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석
▲이만석 선교사ㅣ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1. 무슬림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 무슬림들이 국내에 많이 들어오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무슬림들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이슬람은 무섭다는 것과 최소한 무섭지는 않을지라도 싫다는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는 누가 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악의가 있어서 고의로 사람들에게 주입시킨 사상이 아니라 최근에 동시다발적으로 전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테러 덕분에 자연히 생성된 보편적인 시각이다. 물론 한국의 이슬람 중앙회라든지 친 이슬람 성향의 교수들을 통해서 이슬람 미화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진위를 분별할 입장도 아니고 그럴만한 능력도 안 되는 대중들은 매우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중 최근 대통령의 중동 지역 4개국 방문 시 아랍에미레이트와 관광 MOU를 작성하고 와서 무슬림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무슬림들이 한국을 방문한다면 무엇이 가장 불편할까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크게 두 가지가 가장 불편할 것 같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첫째는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서 기도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무슬림들을 위한 기도처가 부족하다는 것과 둘째는 무슬림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고 할랄 음식을 먹는데 한국에는 할랄 음식을 파는 식당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정부는 무슬림 관광객 유치를 위한 임프라 구축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입장이다. 이제 한국에는 무슬림들의 기도처가 늘어나고 할랄 음식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주는 덕분에 무슬림 관광객들이 급속히 늘어날 형편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에 와서 관광만 하고 돌아가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상이다. 왜냐하면 이슬람권에서는 평생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무슬림들이 많이 있다. 오히려 기독교의 성경은 변질되었으며 기독교는 이슬람을 대적하는 악한 종교라는 선입관을 가지도록 어려서부터 세뇌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잠시 한국에 머무는 동안 혹은 한국에서 취업을 하거나 학업을 영위하는 동안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대로 귀국하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 몇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 두려움

무슬림들을 전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무슬림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성경은 분명히 두려워하지 말라고 수없이 말씀하고 계신데 무슬림들만 보면 두려운 마음부터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매스컴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유입되는 잔인한 무슬림들의 테러 덕분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두려움은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 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무슬림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도 보혈을 흘려주셨다. 하나님은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 믿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구원받아 천국에서 영생을 얻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봉변을 당하든가 테러를 당한다면 이는 오히려 크게 기뻐할 일이다. 왜냐하면 야고보서 1장2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0-12) 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에서는 아직 무슬림 인구가 1%가 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직 자생테러단체가 생기지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성향의 무슬림들이 있더라도 아직은 테러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진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며 무슬림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신 그분께서 친히 지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항상 평소에 천국 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된다.

2)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 부족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슬림들이 폭력적이고 과격하고 잔인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무지하며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우리가 전도해야할 대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이며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정작 무슬림들이 도전적인 질문을 해 올 때 확신 있게 대답하고 변증할 준비가 되었느냐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왜 무슬림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느냐에 대한 명분이 확실치 않다면 심히 곤란하다. 물론 그들에게도 무슬림들에게 무관심한데 대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권 외의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환영받으면서 대접 받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이슬람권은 모든 것에 너무 열악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또한 복음 전도에 대한 결실도 희귀하고 설령 무슬림을 전도했다고 해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도의 열매에 대한 홍보조치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같은 노력과 투자를 이슬람권 외에 타문화권에서 한다면 훨씬 더 빠른 시간에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당위성도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을 특별히 전도해야 할 이유는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복음 전도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이 보통이며, 그들을 전도하지 않으면 우리 가정과 자녀들 및 한국 교회를 지킬 수 없으며 대한민국의 안보도 지킬 수 없다. 그리고 무슬림들을 전도하지 않으면 유럽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리 후손들에게 평화롭게 예수 믿을 수 있는 미래를 물려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열심히 무슬림들에게 전도해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도 살고 무슬림들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3) 이슬람에 대한 무지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주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슬람에 대한 무지 때문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슬람을 살인과 테러의 종교라고 하고 있고 혹자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맞는 말일까?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없으면 그들에 대한 바른 처방이 나올 수 없다. 이슬람 학자들은 ‘타끼야’라는 편리한 교리가 있어서 알라를 위해서, 이슬람을 위해서, 무함마드를 위해서, 꾸란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슬림 학자들은 거짓으로 미화된 책을 쓰고 심지어는 꾸란 번역도 심히 왜곡시켜서 고의로 미화 번역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학자의 입을 통해서 혹은 무슬림들의 저서를 통해서 이슬람을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경전과 이슬람의 하디스(Hadith)를 통해서 어떤 학자의 사견이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이슬람의 일차 자료를 통하여 이슬람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의 현상들을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바른 견해를 가질 수가 있고 바른 대책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흔히 이슬람을 창조주 유일신, 절대자, 전능자를 좀 특수한 방법으로 섬기고 있는 형제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섬기는 알라(Allah)는 무함마드가 소속되어 있던 꾸라이시 족의 종족신이었으며, 라트, 우짜, 마나트, 라는 세 딸을 두었던 신이었다.(꾸란53-19-23) 무슬림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의 예수가 아니며 꾸란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무함마드가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꾸란이 어떻게 만들어진 책인가를 정확하게 알면 그들의 거짓이 보인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의 정체에 대해서 미화된 자료가 아닌 그들의 일차 자료를 통해서 정확히 알아야 그들을 전도할 수 있다. 그들이 비록 기독교인들에게 잔인할지라도 이는 악한 영에 속고 있는 피해자들인 무슬림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2. 무슬림들에 대한 기독교 변증 자료

