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 박사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오강남 박사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유대교의 장막절을 기독교는 종려주일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봄철에 예수의 수난과 함께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가을철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절기라 합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날 예루살렘 백성들이 종려나무, 버들가지, 또 다른 잎을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쳤는데 이는 "우리를 구원 하소서"란 말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종려주일의 큰 뜻이 여러분들에게 은총으로 임하기 기원합니다.

이 의미 있는 날에 드리는 제 말을/은 목사도 신학자도 아닌 종교학자, 비교종교학자로서 하는 이야기, 그래서 혹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해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며칠 전 고 「함석헌」 선생님 탄생 117주년 기념식에 참석을 했었는데, 마침 제 앞자리에 가톨릭 수녀님이 앉게 되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요즘은 수녀가 되겠다고 지망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수녀만 그런 것 아니라, 신부 지망생도 그렇고, 불교의 사정도 비슷해서 스님이 되려는 지망생도 최근에는 확 줄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불교는 많은 사람이 지원할 수 있도록 들어올 수 있는 연령을 점점 높여서, 40대에서 요즘은 60대도 받는다는 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지금은 그야말로 탈종교화시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럽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도 각 종교마다 교인이나 신도수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말을 쓰는데, 왜 지금에 와서는 한 때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인류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공헌한다고 여겨지던 종교가 제 역할을 못하는가? 심지어는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요즘 "나는 종교를 갖지 않았다. 종교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는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재래적 종교는 나와 관계없고, 인간 삶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 있다"라고 말합니다. "I'm not religiosus, I'm spiritual." 라는 말을 씁니다. 그 미국에서 아주 보수적인 목사가 쓴 책의 제목이 "라스트 크리스천 제너레이션" 즉 지금이 기독교로서는 마지막 세대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지역마다 좀 다르기는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60~90%까지가 동시에 교회도 졸업한다고 합니다.

성공회 신부인 존 셀비 스퐁(John Shelby Spong)이란 분은 미국에서 제일 큰 동창회는 교회 졸업동창회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가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 새로운 기독교로 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다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 가장 열심히 이야기 하는 분 중에 한 분이 앞서 말한 스퐁 신부입니다. 그 분이 쓴 책 중에 우리글로도 번역된 책이 있는데,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1)" 미국의 마커스 보그(Marcus Borg)라는 인기 신학자의 책 "The Heart of Christianity(기독교의 심장, 김준우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9)" 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그는 지금까지의 인습적인 (conventional) 크리스천과 새롭게 등장하는 newly emerging 크리스천의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말 합니다. 인습적인 재래기독교는 우주가 3층으로 구성된 우주 즉,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시고, 땅 밑에 지옥 있는 그런 식의 우주관이지만, 새로운 기독교는 새 우주관에 기초합니다.

이 분의 주장은 인습적 기독교인은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하는) '헤븐·헬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변혁'입니다. 변화라는 말만 갖고는 부족합니다. 속사람이 (바뀌어서) 새사람으로 되는 변혁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앞으로 등장하는 기독교라 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재래적 사고의 기독교로는 안 된다는 보그의 이야기처럼,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라마」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저서 "종교를 넘어서(김영사, 2013)"를 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모두 "착한 일을 하면 천당이나 극락에 가고, 잘못하면 지옥에 간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인과응보적인, 위협과 회유의 종교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다. 그것으로는 종교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갖고 있는 보통 종교 갖고는 안 된다. 종교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는데, 넘어섰다는 말을 secular라고 했습니다, 보통 세속적이라 번역합니다만 secular의 의미는 "종교와 관계없는"이란 말로 풀이되어야 합니다.

