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 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을 위해 국내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2월에 열린 한국실천신학회 제20회 정기총회 및 제55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신학자들의 논문을 일부 연재합니다. 첫 순서로 이화여자대학교 윤은주 박사의 '한국사회의 융합과 통섭' 관련 논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윤은주 박사ㅣ이화여자대학교

2. 한국교회의 통일선교

1) 통일선교신학
1980년대 한국교회가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주요 방식 중 하나는 성명서 발표를 통해 통일운동의 신학적 근거뿐만 아니라 정세인식에서부터 목적과 배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분석과 함께 통일담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성명서에는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선교 관점의 신학적 근거가 서술되어 있을 뿐 아니라 통일의 내용과 방향성에 관한 비전이 제시되어 있다. NCCK는 1981년 한독교회협의회에서의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1982년부터 준비 작업을 거쳐 1983년 통일문제협의회를 출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정부에 의해 협의회 개최가 무산되자 이에 대한 항의성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통일문제협의회 개최 방해에 관한 성명서는 당시 국내정치 상황 속에서 민간의 통일운동 참여 자체가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적 행위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적대적 남북관계의 경쟁구조 속에서 교회가 화해자로 나서야 한다고 천명한 점은 1980년대 전개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통일운동참여의 동기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 NCCK는 1985년 2월에 열린 제34차 총회에서 평화와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 역시 한반도의 분단구조가 민족의 주체적 민주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정의와 인권을 제약하며 독재정치를 정당화시키고 정치사회경제문화의 모든 삶의 조건 속에 군사화를 조장, 민중의 고난을 가중시켰다고 규정했다. 특히 분단이데올로기는 "동료 인간을 불신하고 감시하는 심리적 불안과 적대의식을 조장하며 민중의 정신병리를 만연시켰고, 정신적, 학문적, 문화적 자유와 창조성을 제약함으로써 민족의 발전적 창조역량을 황폐케 하였다."고 보았다. 분단구조 속에 빚어지는 민중들의 삶의 왜곡을 적시하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적극적인 통일노력이야말로 참된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인식을 나타내 주는 내용이다. 또한 남북한 군사대결이 첨예한 상황 속에서 평화를 주장한 이 성명서는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극복하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분단이데올로기의 폐해를 지적함으로써 통일의 당위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1988년 2월 29일 연동교회에서 열린 NCCK 제37차 총회에서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통일과 평화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1988년 2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발표한 이 선언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이어 통일논의에 불을 지피는 파장을 일으켰다. 통일과 평화선언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정의와 평화를 위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며 이러한 전통을 일제시대 3.1운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부터 찾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다스리던 때의 한국교회의 평화운동은 곧 민족의 독립운동이자 노예된 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역사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민족해방운동이었다...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나타난 군사독재 정권은 안보를 구실로 인권을 유린하고 경제성장 논리로써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했으며 한국교회는 이에 대하여 정의와 평화를 위한 신앙으로 저항하여 왔다.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의 인권 및 민주화운동은 바로 이러한 정의와 평화를 위한 선교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남북분단은 세계질서의 정치구조와 이념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로 규정하고 있다. 민족 분단이 갖는 국제적 성격을 분명히 하여 한반도 문제 해결의 국제적 성격을 인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민족의 분단이 장기화되면서 이산가족으로 인한 고통, 남북한 적대적 대결로 인한 군비경쟁, 안보와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인권탄압, 남북한 적대시 정책 등을 분단 현실로 적시하여 '죄의 열매'에 대한 구체적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분단 상황을 동서냉전체제의 결과로 인식함과 동시에 그 결과 한반도 내부에서 나타난 왜곡된 삶의 정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개신교인들이 먼저 반성하고 돌이킬 것을 제시하였다.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고백' 2항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민족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행 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 13:17)이다.

이러한 죄책고백은 개신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 요소로 다른 통일선언과 구별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통일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7.4남북공동성명에 나타난 자주, 평화, 민족적대단결의 3대 정신 위에 인간의 존엄성 보장, 민중 참여 등 두 가지 원칙을 추가하였다. 통일과 평화선언의 '민족분단의 현실'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분단이 결과한 인도주의적,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남북에서 공히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훼손하는 구조로 작용한다는 뚜렷한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통일을 추구하는 모든 과정에서 민중의 참여를 중시하는 태도 역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중시하는 개신교 윤리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통일은 민족이나 국가의 공동선과 이익을 실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나 민족도 인간의 자유와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며, 이념과 체제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도주의적인 배려와 조치의 시행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며 다른 어떠한 이유로도 인도주의적 조치의 시행이 보류되어서는 안된다.

