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Karl Barth , 1886-1968)   ©한국칼바르트학회

현대기독연구원이 올해 마지막 강좌로 개설한 '바르트의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가 이달 8~29일까지 매주 월요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기독일보는 '바르트의 신학입문' 강독 세미나 첫 강의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칼 바르트가 1961~1962년 겨울 바젤 대학교에서 40년간의 교수 생활에서 마지막으로 강의한 내용을 묶은 '개신교신학 입문'. 이 책의 강독 세미나 강사로 초청된 신준호 박사(인천제일교회 교육목사)는 지난 10월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출간된 칼 바르트의 '개신교신학 입문'(복있는 사람)의 번역자이기도 하다.

신준호 박사는 먼저 "영혼, 영적인,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심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다"며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용어 중 하나가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창조자 하나님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접촉점이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계속 1장 '신학의 자리'을 강의하며 바르트의 '이웃을 넓게 곁눈질했다'를 설명했다. 그는 "신학이 어디 있어야 하냐면 말씀 앞에 있어야 되고 나사렛 예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한 200~300년 이래로 계몽주의가 다가오니 불안해하며 (신학이)내 자리는 어디이냐 하며 이웃을 넓게 곁눈질하면서 비틀거렸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는 먼저 이것을 지적한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오늘날 우리 신학은 어떤가? 곁눈질하나요?" 질문하며 "곁눈질 안할 수 없겠지만 신학은 그래선 안된다. 신학이 인문학, 종교철학, 심리학을 쳐다보면서 어떻게 한번 나도 세상에서 인정을 받아볼까 라는 부질없는 노력을 한다. 칼 바르트 신학은 이것을 중단시킨다"며 "그리고 신학 고유의 중심 문제,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라는 것을 배워야 된다고 한다. 신학 자체의 고유한 중심 문제인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서 등장한 '창조자 하나님' 여기에 집중했을 때 이웃의 학문도 '어, 너 신학답다'고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이것이 1960년대 대학의 상황이다"고 했다. 우리 상황은 더 복잡할 수 있지만 과거를 배울 수는 있다"고 했다.

덧붙여 "자기가 걸어야 할 법도를 걸어야된다. 이 법도가 뭐겠느냐?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 안에 내 인격이 포함돼 있고 인류의 인격이 포함돼있고 거기서 운명이 결정돼있다는 것을 신학이 취급해야 한다"며 칼 바르트의 이런 입장은 폴 틸리히의 문화신학과는 절대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테면 '걸그룹 그게 문화냐. 그걸 쳐다보고 문화라고 문화신학을 해나가면 예수는 어떻게 되겠느냐' 바르트가 그랬다는 것이다.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신학은 극과 극이고,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신힉이다. 틸리히는 이 세상과 어쨌든 상관관계를 맺어보려는 상관관계 신학을 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그 상관관계를 중단하라고 했다. 폴 틸리히의 신학은 우리의 죽을 운명을 깨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죽을 몸을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 살리는 힘은 예수의 부활에서 나온다. 죽음을 건너느냐 못건너느냐에서 일반 종교철학과 종교신학과 원래의 신학은 갈라지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바르트는 전혀 하지 말자는게 아니고 대화는 해도 되는데 좀 늦춰도 되는 치료다고 했다. 1960년대에는 그랬을 것이다. 자연과학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오늘날같이 문화가 발전하지 않았었다. 그러 21세기 살고 있는 우리가 60년대 바르트를 너무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지금은 자연과학과의 대화를 시작해야될 때일수도 있다"며 "60년대의 상황에서는 그 중 하나가 양자물리학과 바르트가 알수 없었던 최근의 접근이론이라든지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여기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고 했다.

신 박사는 "이것이 바르트가 말하는 신학의 자리이다. 신학은 말씀 앞에 서야 한다. 말씀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이다"고 강조하며 "그런데 창조자 하나님이 예수의 인격 안에 등장할 때 매끄럽게 등장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인격은 일단 역사로 펼쳐지는데 이 책에 의하면 예수의 인격 안에는 이스라엘 역사가 포괄된다. 예수의 인격은 한 개인의 인격이라는 좁고 유한한 울타리가 아니고 그 인격 안에는 2000년이라고 할 수도 있고 4000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포괄이 된다. 이스라엘 역사가 전체가 지향하던 목적, 목표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완성이 된다"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는 계약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역사는 이 계약의 역사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배신하고 잊어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다"고 설명했다.

이어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과 속되고 불충한 백성 사이에 만남이다"(27쪽)는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매끄럽고 사이좋게 만났더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증거되는 이스라엘 역사는 속되고 불충한 백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실함을 지키시는 하나님 사이의 만남이었다"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돌입한다"고 인용했다.