천당, 지옥에 관계없이 내 속을 스스로 들여다보면서, 선한 일을 하면 행복해지고, 내가 선하지 못한 일을 하면 불행해진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런 인식 속에서 윤리적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번역자는 그것을 '현세적 윤리'라고 했는데 정확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주목하는 것은 인과응보와 관계없이 스스로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 2부에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오랫동안 스스로 티베트 불교를 공부하면서 터득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불교의 스님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년전 남양주시에 있는 한 절에서 만난 고승(高僧)이 "기독교든 불교든 종교로서의 기독교나 불교는 끝장입니다." 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밭가는 분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빌어 가지고 되는 것이 있는지. 빌어 가지고 뭘 하겠다는 식의 기복종교로는 세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누구라도 안다. 그런 종교는 끝이다."는 주장입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지홍 스님도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 불교 또한 급속도로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중이며, 농어촌 사찰들은 텅 비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불교가 잘되는 것 같지만 불교도 이것이 현실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불교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대다수 청소년 청년들은 불교를 고리타분한 종교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살릴까하는데....." 고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21세기에 인습적 재래적인 종교가 밀려나는 탈종교화 되는 시점에, 어떻게 하면 종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저는 단도직입적으로 종교들이 심화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로 깊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의 분류를 기독교, 불교, 유교, 힌두교 등으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좀 단순화해서 위에 있는 것을 표층종교, 아래 깔린 것을 심층종교로 구분지어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에도 표층기독교와 심층기독교가 있고, 불교에도 표층불교와 심층불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심층종교 끼리는 서로가 통하고, 표층종교 끼리는 또 서로 비슷한 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가 한 이야기입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한 호텔에서 일본 선불교 사람들과 많은 공감 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올라와 TV를 켜니 미국에서 온 전도자가 막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TV에 나오는 전도자와 자신은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앞서 만난 선불교 사람들보다도 더 먼 거리감을 느꼈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같은 기독교인끼리도 표층교인과 심층교인 사이의 차이가, 심층 기독교와 심층불교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러면 심층 종교와 표층종교가 어떻게 다를까요. 각각 몇 가지 특징을 열거해봅니다.

첫째 표층종교는 지금의 내가 잘 되려하는 종교. 내가 건강해지고, 부자 되고, 성공하고, 이기적인 내가 잘되려고 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이에 비해 심층종교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내 속의 참 '나'가 누구인가, 내 속의 '참된 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유영모」 선생은 모든 종교의 특징은 지금의 나 '제나'에서 '얼나’로 옮겨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 '제나'에서 '얼나'로 옮겨가는 그런 가르침이라면 누구나 좋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은 예수도 좋고, 노자도 좋고, 공자도 좋고, 부처님도 좋다고 합니다. 물론 유영모 선생은 잘 아시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제일 먼저 만난 스승이 예수이기에 자신의 생의 중요한 스승으로 모신다고 말씀합니다.

어느 종교나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십자가 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의 자아를 못 박아 없애고, 새 자아 갖고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아' 사상입니다. 나라는 것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허구이니 진짜 네 속에 있는 것을 찾으라는 것이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평무사' 혹은 ‘지공무사’의 '사(私)'라는 것이 이기적인 나를 없애고, 내 속 하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를 부인하고. 참 '나(대아)'를 찾자는 것이 심층종교의 기본입니다.

서양인들이 대체로 불교를 좋아한다는 것도 현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가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때문에 서양 불교인들은 아시아 불교인과는 다름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화이트 부디스트(White Buddhist)' '엘리트 부디스트(elite Buddhist) ' '메디테이티브 부디스트(meditative Buddhist)' 라고 합니다.

불교의 방생이라든지 이런 것은 관심 없이 명상 통해 자신을 찾으려는 것. 이런 면에서 기독교나 불교에 있어 중요한 것이 나를 찾는 것인데 그런 것이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표층종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이해와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잘 알고 계시듯이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불(佛)이란 말이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깨달음을 위한 종교라 볼 수 있습니다. 성불하란 말은 깨달음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부처란 말이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기독교는 어떤가요? 기독교 역시 깨달음이 강조되는 종교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계속해서 가르치신 것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이 말의 주절은 '회개하라'입니다. '회개 하라'의 헬라어 원문 '메타노이테'는 동사입니다. 명사는 '메타노이아'입니다. 여기에서 '메타'란 뭐가 변화되는 것, 탈바꿈을 의미합니다. ‘노이아’는 의식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점은 그냥 '잘못했습니다.' '안 그럴게요.'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일상의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1945년에 발견된 도마복음의 주제도 계속해서 '깨달으라'는 겁니다. 도마복음서 1절부터 114절까지 믿음이란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단한 번 믿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한 것입니다.

