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범 목사   ©스포켄한인장로교회

[기독일보] 마음을 다하여 깊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말이 많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가벼운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너무 슬픈 사람은 울지도 못합니다. 말도 사라집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여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은 교회에서 말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충분하게 의사표현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소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호언도 하지 않고, 장담도 하지 않습니다. 충성스런 제자는 주님의 생각을 읽습니다. 겸손한 제자는 주님의 의지를 자신의 마음으로 퍼서 옮깁니다. 자신의 믿음이 꽉 차오르면, 주님처럼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법정에서 침묵하셨습니다. 분명 억울한 고발 고소 사건입니다. 불법 재판입니다.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항변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억울하게 십자가 죄수로 죽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 없는 분이 아니라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분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힘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현실을 헤쳐나갈 지식과 지혜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죽일만한 죄를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할 뿐, 변명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억울함도 참지 못합니다. 줄서기를 하고 있다가 누가 내 앞에 새치기를 하면, 견디기 힘들지요. 꽉 막히는 출퇴근 시간에, 얌체 운전자를 보면, 응징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듭니다. 추진하던 어떤 업무의 결과가 좋지 못할 때, 발뺌을 하기는 쉬워도 책임을 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할 때, 따지지 않고 조용히 추진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바칠 제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의 나이 27세. 아버지의 나이는 127세. 만약 아들이 도망을 치고자 했다면, 청년이 노인 하나 밀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왜 나를 죽이느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동안 나에게 보여주었던 행동들이 사랑이 아니었느냐고, 모두 거짓이었느냐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아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지켜보신다는 믿음으로 침묵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미워한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았고, 불합리한 재판장 빌라도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요10:18)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땅에 떨어져 죽는 씨앗은 소리가 없습니다. 침묵은 사랑이 깊을 때만 가능합니다. 순종은 믿음이 분명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현대인들이 말이 많은 이유가 혹시 사랑이 깊지 못하고, 믿음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똑똑하다는 이유로 손해 이익을 잘 따지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했던 그 아들을 부활시킴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도 말을 아끼고, 침묵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ㅣ이기범 목사(스포켄한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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