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홀과 웰본 선교사 후손 유족들이 기증한 선교사 유품들   ©양화진기록관 제공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담임목사 이재철)가 셔우드 홀과 웰본 선교사 후손을 초청해 26일 선교사 추모예배 및 유품 기증식을 진행했다.

이날 오전 11시 합정동 소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 2층에서 열린 행사에서 추모예배에서 100주년기념재단 이사장 강병훈 목사가 설교를 전했고 참석자들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역사 동영상 및 홀과 웰본 선교사의 업적을 회고하는 동영상을 시청했다.

유품기증식에서는 에스더재단 대표인 김현수 박사의 기증 경위 소개에 이어 선교사 후손인 클리포트 킹과 프리실라 웰본 에비 씨의 인사 후 양화진기록관 박흥식 관장의 감사장 전달과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감사 인사 등이 이어졌다. 이후 참석자들은 선교사 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했다.

선교사들이 사용한 청진기   ©양화진기록관

이번 양화진 안장 선교사 후손 초청 추모예배 및 유품기증식에 초대된 클리포드 킹 씨는 셔우드 홀(1893~1991) 선교사와 그의 아내 마리안 홀(1896~1991)의 네 자녀 중 쌍둥이로 태어난 막내딸 필리스 마리안의 외아들로, 셔우드홀의 외손자이다. 또 프리실라 웰본 여사는 양화진에 안장된 웰본(H. G. Welbon, 1866~1928) 선교사의 손녀로, 웰본 선교사 장남의 쌍둥이 딸 중 동생이다.

한편 저녁 8시에는 선교기념관 앞 야외무대에서 선교사 후손 초청 제12회 양화진음악회가 열렸다. 이번 음악회에는 뮌헨 국립음대 이미경 교수와 세계적인 오보에 연주자 니콜라스 다니엘, 그리고 탤런트 정 준 씨가 나레이터로 출연했으며, 바흐, 헨델, 모차르트, 그리그, 나단 밀슈타인, 조지 거쉬인 등의 클래식 음악과 엔리코 모리꼬네의 영화 '미션' 주제 음악 등이 다뤄졌다.

■ 닥터 홀 선교사 가족은…

양화진에는 클리포드 킹 씨의 외할아버지 내외인 셔우드 홀와 마리안 홀, 고조 할아버지 내외인 윌리엄 제임스 홀(1860~1894)과 로제타 홀(1865~1951), 그리고 이들의 자녀 두 명을 합해 총 6명이 안장되어 있다. 윌리엄 홀과 로제타 홀은 의료선교사로사로 내한하여 평양 선교와 장애인 선교에 헌신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퀸즈대학교 의과대학과 뉴욕 벨레뷰 병원의과대학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된 제임스 홀은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하면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던 의사 로제타를 만났고,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로제타가 1890년에 한국 선교사가 되자 그 다음해에 자기도 한국으로 들어왔다.

윌리엄이 평양에서 의료 활동을 하면서 교회를 개척하는 동안 아내 로제타 홀은 여성 전문병원인 서울 보구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일했다. 그러나 윌리엄 홀은 평양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부상자들과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전염병에 걸려 1894년 소천한 뒤 양화진에 안장됐다. 그 이후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로제타 홀은 1897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유복녀로 태어난 딸 에디스(Edith M. Hall 1895~1898)를 아버지 곁에 묻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타 홀은 평양에서 약 20년 동안 헌신하면서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과 여성을 위한 광혜여원을 설립하여 여성과 어린이들을 돌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점자법을 개발하여 광혜여원에서 맹인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고, 1917년부터는 서울 동대문병원에서 일하면서 여자의학원을 설립하여 나중에 경성의학교로 발전시켰다. 이 학교는 훗날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1935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미국 뉴저지에서 소천한 로제타 홀은 화장되어 남편이 묻힌 양화진에 합장되었다.

■ 웰본 선교사는…

프리실라 웰본 여사의 할아버지인 웰본 선교사는 원주, 안동, 대구 등 우리나라의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웰본 선교사는 1866년 8월, 미국 미시건 주 이스트맨빌에서 태어나 매칼레스터대학과 샌프란시스코신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10월, 미 북장로교 해외선교사로 내한해 1년 뒤 1899년부터 조선에서 복음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사라 선교사와 결혼했다. 1909년까지 서울 선교부에서 사역하며 YMCA 설립위원으로 기여하는 한편 철원과 원주 지역 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해에 북장로교 안동선교부 대표 선교사로 임명되어 8년간 안동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안동선교부 개설 당시 60교회, 3,000명이던 안동지역 교세가 1922년에 122개 교회, 7000명 교인으로 성장하는 데는 웰본 선교사 부부의 공헌이 작지 않았다. 그 이후 웰본 선교사는 2년 동안 평양에서 선교하다가 아내의 건강이 나빠져 191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3년 만에 다시 홀로 내한했다. 그러나 대구와 안동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과로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웰본 선교사의 6남매 중 태어난 지 10일 만에 사망한 첫째아들 하비(1903년)와 3살 때 사망한 막내딸 앨리스(1914년)도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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