이 '그노시스(gnosis)'를 보통은 영지라고 번역하는데, 저는 도마복음 해설서를 쓰면서 그노시스를 모두 '깨달음'으로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프라즈나(prajna)'는 '그노시스(gnosis)'하고 같은 계열의 말입니다. 불교의 프라즈나(prajna)인 반야(般若)라고 하는 깨달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소위 깨달음 강조파는 믿음 강조파에 밀렸습니다. 기독교에서 요즘에는 깨달음이란 것이 강조되지 않지만 처음엔 강조됐습니다. 소위 영지복음서(요즘은 영지주의와 혼동을 우려해 영지복음서란 말을 사용하지 않음), 깨달음을 강조하는 한 복음서는 '믿음 소망 사랑 깨달음 그 중 제일은 깨달음이다'라는 식으로 깨달음을 강조합니다.

깨달음은 어느 순간 확 터지는 것 아니라, 살아가면서 더 높은 수준으로 조금씩 깨쳐나가는 것입니다. 최근뉴스에서 '토지공개념'을 주장하니 '사회주의자'라는 지적도 있는데, 그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아가는 것, 이런 사회적 심리적 영적 무지에서 점점 깨우쳐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심층 쪽에서는 계속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교란? 부모님 앞에서는 반드시 꿇어앉아야 한다는 것, 그런 것이 유교가 아닙니다. 유교의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학 나오는 '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이런 것인데, 격물치지는 끝까지 공부하란 뜻입니다. 즉 格物해서 그 앎이 극에 달하도록 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후 유교는 성학(聖學)이 됩니다. 여기에 거룩할 성(聖)자에 붙은 귀(耳)는 보통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새로운 자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성인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귀, 깨달을 수 있는 귀,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이 성인(聖人)입니다.

저는 그래서 성인이란 특수인식능력을 활성화 시킨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성경말씀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고 하십니다. 우리의 이성(理性)을 활용해 끝까지 가보자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성을 주셨으면, 그것을 버리고 무조건 믿으란 것이 아니라 이성을 활용해서 이성의 한계까지 도달해서 그 너머까지 보자 그런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성(理性)을 주신 뜻이 뭔가요. 이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이성을 줬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 너머까지 가는 것이 종교이지, 이성을 반대하는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을 보고 우리는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자칫 그 믿음은 맹신, 광신, 미신으로 이렇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심층종교는 이런 것을 넘어서서 깨달음이라는 참된 신앙으로 들어가는 특징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표층과 심층의 차이는? 이는 기독교에서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나와 신이 따로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층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그랬는데, 저 위의 하나님, 나와 하나님은 따로 있다고 이렇게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심층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유교든 간에, 신과 나와 우주가 하나라고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유신론이라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 혹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는 하나님 안에 있고 너희 안에 하나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이슬람에서도 수피파에서는 하느님이 내 몸의 동맥(핏줄) 보다도 더 가까이 계신다고 합니다. 신(神)은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신은 초월적입니다.

이렇게 초월과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신관을 "범재신론 (汎在神論 panentheism)"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는 것이 심층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문(門)에는 창문이란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창문 없는 문을 생각할 수 없듯이, 창과 문은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가장 간결하고 극적으로 말해주는 종교가 우리 사회 있습니다. 바로 천도교, 동학입니다.

동학에서는 '하나님이 내 속에 있다.' 즉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우리가 천주님을 내 속에 모시고 있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주님을 가만히 보니, 내 속에서 가장 중요한 나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인내천(人乃天)입니다. 내가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나라는 말과 같습니다.

신유학(新儒學)에서는 만유일체, 혼연동체, 동체대비(萬有一體 渾然同體 同體大悲), 원불교에서는 동귀일체(同歸一體), 불교 중 화엄불교는 이사무애(理事無礙) 즉 모든 것이 다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의존되어 있고 서로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 하는 말을 하기 어렵습니다. (요 14:11) 매우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말이 자칫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표층은 문자주의에 억매입니다. 심층은 문자가 말해주려고 하는 본래의 의미, 진정한 의미를 보려고 합니다.

「유영모」 선생은 그것을 '속내'라고 했는데, 성경이든 불경이든 사서삼경이든 속내를 보려 하는 그것이 심층종교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체험 같은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말로 된 것에 절대적인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말이란 것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서,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서에 보면 기적이 많이 나오는데, 이 기적을 사인(sign)이라고 합니다. 사인이란 것은 그 자체가 문자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저는 문자주의는 종교로서의 모든 힘을 없애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처럼 문자적으로 가면 종교가 살 수 없습니다. 문자주의나 근본주의나 같은 말입니다 이슬람 문자주의나 이슬람 근본주의나 그리고 기독교 문자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는 같은 말입니다.

