받은 사람들로 회개의 영이 충만한 자들입니다.

한국의 한 시대에 회개의영으로 충만했던 김치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의 삶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그들의 신앙의 유산을 확인하는 일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의 영웅을 만드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고 정작 지금 나를 향하여 인도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하고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떠넘기는 자기합리화의 작업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를 점검하며 영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직면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변화시키시고 세워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결국에는 그 생애가운데 성취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인내의 경주를 하게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유익을 줍니다(히 12:1-2). 즉, 하나님께서 한 믿음의 사람을 통해 한 시대를 어떻게 열어 가셨고 이끌어 가셨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하고 용기를 주며 말씀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기에 한국의 '예레미야'로 알려진 '김치선 목사님'의 발자취를 통해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신학적 사상이나 설교의 내용들에 대한 회고 보다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김치선 목사님를 통하여 회개의 영으로 충만하게 사역하신 그 이들을 소개하며 다시 한번 그 회개의 영이 부어 주시기를 소망해봅니다.

1.출생과 성장

● 고봉 김치선(高峯 金致善, 1899-1968) 목사는 1899년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서호진에서 부친 김영준씨와 모친 최연숙의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기잡이배 40여 척을 거느린 부호의 집안이었으나 1913년 폭풍으로 모든 배를 잃자 아버지인 김영준은 가족들을 이끌고 장진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화전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린 김치선의 영특함을 알고 있었던 김치선의 서당 선생 김응보 옹이 자신이 치선을 키우겠다고 하여 김치선만 서호리에 남게된다.

● 이 시기에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았던 잔류파 장로교회의 선교사로 개혁주의신학자였던 영재형(榮在馨, Lither Lisger Young, ?-1949) 선교사가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으로 함흥에 와 있다가 서호리를 방문하여 김치선과 만나게 되고 김응보 옹의 추천으로 김치선을 함흥 발룡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사환 일을 시키며 공부하게 했다

● 1919년 김치선 목사의 아버지 김영준 씨가 세상을 떠나자 영재형 선교사는 즉시 함흥 신상리에 집을 마련하고 김치선의 가족들을 그 곳으로 이주시킨 후 그들의 생활비를 대 주었다. 하지만 김치선은 영생중학교에 다니면서 3.1운동에 적극 가담함으로써 체포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하며 20살의 나이로 함흥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년간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

●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였다.

● 1년 후 김치선은 출옥하여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1922년 3월 13일 23세의 나이로 영생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치선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선교사의 일을 도왔다.

●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이하여 함흥의 집으로 돌아와 있던 중 불길 속에 갇힌 영재형 선교사를 목숨을 걸고 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영재형 선교사는 이 일 후에 김치선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더욱 특별히 사랑하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영재형 박사는 후일 회고를 통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 1925년 휴양 차 캐나다로 일시 귀국하였던 영재형 선교사는 캐나다 연합 교회 선교부 소속인 스코트(Scot) 선교사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먼저 자신의 양아들이 된 김치선의 결혼을 적극 추진하여 함경도 서호리 서당에서 김치선과 같이 공부하였으며 영생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함께 공부하였던 사이였고 당시 숭실전문학교 교수이며 모란 잉크와 금광 비누 공장의 사장이었던 이용구 씨의 딸 이홍순과 결혼시켰다.

2. 신학공부

● 결혼한 김치선은 1927년 3월 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1928년 일본에 있는 한인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의 부름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고베 현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現, 개혁파신학교)에 편입해서, 그곳에서 영재형 선교사를 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일본에 건너 온지 2년만인 1930년 2월 23일, 김치선은 31세의 나이로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재형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다.

●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김치선은 그 다음 해인 1931년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되고 1933년 Th. M.학위를 취득한 김치선은 다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 취득하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식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3. 일본에서의 목회 및 선교 활동

● 1935년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김치선 목사는 한국에서는 특히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하고 있던 것을 보며 자신도 이와 같은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양아버지 영재형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 영재형 선교사가 머물고 있었던 고베에서 자리를 잡은 김치선 목사는 고베중앙교회(神戶中央敎會)를 개척하고 본격적으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의 열정적인 설교로 인하여 교회가 나날이 부흥하였고 김치선 목사는 교인들에게 모두 주일마다 한복을 입고 교회에 나오게 함으로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다.

● 고베중앙교회에서의 목회를 통해 알려지게 된 김치선 목사는 1938년 봄 일본의 수도 동경에 있는 신숙중앙교회의 청빙을 받고 그곳으로 옮겨가서 목회를 하게 되고 소문이 퍼지자 동경에 있는 한국 사람들과 한국에서 유학 온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일본전역에서 한인 교회로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서도 민족에 대한 사랑과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질 것을 역설했다.