2. 통일을 위한 방안을 만드는 모든 논의 과정에는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인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특별히 분단체제 하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의사결정 과정에서 늘 소외되어 온 민중의 참여는 우선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외에 4항에는 전쟁방지와 긴장완화 방안으로 네 가지 구체적 실천항목을 제시하였는데 이중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한 상호간에 신뢰회복이 확인되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평화와 안정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하며 주한 유엔군 사령부도 해체되어야 한다."는 규정은 보수적 교회들의 큰 반발을 사서 선언문 전체에 대한 거부감을 갖도록 하였다. 전제조건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철수 주장은 반공주의에 대한 죄책고백과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내용과 더불어 문제가 되면서 보수적 교회들이 잇단 반대성명을 발표하며 조직적인 대응까지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보수적 교회들이 대거 대북지원에 참여하게 되면서 통일과 평화선언 내용을 놓고 벌어졌던 논쟁점들은 희석되고 보수적 대북관을 유지하던 교회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선언에서는 또한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를 제시하며 해방 50년이 되는 해인 1995년을 평화와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고 이후 전개되는 개신교 통일운동의 좌표가 되도록 하였다.

2) 통일선교활동
◆ 남북교회의 만남 = 1988년 통일과 평화선언이 발표되기 전부터 한국교회는 통일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교회의 공식적인 만남을 추진하였는데 1986년 9월 2-5일까지 스위스 글리온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huch Cpuncil: WCC) 국제위원회 주최로 열린 세미나(글리온 제1차 협의회)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선기독교도련맹(조기련)의 고기준 목사와 NCCK 강문규 대표가 평화통일을 주제로 발제를 한 후 성만찬과 성경공부를 함께 진행했다. 이 글리온 제1차 협의회에서는 통일문제에 대한 남북 양측의 공식적 입장이 표명되었다. 북측은 정부의 입장과 동일한 통일론을 주장하였고 남측에서는 평화의 내용을 자유, 정의, 화해로 규정하며 남북 정부가 기존 권력구조를 강화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통일문제를 다뤄왔음을 지적하였다. 북한정부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였던 조기련과 NCCK 대표단의 만남은 민간전체 차원을 대표하는 입장은 아니었기에 통일론에 있어서 합의는 불가능했고 평화와 통일에 대한 개신교의 의지를 표방하며 남북교회가 함께 종교의식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만남은 1988년 11월 24-25일 스위스 글리온에서 이루어졌다.(글리온 제2차 협의회) 이 회의에서는 2월 29일 발표된 통일과 평화선언에서 한국교회의 실천과제로 제시한 1995년 평화와 통일의 희년 선포를 수용하여 8.15 직전주일을 공동기도주일로 정하고 공동기도문을 제정하였다. 또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을 채택하여 8가지의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이후 남북한민간단체 간에 최초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협의회에 참석한 남북한 대표들은 여전히 각 정부의 통일정책을 그대로 제시하며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었는데, 평화공존의 원칙이나 통일을 지향하는 큰 틀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세 번째 만남 역시 스위스 글리온에서 1990년 12월 1-4일 이루어졌다.(글리온 제3차 협의회) 이 회의에서 남북교회는 글리온 제2차 협의회 선언문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1995년을 목표로 희년 5개년 공동작업 계획을 정하고 실천하기로 합의하였다. 실천사항으로 8.15 직전주일에 진행하기로 합의한 남북공동주일예배는 이후 계속 이어졌다.