근본주의자들의 주장 중 첫째는 성경무오설입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선불교는 처음부터 문자에 의존하지 말라, 불립문자(不立文字) 등..문자 의존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섯째, 심층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견해에 대해 절대적이란 말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앉아서 서로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더 깊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벗으로 살아갑니다.

코끼리를 만진 시각장애인 우화가 있습니다. 코끼리 코를 만져보니 구렁이 같더라고 하는 사람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내가 코를 만졌더니 구렁이 같은데 나는 생생한 체험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절대적으로 양보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한다면 그것이 문자주의고 그것이 배타주의일 것입니다. 이처럼 표층종교에 속한 사람은 배타성을 갖는데, 심층종교 사람들은 배타성을 멀리합니다.

마지막으로 심층종교 사람은 내세만 강조하는 것 아니라, 지금 여기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표층종교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고생하더라도 내세에는...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착취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아주 무서운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알듯 미국의 과거 흑인 노예를 사들인 지주들은 흑인들에게 계속해서 "지금 너희들은 고생하더라도 보상은 하늘에 있으니 참으라"고 참을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심층종교 사람들은 오늘 내가 여기서 뭘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종교의 참된 체험은 4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행동을 수반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절에 가보면 십우도(十牛圖)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내용은 어떤 사람이 소를 찾아 집을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방황하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비유하여 10단계로 그린 그림입니다. 10개 그림 중 마지막 그림은 입전수수(入廛垂手)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시장에 나가서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고 도와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엔 깨달음에 의한 행동이 있는 것이 심층종교의 특징입니다.

이런 것을 심리적으로 풀어 놓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산타클로스(Santa Claus) 이야기 입니다. 아주 어릴 때는 산타클로스가 정말로 오는 줄 알았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선물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그렇게 믿는 것도 좋습니다. 어릴 땐 그런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엄마가 산타클로스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통해 가족끼리의 사랑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자신도 가족에게 선물을 줄 것을 생각하게 되는 단계가 옵니다. 나아가 가족 뿐아니라 온 동네, 온 사회, 온 세계에 도움을 주고, 물질적 도움도 좋지만 공평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또 이를 위해서는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환경문제도 참여하는, 심지어 산타 크로스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화답하는 천지합일의 이야기이라는 이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점점 신앙이 깊어져 가면서 내가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한 군데 걸리면 신앙적인 발달장애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깊어지는 신앙, 의연한 삶"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서 "내 속에 하나님 계시다. 그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는 생각을 체험적으로 정말 확신한다면, 이 세상은 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이나 이사야 말씀 보니 꿇리지 않는다. 쫄지 않는다 그런 말을 계속하는데 하나님 나를 도우시니 그렇게 한다 이야기 하지만, 심층 쪽에서는 하나님이 돕는 것 아니라 내가 바로 하나님인데 뭐가 꿇릴 것이 있는가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 중에 「필 주커먼(Zuckerman Phil)」이 쓴 "신 없는 사회(김승욱 옮김, 마음산책. 2012)"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장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들이 있는데 이들이 잘 사는 이유가 신이 없기 때문이란 겁니다. 이 말은 표층적인 의미의 종교, 표층적인 의미의 신관이 없어지면 오히려 사회가 잘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말입니다.

한국에도 기독교인이 점점 준다는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잘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가 변화해서 새로운 의미의 종교로 발돋움 하는 일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할 수 있어서 입니다,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21세기 종교는 심층종교가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는 말을 했습니다. 또 독일의 여성 신학자인 「도르테 죌레(Dorthee Soelle)」는 "옛날에는 심층종교란 것이 몇 사람에게만 가능했던 그런 특권에 해당됐는데, 지금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런 심층종교 체험이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열려있다"며 변화된 사회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심층종교의 민주화"란 말을 씁니다. 21세기 심층종교 민주화 시대에는 종교인들이 심층종교로 발돋움하는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종교가 가져올 수 있는 그런 표층종교의 부작용이 줄고, 심층종교가 될 때 종교가 줄 수 있는 본래의 시원함, 의연함 그런 것이 우리에게 올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강남 박사는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미국종교학회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객원교수,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 위 강의는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한 종교특강을 정리한 내용으로,
외부 강연 등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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