● 1938년 당시 한국에서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장로회신학교 등이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폐교를 당하는 등 한국인들에게 대한 일본인들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하고 있었는데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박형룡 박사는 이러한 박해를 피하여 중국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곳보다는 일본이 더욱 안전하다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피신하기로 하여 김치선 목사에게 거처를 부탁하는 편지를 하였다. 이러한 연락을 받은 김치선 목사는, 자신이 사는 집에서 몇 집 건너에 집을 마련하고 그곳으로 박형룡 박사의 가정을 안내했다. 이 때로부터 김치선 목사는 일본을 떠나기 전까지 박형룡 박사와 한 집안 식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 1940년경, 일본인들이 내선일체라 하여 교회에서 일본어로 설교할 것을 강요하였던 시기에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 목회와 선교 사업을 하며 특히 한국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던 김치선 목사는 일본인들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힐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상범으로 구속 연행되어 신숙 경찰서에 수감되고 수개월이 지난 후에 풀려났다. 이 일이 있은 이후 김치선 목사는 동경신숙중앙교회에서의 사역에 대한 커다란 회의와 실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국에 나와 있는 한 동포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형제 된 자들 간에 물고 뜯는 교회라는 점에서 그랬고, 또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 받아야만 하는 점에서 그랬다.

● 김치선 목사는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에게 교회를 양보하고 동경신숙중앙교회에 있으면서 개척하였던 메구로(目黑)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된다. 이때 박형룡 박사도 김치선 목사가 목회하는 메구로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언제나 눈물로 기도하며 눈물로 설교하였다.

● 1944년 일본 패망의 가까워 옴을 직감한 김치선 목사는 그의 양부였던 영재형 선교사가 이미 일본에 의해 강제 출국 당한 상황에서 귀국할 것을 결심하고 1944년 3월. 45세가 된 김치선 목사는 가족들을 이끌고 여수에 도착했고 그의 장인이 마련해 준 집이 있는 함경도 왕장으로 향했다.

4. 한국에서의 목회 및 교육 활동

김치선 목사
김치선 목사 ©대신세계선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1) 남대문 교회와 대한신학교

●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김치선 목사의 장남인 김세진이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어 슬픔 가운데 있던 김치선 목사는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 구내에 있던 남대문 교회로부터 정식 청빙을 받게 되어 1944년 남대문교회 제 6대 담임 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 김치선 목사는 이 교회에 부임한 뒤부터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1944년 일제강제점령 막바지의 위험한 상황에서 서울의 모든 교회들이 새벽기도회를 쉬고 있는 상황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었고 김치선 목사는 그 암담하고 어수선한 시기에 매일 새벽제단을 쌓으며 강단에서 엎드려 민족을 위하여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 이처럼 열심 있는 기도와 은혜로운 설교로 인하여 남대문 교회는 점점 그 교세가 확장되었고 마침내 남한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당시 남대문 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교회가 서울역 앞에 있었기 때문에 북에서 다니러 오는 나그네들이나 남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귀국하는 사람들이 늘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전국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었다.

●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이 광복과 더불어 김치선 목사는 이제껏 그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민족의 복음화의 열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그리고 이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였다.

● 바로 이 때부터 그가 전개한 운동이 3천만의 십일조 3백만을 하나님께 바치자는 운동이었다. 그는 매 설교 시마다 "한국에는 2만 8천의 자연부락이 있소. 동리마다 교회를 세웁시다. 우리 성도들이 집집마다 감나무 한 구루씩 심어서 그 수입을 몽땅 선교비에 투자한다면 민족복음화는 물론 세계를 복음으로 덮으리이다" 라고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때부터 그를 조국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

● 김치선 목사가 이처럼 전개한 삼백만 전도운동으로 인해 손양원 목사를 비롯한 70여명 이상의 목사가 참여하는 삼백만 부흥전도회가 결성되었으며, 전국 2만 8천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70여명의 목사가 선교목사로 전국에 파송되는 엄청난 역사가 시작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공산 게릴라들의 잦은 출몰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지역까지도 거침없이 가서 전도를 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대한신학교(現, 안양대학교)'가 '장로교 야간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남대문 교회당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김선두 목사, 윤필성 목사를 비롯한 몇몇 유지들과 함께 힘을 모아 시작하였는데 초대 교장에 평양 여자 신학교 교장을 지낸 윤필성 목사가 취임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9년 1월 서울 서소문구(현 중앙일보사 근처)에 건물을 얻어 신학교를 이전한 후 김치선 목사 자신이 친히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50년 1월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大韓神學校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김치선 목사가 이처럼 대한신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은 먼저, 그가 전개하고 있던 삼백만 부흥전도운동의 일환이었으며, 또한 그가 신학교를 세워서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을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목회자를 배출함으로써 그가 추진하고 있던 삼백만 전도사업을 조속히 완수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 민족 전체를 완전히 복음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 대한신학교의 특성

(1) 대한신학교가 처음부터 야간신학교로 출발하였다.