그는 "'여기'라는 것은 인간의 배신, 죄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예수의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직접 등장하면서 인간과 강제로 하나가 되버린다. 좋은 뜻에서 '강제로'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도록...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가장 깊은 인간의 죄성을 하나님 자신은 받아들이셨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겠지만 그걸 이겨내고 십자가 창으로 찌르는 그 저항을 이겨내고 예수의 인격 안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는 것이다"며 "극한의 딜레마, 삶의 고난 안에서 우리가 나사렛 예수의 인격을 우리 자신 안에서 실행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삶의 근간을 흔들어놓는 사건이 생겼을때 그것이 '십자가'다.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십자가가 아니고..."고 말했다.

덧붙여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하나도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한 인간, 하나님에게 대해서 저항하지 않는 그 인간을 직접 등장시킨다. 하나님께서 이 한분을 그 백성 한가운데서 인간이 되도록 하셨고 한 인간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완전히 수용하셨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 짧은 문장 안에 그 큰 갈등을 생각해야 된다. 그 배경에는 날카로운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 박사는 "예수의 인격이 어느 정도 크냐면 4천년의 이스라엘 역사, 교회사, 인류의 역사가 다 담길 정도로 크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한다. 신학을 안하면 모르겠지만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의 인격 안에 모든 시공간, 우주의 사진이 담겨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며 "보이는 우주는 별로 안크다. 보이지 않는 예수의 인격이 다 담고 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그 인격 안에서 오히려 이 우주가 생성된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놀람'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그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등장하셨다 했을때 놀랐는가? 안놀랐는가? '이러저러하게 신학을 시작했는데 놀라지 않는 사람, 혹은 신학을 마쳤는데 더 이상 놀라지 않게 된 사람, 더 큰 놀라움 안으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은 일단...' 그런 사람은 신학을 관둬라는 뜻이다"며 "이 예수 사건 앞에서 놀랄 수 없는 사람은 계몽주의고 이성주의다. '놀람이 없다면 신학 작업 전체가 뿌리로부터 병들수 있다'"는 칼 바르트의 말을 인용했다.

그는 '놀람은 첫째 기적으로부터 온다'(73쪽)는 구절을 인용하며 "예수의 인격, 인격은 사역으로, 역사로 전개된다. 예수의 인격과사역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의 사역은 온통 기적이다. 신학은 기적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기적도 말해야 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그리고 경고한다. '기적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 신학은 신학이기를 그쳐야 한다'고. 오늘 우리에게도 강력한 말씀이다"며 "기적은 철두철미 병든 인간, 절망에 빠진 인간, 좌절의 인간을 건져내는 구원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들은 새로움의 표징일뿐 새로움 자체는 아니다'(76쪽) 고 바르트는 말한다"고 했다.

신준호 박사는 이어 "손 마른 사람의 손이 펴졌다 한 건 21세기 사람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성서가 말하는 구약의 문자적인 언어적인 기적에 매여서 정말 보아야 할 결정적인 기적, 나사렛 예수 새로운 인간 육체의 인간이 아니고 죽음을 건너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창조자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한 인간'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며 "봐야할 것을 못 보고 주변적인 표징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요나가 3일 동안 고래 뱃속에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계몽주의적인 이성이다. 성경은 그걸 말하지 않는다. 해가 기브온에서 머물렀나? 그럴수 있다고 쳐도 그건 성경이 말하는게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 안에 등장한 새로운 인간이다"고 강조했다.

신 박사는 "이 새 인간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죽음을 건너갔기 때문에 그렇고 육체를 넘어서서 새로운 영의 몸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너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전쟁이 나도 죽고 안나도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젊을 때는 피부로 안느껴진다. 인문학적인 표현지지만 한번은 '메멘토모리'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안실에서 마지막 호흡을 내쉰다고 한다. 마지막 호흡을 내쉴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예수가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 때 새 인간이 내게 희망의 빛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그분 자신이다. 그분은 인간의 인격이면서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세상의 하나님과의 화해이다"며 "'가장 깊은 근원에서 영원히 유일회적인 놀라움에 사로잡힌 인간이 된다. 우리는 놀라고 또 놀라야 한다'(78쪽)고 바르트는 말했다. 이사야서에도 그랬다. 너희는 놀라고 또 놀라야 한다. 놀라야 마땅한 것이다. 자칫 했으면 내가 영원히 죽을뻔 했구나 라는데 놀라고 그런 내가 이제는 값없이 살게 되었구나 하는데 한번더 놀라야 한다. 실전에서는 기적에 놀라고 예수 그리스도에 놀라고 마지막에 '자기자신'에 대해 놀라야 한다 이것이 신학자의 실존이다. 말씀이 놀라운만큼 그 말씀 앞에 선 신학자 나 자신도 놀라운 존재가 된다. 다시 반복될 수 없는 놀라움, 유일회적인 영원한 놀라움에 사로잡힌 사람이 신학자, 신학의 자리일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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