◆ 국제개신교조직의 지원과 해외 통일운동  = 국내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당시 개신교 일각에서는 국제개신교조직의 지원으로 국내 인권운동을 지속할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통일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1970년대부터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온 WCC와 독일, 미국, 일본 NCC 등 국제개신교조직은 통일운동에 있어서도 국제네트워크로서의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1975년 11월 6-7일 WCC 세계선교위원회는 제네바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긴급 비공식 모임을 소집하여 도시산업선교, NCC등의 운동을 지원하기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 회의에서의 결정으로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를 구성한 후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였다. 이후 1976년 5월 시카고모임에서는 한국민주화운동세계협의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77년 10월 뉴욕모임에서는 다시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이하 민주동지회)로 개칭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내외 민주화운동 지원에 들어갔다.

민주동지회는 1979년 1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일동 동경에서 연례모임을 갖고 통일운동이 민주화운동과의 유기적 관련성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했다. 또한 1981년 4월부터 5월 3일까지 독일 스튜트가르트(Stuttgart) 근교 밧볼(Bad Ball)에서는 민주동지회 인사들과 WCC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 CWME) 위원들이 모여 한국에서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관한 세계교회의 협력을 모색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밧볼회의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장기적 전략과 각국의 지원활동에 대한 방향성을 모색하기 위한 구체적 실무협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독일교회에 대한 협력도 요청하였다.

밧볼회의에서의 요청에 의해 1981년 6월 8일에서 10일까지 NCCK 국제위원회와 독일개신교연합회 세계선교회 동아시아위원회 대표들은 서울에서 4차 한?독교회협의회를 열고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양국은 분단국으로서의 공통된 관심사항인 통일문제에 교회가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해야한다고 밝혔다. 선언에서는 또한 NCCK 내에 통일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는데 1982년 NCCK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가 구성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양국의 교회는 분단 현실과 통일문제에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 교회차원의 협력이 필요함을 인식하였고 독일교회가 한국교회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후 독일교회의 지원은 1980년대 NCCK 통일운동 확산의 주요 원천이었다.

그러나 1983년 NCCK가 통일문제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한국 정부에 의한 제제로 무산되는 등 국내 통일운동은 당시까지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WCC 국제위원회는 1984년 10월 29일~11월 2일 일본 도잔소(東山莊)에서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협의회를 개최하여 국제개신교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을 건의안 형식으로 채택하였다. 도잔소협의회에는 북한교회가 처음으로 초청되었는데 비록 대표단을 파견하지 못했지만 회의의 축하와 성공을 비는 조선기독교도련맹 중앙위원회 명의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보고서에서는 분단이 한반도에 있어서 전쟁 위협과 독재, 인권유린과 경제적 손실 등 모든 악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는데 분단에 따른 왜곡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인도적 피해상황에 대해서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거의 40년 동안을 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부모, 형제, 남편으로부터 떨어져 살고 있다. 그들 중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이산가족의 쓰라림을 안고 있다. 끊임없는 적대감이 의심과 불신 분위기를 한국사회에 만들어 내고 있으며, 안보란 이름으로 남북한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정당화시키고 있다.

분단으로 인한 개인의 피해를 우선적으로 언급하면서 군사화 된 분단으로 인한 경제적 왜곡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두 개의 남북한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무장된 진영이 계속되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양쪽의 무기 비축의 질과 양은 높아만 가고, 현역 병력에 있어서 한반도는 군사적 최대강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남한은 4,000만 인구 중에서 62만 명의 현역병을 확보하고 있으며, 4만 여명의 미군들이 아직도 논란이 많은 국제연합(UN)의 깃발 아래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북한에는 1,900만 인구 중에서 약 78만 명이 군복무를 하고 있다.

양쪽은 국가예산의 30~40%를 차지하고 국민총생산액의 6~10%에 달하는 군비지출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 액수는 국가발전을 심각하게 지연시키거나 전도할 수가 있는 엄청난 비용이다.

남북이 적대적이며 물리적인 대결로 인해 발전이 제한되고 있으며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분단으로 인한 이념갈등이 지배세력에게 이용되는 상황도 지적하였다.