이는 북에서 내려 온 사람들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낮에 일하지 않고는 생계를 이을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치선 박사는 이들로 하여금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도록 하기 위하여 대한신학교를 야간 신학교로 운영하였다.

(2) 이 학교가 처음부터 지적인 추구보다는, 복음 전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그래서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과목들 역시 고차원적인 학문성을 추구하는 과목보다는 복음전도와 성도 양육을 위하여 필요한 과목들이었다. 고차원적인 신학 교육보다는 순수한 성경공부와 전도 운동을 위주로 교과가 편성되었는데, 거기에는 심지어 영농법과 침술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3) 이 학교가 초 교파적이었다.

학교 설립 초기부터 이 학교의 강사진이 장로교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감리교회의 변홍규 박사를 비롯한 다수의 타교단 출신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초교파적인 학교로 시작한 데에는 300만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학교였기에 3천만의 십일조 300만 구령운동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초교파적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되어 서로의 잘잘못을 가리기에 급급하였으나 김치선 박사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민족의 복음화에 있었기에 복음전도를 위하여 누구든지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초 교파적이었던 것이다.

2) 6.25 동란

1950년 5월 24일. 대한신학교가 드디어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은 남자만 18명이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 25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일생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입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교인들보다 먼저 몸을 피함으로써, 목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하면 예배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공산주의의 실체와 기독교 연맹의 역할을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하지 않고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다.

6·25동란 기간 동안 김치선 목사는 부산과 대구, 두 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고 1951년 9월, 대구에서 총회신학교가 개교하였을 때 교수로 추대를 받고 대구로 옮겨가 생활하게 된다. 피난 시절 대한신학교는 부산과 제주에 분교를 설립하고 계속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분교장으로는 윤필성, 이환수 목사가 각기 임명되었고 얼마 후 부산중앙교회의 노진현 목사가 부산분교의 분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52년 9월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게 되자 김치선 목사는 인가 된 대한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에 휴전협정이 이루어지자 1953년 9월에는 부산분교와 제주분교를 서울로 복귀시켰다.

3) 창동교회

● 1953년 말에 서울로 돌아 온 김치선 목사는 서울 남창동 10번지에 창동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하게 된다. 이는 김치선 목사가 전쟁 기간 동안 내내 장로회 총회 신학교 교수로 제직하면서 대구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남대문교회에서는 사실상 사임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치선 목사는 이곳에서 시무 하면서 대한신학교를 운영하였고, 또한 총회신학교에도 계속해서 출강하였다.

맺는 말

1.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린 고봉高峰 김치선(1899-1968) 민족을 사랑하며 구령의 열정의 눈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했던 목사, 신학자, 교육자였습니다.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이 한마디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줍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을 복음의 관점에서 사랑했던 '애국자',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기도의 사람'입니다.

2. 김치선 목사는 장로교회 제1세대 신학자로서 한국 교회와 신학 형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후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했습니다. 고베중앙교회, 신주쿠중앙교회, 도쿄 메구로교회, 남대문교회, 창동교회, 청파중앙교회 등에서 목회했으며, 1944년에 귀국하여 1948년에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를 설립했고, 1961년에는 대신교단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피난을 가면서도, 그는 목회를 쉬지 않았고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기도와 전도운동을 통해 한국 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해방 후 그는 전도운동 및 구령救靈운동을 통하여 한국 교회의 재건을 추진했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 복음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신학 박사였음에도 신학의 학문성보다 신학이 추구하는 목표가 복음전도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방향에 서서 가르쳤습니다. 이 복음의 열정은 자연스럽게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으로부터 한국 교회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 '한국의 예레미야' 김치선의 민족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1944년 남대문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한 기도와 회개, 그리고 전도운동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해방 후 혼란한 정국과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전도뿐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으로 300만 구령운동을 조직화하였는데 해방 당시 기독교 인구가 30만 정도에 불과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펼친 300만 구령운동은 이 땅의 복음화에 쏟은 그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300만 구령운동을 지속하면서 그는 신학도들에게 "2만 8,000여 우물을 파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오늘 여러분이나 내가 할 일은 이 우물 파는 사업이다"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겼습니다. 신학도들이 다른 것을 그만두고 일생 우물만 파는 자들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300만 구령운동, 2만 8,000 동네에 우물을 파라는 그의 열정은 이 땅과 민족을 위해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근본이 단순히 조국의 부강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닌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열망은 그에게 회개의 영으로 충만이 부어 주신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회개의 영이 우리에게도 부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의 영이 오늘 날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내가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알고 이 민족과 온 세상을 향하여 구령사역으로 이어가는 회개의 영이 이 땅에 다시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글=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제공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치선목사 #임석순목사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한복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