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찬 목사   ©미주 기독일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회개란 마치 하나님 앞에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다' (C. S. 루이스)

왜 에드워즈와 루이스가 산책을 좋아했을까?

내가 조나단 에드워즈와 C.S 루이스를 오랜 동안 읽고 사랑하면서, 두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한 것은 바로 흥미롭게도 산책을 좋아했던 것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말을 타고, 숲 속에 가서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루이스도 개인적으로나 친구들과 함께 산책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물론 그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라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왜 이들이 이렇게 산책을 좋아했을까?

내가 3년 전에 버지니아로 이사 온 후에 시작하며 즐기는 것이 바로 산책이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정해진 공원에서 걷는다. 얼마 전까지는 훼어펙스의 한 복판에 있는 공원에서 걸었지만, 이젠 버크로 이사 온 후엔, 아름다운 버크 호수가의 공원을 걷는다.

세상과의 이별 연습

나는 산책을 통해서,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이별을 연습한다. 일부러 세상적으론 가장 바쁜 월요일에 의도적으로 세상과의 결별을 연습한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것들이 너무도 익숙해져있고, 세상의 기계와 문명, 요즘은 인터넷과 정보의 홍보 속에서, 하나님의 것보다, 세상의 것이 너무도 커보이고 아름다워보이고 심지어 압도당하기도 한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이런 세상의 거대함과 편리와 아름다움들과 이별을 연습한다. 그리고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의 영원한 소망과 결혼 연습을 한다. 마치 의식적(ritual)이고 의도적으로... 물론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주신 소명과 삶을 인죠이하는 것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영원을 향한 나그네로서, 산책을 하는 것이다.

가난 연습

산책을 할 땐, 될 수 있는 한 간편한 운동복 차림에, 한 손에 물병만 든다. 될 수 있으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뛰지않고 걷는다.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그저 걷는다. 옆에 달리는 자전거 타는 사람도,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리고 공원 너머에서 들리는 차소리에도 상관없이 그저 걷는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영적 가난함을 연습한다. 로이드 존즈 목사님은, 산상설교에서의 '심령이 가난함'이란, 영적 파산을 고백하는 것,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다른 의미로,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를 의미한다고 지적했다(Carson, Matthew, 95에서 재인용). 나에겐 감히 산책은 바로 믿음의 본질인,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는, 이신칭의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무장 해제 연습

또한 산책을 하면서 나는 무장 해제를 연습한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려 놓는다. 내 생각과 지혜, 심지어 비전조차도 내려놓는다. 교회와 연구원에 대한 생각, 가정과 자녀, 나의 모든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운동화에 밟히는 흙을 느끼면서, 나는 철저히 흙에서 온 인간임을, 인간적임을 걸으면서 고백한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매우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한다. 언젠가 씨 에스 루이스가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회개란 마치 하나님 앞에 무장 해제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잇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향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순전한 기독교], 101). 내 안에 있는 죄성과 인간적인 것을, 산책을 통해서 항복하며, 심지어 죽음을 연습한다. 아마도 이것이 주님께서 날마다 이른 아침에 홀로서 한적한 곳에서 습관을 좇아서 기도한 것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아와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죄인된 인간을 위해, 십자가의 순간까지 인내할 수 있던 것은 바로, 날마다 기도를 통해, 무장해제하신 것이 아닌가!)

주님과 교제

산책의 즐거움은 바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이다.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모든 인간적인 분주함을 내려놓고, 간편한 복장과 마음으로, 땅에 발을 디디며, 나의 연약함을 고백한다. 나의 여러 가지 기도의 제목들을 내려놓는다. 무엇보다도,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며, 그 분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시간이다. 물론 교회와 가정에서 홀로 그리고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감격을 맛본다. 그러나 나는 또한 산책을 하면서, 주님과 깊은 만남과 사귐을 가진다. 아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숲 속에서 산책하면서 지내기를 좋아했던가! 아, 그래서, 기도의 사람, 데이비드 브레이너즈가 숲속에서 밤낮으로 홀로 기도하기를 힘썼던 것인가! 에드워즈는 한번은 숲 속에서 기도하던 중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몇 시간을 감격의 눈물로 지새우지 않았던가! 그래서 겸손한 사람, 순전한 사람, 루이스가 왜 그렇게 산책을 좋아했을까? 혹시 자신의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서의 모든 세상적인 명예를 내려 놓고 산책하기를 좋아했던것은 아닐까? 하는 나의 상상은 결코 과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교회사의 기도의 사람들이 산책하기를 즐겨했는가하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주흥아사(主興我死)의 고백

무엇보다도, 산책을 통해서, 내 것을 내려 놓고, 하나님만을 바라본다. 나의 시각과 지혜의 관점이 아니라, 산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을 묵상하고 바라본다. 산책길을 시작할 때의 너무도 인간적이고 자아중심적이던 내가, 산책길 따라서 고불고불 돌아서 다시 출발지로 돌아올 때면, 내 생각, 내 비전, 내 관점보다 하나님의 생각, 비전, 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때론 내 고집이 너무도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지만, 흙을 밟고, 숲들을 바라보고, 숲속으로 보이는 청명하고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 견고한 내 고집의 성(castle)도 언젠가 고개를 내리고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연약하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지만, 하나님만이 위대하시고 영원하심을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내겐, 산책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요 나아가 신앙고백의 시간이다. 마치 세례 요한이,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고 그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작은 소리라고 고백했듯이,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한마디로, 주흥아쇠(主興我衰)의 신앙을 고백했듯이, 나는 산책을 하면서, 주흥아쇠, 나아가 내가 죽고 주님을 높이는 주흥아사 (主興我死)의 신앙 고백을 해본다.

물론 이 산책은 꼭 조용한 공원이나 숲 속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도심의 한복판에서도,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과연 우리의 마음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이태리의 시인 단테가, '바쁜 생활의 한 복판에서도 내 자신은 어두운 숲에 있음을 알게 된다'(Nouwen, Forward, Reaching Out에서 재인용)고 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어디서나, 산책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외로움(loneliness)를 치유하는 주님과의 고독(solitude)을 연습할 수 있다.

이번 주도 산책길을 나선다. 에드워즈와 루이스를 생각하면서, 세례 요한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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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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