양쪽의 다른 쪽에 대한 극단적인 이념적 태도와 강력한 선전활동은 분단을 고정화시키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다른 쪽으로부터의 도발에 대한 양쪽 국민들의 두려움은 정당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선전활동으로 이런 두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고 또 정부당국은 이것을 이용하고 있다....남북한은 통일을 향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는 대신에 개방된 통일논의에서 민중들을 계속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분단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은 무엇보다 교회의 역할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데 남북의 적대관계와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직접적인 교류가 필요하지만 한국에 있는 개신교인들이 실행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국제 개신교차원에서 북한교회를 직접 접촉하여 남북개신교인들이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주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도잔소협의회는 국제개신교조직을 통한 남북문제해결의 첫 공식회의였고 이후 남과 북의 교회뿐만 아니라 북한교회와 세계교회를 연결해주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각 회원국 교회들에게는 북한 기독교공동체와 직접 접촉할 것을 권하는 건의안이 전달되었다. 1985년 11월 WCC 국제문제위원회의 에릭 와인가르트너(Erich Weingartner)와 코쉬(Koshy)가 조선기독교도련맹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처음 북한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때 NCCK가 기증한 성경과 찬송가를 선물로 전달 하여 한국 개신교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지침 속에서 미국NCC대표단은 1986년 4월 18일 평양을 처음 방문하였고, 1987년에도 재차 방북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일본NCC가 1987년 5월에, 캐나다 NCC는 1988년 11월에 북한을 공식 방문하였다.

한편, 1984년 3월 한국과 미국, 캐나다 교회협의회가 참여한 제3차 한?북미 교회협의회에서는 미국이 남북한을 분단시킨 나라였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함을 지적하였다. 이를 위해 미국교회는 한국교회와 함께 한반도 통일을 위한 노력에 임해야 함을 명시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한반도 분단과 분단질서 유지에 북미교회들 또한 책임이 있다고 인식하게 된 미국과 캐나다 교회협의회는 WCC를 통해 적극적으로 남북교회의 만남을 지원하였다. 미국교회협의회 총회가 1986년 11월 채택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정책성명에는 미국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 미국 크리스천의 책임 = 한반도의 상황은 미국 안에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들에 보다 더 몸 바쳐야 할 강대국의 시민인 우리들의 분열과 실패의 결과들을 너무나 뼈저리게 기억시켜준다. 우리는 우리 국가가, 그리고 군사적 경제적 이해가 한국을 분단시키고 그것을 유지시키고 또 더욱 고정화시킨 역할을 해왔음을 깊이 의식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이러한 사실과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국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결과들을 미국인들이 각성하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또한 캐나다교회협의회는 1985년 12월 캐나다아시아실무그룹(Canada Asia Working Group: CAWG)을 통해 북한에 관한 성명을 채택하면서 북한선교에 관한 입장을 발표하였다. 중립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화해와 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과정에 참여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협력하고 화해에 악영향을 미치는 북한에 대한 판에 박힌 선전과 편견, 적대적인 분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교회협의회 총회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장로교회 총회, 미국그리스도교회 총회, 미국연합감리교회 총회에서도 동일한 맥락 하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협력과 지지를 밝힌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이 해외에서 진행되면서 처음으로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였던 측은 유럽과 미주에 거주하던 개신교 교포들로 구성된 조국통일북미주협회와 통일신학동지회가 연합한 조국통일기독자회(기통회)였다. 1978년 유럽, 미국, 캐나다의 한인 개신교인들이 북한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기독교평화회의를 통해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81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시작된 제1회 통일대화는 199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 대화까지 10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남북교회 공동사업으로 1983년과 1984년 공동성경과 찬송가가 출판되었고, 1988년 9월 9일에는 평양 봉수교회가 건립되었다. 또한 통일대화를 주도하였던 홍동근 목사는 1990년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의 초빙교수로 초청되어 1년 6개월 정도 개신교 신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기통회에 참여하였던 인사들은 주로 한국사회 민주화를 주장하는 반정부 성향의 해외 교포들로 북한의 정치인과 종교인을 초청하여 미군 철수 및 한국 민주화 문제 등을 다루는 정치적 성격이 강한 운동을 벌였다. 이는 민주동지회가 국제개신교기구인 WCC를 통하여 접근하던 것에 비해 기통회는 주로 해외 교포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한국사회의 정치 상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당시만 해도 반공이념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했던 NCCK는 국내 활동에 있어서 민주화운동이 좌경 이데올로기로 여겨져 공격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반공이데올로기를 점진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진보적 개신교인들에 의해 보수·반동·친미 세력으로 비판받더라도 전략적 차원에서 친북주의자들 및 북한과 관계를 직접 갖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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