무슬림들은 기독교에 대하여 많은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받고 있는 교육은 일방적이고 근거 없는 주장일 경우가 많다. 그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반박하지 않으면 착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리를 수호해야하는 성도의 본분에는 크게 벗어나는 것이다. 나 한 사람이 양보하거나 침묵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곤란한 입장에 처하지는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리가 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은 진리를 거짓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억지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빚게 된다. 최근에 대한민국 땅에 무슬림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선 잘 보이지 않는다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무슬림들의 숫자가 늘어난 유럽에 무슬림들 때문에 사회적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무슬림들의 의혹과 잘못된 고정관념을 풀어주고 마음을 여는데 핵심적인 몇 가지 주제를 논하고자 한다.

무슬림들을 대하는 태도

기독교인들이 무슬림들을 대할 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행동기준은 항상 성경적이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들을 선대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명령이며 너희를 핍박하고 욕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삼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 때문에 매우 경계하며 때로는 적대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변의 낯선 사람들을 볼 때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의 원수가 아니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요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다만 그 형제자매들이 거짓 영에게 속아서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든지 그 영혼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 받아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 문이 열려야 하는데 우리 주변에 와 있는 무슬림들의 마음 문을 여는 열쇄는 사랑과 간절한 기도이다. 이 열쇄를 준비해 놓으면 주님께서 적당할 때에 열어 주실 것이며 그 때까지는 절대로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열렸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라도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조용한 곳에서 일대 일로 대화하는 것이 좋고 이슬람의 나쁜 점을 부각시키기 보다는 우리가 가진 복음의 위대성을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이 좋다.

무슬림들의 질문에 대한 변증

질문 1: 성경은 변질된 책이라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어요.

무슬림들은 성경이 변질된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꾸란은 하늘에 원본이 있는 변하지 않은 경전으로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무함마드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무슬림들이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런 주장은 모든 무슬림들의 뇌리에 성경과 기독교에 대한 불신감을 심어 주었다. 모처럼 말로만 듣던 무슬림을 만나서 진지하게 복음을 나누고자 하는데 듣고 있던 무슬림이 갑자기 “성경은 변질된 책(꾸란5:13)이라고 배웠는데요. 꾸란(Quran)만이 알라(Allah)께서 인정하시는 경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이 주제에 관련된 무슬림들의 질문과 제시된 아래 답변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질문1-1: 꾸란 구절을 인용하면서 성경이 변질된 책이라는 무슬림들의 주장에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그러나 그들이 그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들을 저주하고 그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의 내용을 바꾸어 가르침을 받은 바의 일부를 잊었다. 당신만 해도 소수의 예외는 있겠지만 그들의 배반을 받게 될 것이다...(꾸란5:13)

미리 답변을 준비해 놓고 있지 않으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는 아래와 같이 답변하는 것이 좋다.

답변 1-1: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이 변질되었다고요? 형제(자매)님은 꾸란을 믿으시나요? 꾸란에 보면 알라의 말씀은 알라께서 지키신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알라께서 실로 그 메시지를 계시했으니 알라께서 그것을 보호하리라.(꾸란15:9)

“신구약 성경도 알라께서 계시해 주신 것이라면 인간들이 그것을 변질 시킬 때 알라께서는 왜 그것을 보호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이 변질되었다면 위의 꾸란 구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질문 1-2: 알라께서는 꾸란만 계시하셨지 신구약 성경은 계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을까?

답변 1-2: 그럴 경우에는 이렇게 대답해 줄 수 있다. “형제(자매)님! 제가 꾸란을 읽어 보았는데 꾸란에 신약과 구약은 알라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어요.”

알라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내리셨고 앞서 온 것을 진리로 확증하면서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노라(꾸란3:3)

질문 1-3: 꾸란은 믿을 수 있지만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떻게 대답할까?

답변 1-3: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꾸란은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알고 있어요.”라고 하며 아래 꾸란 구절을 제시한다.

이것 이전에 무싸(모세)의 성경이 안내서로써 그리고 은혜로 있었으며 어랍어로 된 경전인 꾸란이 그것을 확증하며 죄인들에게 경고하고 의로운 자들에게는 기쁨의 복음을 전하고 있노라(꾸란46:12 최영길 역)

알라께서는 구약과 신약을 내리셨고 앞서 온 것을 진리로 확증하면서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노라(꾸란3:3 최영길 역)

알라께서 꾸란의 구절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을 진리로 확증하셨다고 했다. 알라께서 진리로 확증한 신약과 꾸란을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하는 사람은 꾸란을 불신하는 무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질문 1-4: 성경은 구약 시대 혹은 신약 시대에 필요했던 말씀이라서 이미 효용이 지났고 꾸란은 현대인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말하는 것이 좋을까?

