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익 목사
이정익 목사 ©신촌성결교회

사순절 기간이다. 이 기간에 이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한다. 성경을 보면 세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모세의 죽음 - 혈기 냈다고 죽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 땅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바치고 조금 숨겼다고 죽었다.

무화과 나무의 저주사건 - 열매맺을 계절도 아닌데 열매없다고 저주받아 말라 죽었다.

버드랜드 럿셀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에서 나는 이런 비인격적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날 참 대단하였다.

예수님 33년 인생 가운데 가장 화려했던 날이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고 군중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모두 호산나를 부르며 옷을 벗어 길에 깔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때 예수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그리고 제왕의 대관식처럼 나귀를 타시고 12명 제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화려하게 입성하신다.

그 모습에 당시 집권자들인 빌라도 제사장 서기관 헤롯왕 등 모두 긴장하였을 것이다.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다. 10절을 보면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다. 그 말은 예루살렘 성이 들끌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시대에 예수에게서 무엇인가 희망을 느꼈다. 가능성을 보았고 대안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두 옷을 깔고 환호하는 중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다. 가룟 유다가 이런 모습을 보고 판단이 흐려졌던 것이다.그리고 예수는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이 장터로 변한 것을 보았다. 장사꾼, 짐승떼, 비둘기떼, 동전 바꾸는 죄판 등을 본다. 그리고 분노하여 모두 뒤집어 엎고 내좆으며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리스도인은 고집이 있어야 한다. 이 고집이 정체성을 이루는 고집이다. 그리스도인 특히 신앙인에게는 이 고집이 없으면 무너진다. 고집도 내 이익을 위한 고집이 아니고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집이다. 당시 제사장들은 어쩌자고 성전뜰까지 장사꾼들에게 불하하여 시장터를 만들었는가. 얼마를 받아 먹었길래 이런 과감한 발상을 하였는가. 미국 브로클린 거리에 가 보면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안식일날이 되면 그 거리는 버스 정거장이 폐쇄된다. 88 서울 올림픽때 안식일날 이스라엘은 경기를 포기했다.

메달 딸 가능성이 있는 종목 조차도 과감히 포기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고집이 이어야 한다. 그랬는데 당시 제사장들은 어쩌자고 장사꾼들을 성전뜰까지 불러들였는가. 신앙인에게 고집이 없어지면 이렇게 세속화 된다. 또 신앙인에게는 고집 말고 순결의식도 있어야 한다. 신앙인이 영적인 순결을 잃으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오늘 이 시대의 순교는 피 흘리고 목 베이는 그런 순교시대가 아니다. 오늘 이 시대의 순교는 모두 이익을 따라 오른쪽으로 가는데 나는 왼쪽으로 가는 삶이다. 모두 평안을 추구하느라 적당히 편법을 즐길 때 그것을 보포기하는 삶이다. 모두 영적 생활을 포기하고 기도가 없을 때 나 홀로 그 길을 걸어가는 삶이 오늘의 순교의 삶이다. 그것이 그 시대의 순결의 삶이고 순결한 신앙이다. 또 우리 신앙인에게는 역사의식도 있어야 한다. 당시 제사장들은 순결도 고집도 역사의식도 전무했다. 오직 오늘 현재만 있었다. 역사의식이 망각되니까 뇌물에 눈이 어두워져 뇌물에 모든 것을 걸었다. 눈이 어두워지고 역사의식이 없기로서니 어쩌자고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성전뜰까지 불하를 해 주는가.

그러니 그 시대가 얼마나 타락하였단 말인가. 세례요한이 그런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세례요한은 현직 제사장의 아들이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시대의 기득권자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 기득권을 다 포기하고 광야로 나갔다. 광야에서 메뚜기를 씹으며 속에서 분노가 발생하면 요단강 물을 떠 마셔사며 회개하라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외쳤다.

그 요한의 분노의 심정이 오늘 성전에 들어가 다 뒤집어 엎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로 만들리지 말라고 외치시는 예수의 분노이다.

그리고 나오다가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고 그 나무를 저주하여 말라 죽게 하셨던 것이다.

그 꼴을 보시고 차마 제사장들의 정수리에 벼락을 내리치지 못하고 나가다 무화가 나무에 저주를 퍼 부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아 말라 죽었던 것이다.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그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아 말라 죽었다는 것은 얼마 있으면 이 도성 예루살렘 성이 이렇게 벼락을 맞으리라 그리고 심판을 받으리라는 경고이다.

그랬으면 당시 제사장들, 서기관들, 빌라도, 헤롯왕 등은 모두 정신이 번쩍 깨어 회개했어야 하고 뉘우쳤어야 한다. 마음에 겁이 나서 두려워야 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두려워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성전에서 다 뒤집어 엎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여 말라 죽게 하여 기분 나쁘다고 그 시간부터 군중을 움직여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며 마침내 예수에게 온갖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를 처형할 때 로마 총독 빌라도는 나는 아무리 찾아도 그에게서 죽을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나는 책임이 없으니 너희들이 이 죄값을 받으라고 했다.

그때 유대인들은 그 죄값을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고래 고래 소리쳤다. 그들은 마침내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도 모르면서 말을 무책임하게 내뱉았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끌고 다니며 별짓을 다했다. 옷을 벗기고 채찍을 휘두르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마침내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과 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탄식의 눈물을 흘리셨다.(마 23:37) 그 말은 곧 이 도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제로 그 성은 예수 사후 40년만인 기원 70년에 예언 그대로 예살렘 성전은 산산이 무너지고 그 후손들은 그때부터 2천년동안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톡톡히 그 죄값을 치루어야 했다.

각 나라들을 떠돌며 노예처럼 살았고 억압과 박해를 받으며 살았다 히틀러 시대에는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무작위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였다. 아이들을 포함해서 남녀노소 물론하고 구덩이에 매몰되거나 깨스실에서 소리없이 죽임 당하거나 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기름을 짜서 전선에 보내져 추운날 땔감 기름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했는가. 무슨 죄가 있어서인가.

"그 죄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 그들은 그러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그 죄값이다. 그 죄값으로 오늘까지 그들은 자그만치 예수 사후 2천년간이나 1958년 그들이 독립할 때까지 세상을 유랑하면서 가는 곳마다 오늘 난민처럼 천대받고 학대받고 죽임당하면서 지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는 어떤가. 오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나 신앙 지도자들에게 이 순결의식, 신앙적 고집, 그리고 역사의식은 있는가. 그리고 종말의식이 있는가. 과연 미래를 내다보고 우려하며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이 땅에 있단 말인가. 오늘 기독교, 대형교회, 연합기관, 기독교지도자들이 돈에 왜곡되고 돈에 좌우되는 일들은 무엇인가. 오늘 사순절에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오늘 우리는 어떤 부분을 보아야 하고 또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오늘도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아 말라 죽는 사건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각없이 바라만 보고 있다. 지금은 2천년전 예루살렘 도성과 같은 모습이다.

/글=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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