답변 1-4: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께서는 꾸란의 내용에 의심이 간다면 성경을 읽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라고 하면서 아래 구절을 인용한다.

알라께서 그대에게 계시한 것에 그대가 의심한다면 그대 이전에 성경을 읽은 사람들(유대교 및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보라. 실로 알라로부터 그대에게 진리가 이르렀나니 의심하지 말라(꾸란10:94)

즉 신구약 성경은 무함마드 당시에도 유효했다는 증거다.

또한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성경과 꾸란은 똑같은 가치가 있는 책이지만 꾸란은 아랍 사람들에게 성경과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것(꾸란)은 주님이 내린 축복받은 (아랍어)성전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따라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은 자비를 받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성전은 우리들 보다 이전에 단지 두 종파(유대교와 기독교)에 내리신 것이고 우리들은 그들의 것을 배우는데 무관심하였다.”라고 말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꾸란6:154-156)

위의 꾸란 구절은 훗날에 아랍인들이 “성경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만 주신 것이라 우리는 무관심했었다”고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랍인들에게도 성경과 똑같은 내용으로 꾸란을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질문 1-5: 그래도 꾸란에 성경은 변질된 책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꾸란5:13)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답변 1-5: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변질되었다면 “언제 변질되었느냐?”고 반문하면 간단하다. 그들은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기를 주고 선택하게 하라. ⒈무함마드 이전에 변질되었다, ⒉무함마드 이후에 변질되었다, ⒊무함마드와 동시대에 변질되었다. 이들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무함마드 이전에 변질되었다고 하면 무함마드가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진리(꾸란3:3)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변질된 것을 진리라고 했다는 모순이 생긴다. 무함마드 이후에 변질되었다고 한다면 꾸란에 성경이 변질되었다(꾸란5:13)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이것도 모순이다. 그렇다면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성경이 변질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누가 7세기 때 전 세계에 흩어져있던 수만 개의 성경 사본들을 찾아다니며 고쳤을까?

오히려 성경은 변질되지 않은 책이라는 것이 1946년에 발견된 쿰란 사본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그래서 주전2세기부터 주후1세기 까지 기록되었던 성경의 최고 고대 사본들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원문 그대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꾸란의 고대 사본들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꾸란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은 이스탄불의 톱카프 박물관에 보관된 사본과 우즈벡의 사마르칸트 사원에 보관된 사본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보다 더 오래된 꾸란 사본이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1972년 발견되었는데 독일의 고대 아랍어와 꾸란 전문가 푸인 박사에게 연구를 허락했으나 연구의 중간보고 결과가 꾸란의 권위에 크게 손상을 주자 예멘 정부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꾸란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는 말씀이라면 왜 계속 연구해서 자신들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세계인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하기를 꺼리는 것일까?

질문 2: 왜 예수님을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난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문제다. 땅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과 하늘에서 응답하시던 하나님이 어찌 한 분일 수가 있느냐는 질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도 납득이 가도록 설명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일단 무조건 믿고 보면 나중에 이해가 갈 것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 벽을 넘지 못하면 무슬림들이 절대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무슬림들의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의 위상은 꾸란에 의해서 비하된 무함마드가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미리 왔던 수많은 선지자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하다.(꾸란61:6) 그러므로 이 주제에 대하여 대답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질문2-1: 무슬림들이 “선지자 예수를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큰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도 딸도 없고 오직 한 분뿐이며 예수는 그분이 보내신 선지자일 뿐인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요?”라고 질문할 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답변2:1: 무슬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을 때 신성모독이라는 말은 꾸란에 기록된 대로 아들이라는 개념을 육체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성모 마리아와 결혼해서 예수를 낳았다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육체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만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강하고 아들은 약하고 아버지는 크고 아들은 작은 이런 부자 관계를 연상하기 쉽다.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만 이해하는 무슬림들에게는 이렇게 이해시키는 것이 좋다. 즉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는 아버지와 속성과 능력과 영광이 동일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사도 요한에게 성격이 급하다고 보아너게(막3:17) 즉 ‘우레의 아들(Son of Thunder)’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다. 또 구브로에서 난 레위인 요셉을 사도들이 바나바 즉 ‘권위자 즉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행4:36)이라고 불렀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은 ‘우레’나 ‘위로’가 누구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아니다. 이는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속성이 우레처럼 급하고 과격하다 혹은 옆에만 있어도 위로가 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 개념 역시 이와 같다. 하나님이 누구와 결혼해서 예수를 낳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품과 인격과 속성이 동일하다는 말이다.

질문2-2: "예수님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적이 없는데 기독교인들은 왜 선지자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나요?"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 상기 글은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4him.or.kr)에 게재된 글을 가져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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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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