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진행한 '초기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에서 서울신대 목회신학연구원 원감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가 발제한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어니스트 길보른

박문수 박사어니스트 길보른은 오직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만을 추구하며 1928년 3월 13일 뇌출혈로 죽게 되었다고 전했다.

박 박사는 "그가 죽게 되자 친구들은 '에녹의 경험'(창 5:24)에 비유했다. 어니 부부는 길보른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라고 설명하였다"고 말했다.

이어 "길보른이 소천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동양의 선교사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은행계좌나 1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선교를 위해 수백만 달러가 자신의 손을 통해 보내어졌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내용이었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금식과 기도를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박문수 박사는 "일본에 그의 죽음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기념예배가 열려 2,000명의 일본인들이 참석했다. 그의 집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7명의 지도자들은 사랑의 헌금을 모아 어머니 길보른에게 보냈다. 한국에서도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추도행사를 하였다"며 "어니 부부는 다음과 같이 어니스트 길보른과 그의 후손들이 동양선교의 발자취에 길이 남을 하나님의 종들이었음을 밝혔다"고 소개했다.

"어니스트 길보른이 비록 자기 이름으로 80달라만 남기고 죽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존귀한 유산을 남겼다. [...] 길보른 가의 두 세대는 그의 고상한 이름을 따라 일생 선교사역을 위해 투자했다. 지금 길보른 가의 4번째 세대는 기독교사역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리고, 어니스트 길보른은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속에 살아있다."

박문수 박사는 길보른의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28년 4월 15일 경성성서학원 강당에 100여명의 회중이 모여 그 앞에서 곽재근 목사가 조사를 낭독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그의 증거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결함을 받은 교역자나 신도들은 현격하게 총리나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아버지로 신뢰하고 사랑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깊은 감화를 받은 성도들이 밤낮에 그의 사무를 위하여 또는 그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

박문수 박사는 "그만큼 길보른 목사는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그것은 카우만이 받았던 사랑보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카우만 선교사는 일본이나 미국에 많이 거주하여 한국인들에게는 소문으로만 알려졌으며 길보른은 한국에 있는 성도들과 5~6년간 동거동락했다"며 "1921년 길보른 목사는 한국에 재입국해 5년 동안 한국성결교회의 발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충성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한국에 이주해 와서 한국인들의 영혼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이어 "당시 최석모 목사는'그는 조선의 모든 영혼을 위하여 또는 전 동양을 위하여 불면불휴(不眠不休)하고 기도하였다'고 말하였다"며 " 존 머윈도 풀러신학대학원의 학위논문에서 길보른이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고 소개했다.

"E. A. 길보른은 외면적으로는 첫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니지만 기도의 사람이다. 무쇠와 같은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서 카우만의 둘도 없는 협력자였다. 그러나 때로는 서슴지 않고 직언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한국 최초의 성결교회의 역사책을 저술한 이명직 목사도 길보른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 '선교사업과 모든 영혼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의 생애를 보냈으며'라고 술회하고 있다. 주승민은 이런 점은 '길보른의 기도의 영성이 탁월함'을 보여 준다고 했다"며 소개했다.

박 박사는 이어 "어니스트 길보른과 함께 일해 본 선교사들과 토착민들은 그가 지칠줄 모르는 기도생활을 하였던 것에 감동을 받았다. 동료 선교사가 '나는 아직도 E.A 길보른이 점심 시간에 주님과 교제하며 선교회(Mission Home)의 현관에서 일정하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길보른 형제에게는 낮잠이 없었다. 그에게 점심 이후의 시간은 방해할 것이 거의 없는 때인데, 그는 항상 왔다갔다 걷곤 하였다. 우리는 그가 사역의 진보를 위해 중보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고 증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토착민 전도자 양성'을 그의 사역의 특성으로 소개했다. 그는 "카우만과 같이 길보른은 선교사의 우선적인 과제는 토착민을 훈련하는 것이었다"며 "100명의 선교사들이 그(카우만 형제)의 기도의 제목이었다. 우리가 선교사들이 백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계획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 그런 기도들이 응답되었으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백인 선교사? 그렇다. 그러나 다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 [...]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계신다. 그 응답은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으로 구성된 1,000명의 선교사들이었다. 우리가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는 어니 부부의 글을 인용했다.

또한 "어니스트 길보른은 1925년에 『동양을 위한 토착민 목회』( A Native Oriental Ministry )라는 제목의 10쪽 분량의 소책자를 발행하였다. 이 글은 선교정책을 다룬 것으로서 어니스트 길보른의 선교정신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며 소개했다.

"선교사 파송은 모든 선교단체가 존재하는 참 목적이고 강조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선교단체는 긴 선교사 명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를 받으려 한다."

박문수 박사는 "그러나 그는 참된 선교사의 정의를 통해서 선교사의 기본자격을 강조하였다"며 이어 그의 글을 인용했다.

"선교사란 무엇인가? 그는 종교를 선전하도록 선교를 위해 보내어지는 사람이다. 첫째로 그것은 피부색깔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색깔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고 가는 사람이다. 우리 동양선교회에는 미국사람도 영국사람도 있다. 둘째로 중요한 주제는 그가 파송된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파송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고 파송하는 목적의 입안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선교회를 파송한 자가 있고 인간이든 신이든 파송세력이 있다는 말이다. 셋째는 선교사는 반드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종교를 선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문수 박사는 "동양선교회의 정책은 토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동양선교회는 토착민 목회(a native ministry) 훈련을 착수하고, 백인 선교사들은 전도자를 양성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며 "토착민들은 백인 형제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기 백성에게 잘하고 낫게 할 수 있다. 우리 세대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 토착민 목회를 훈련하는 것이다. 인종적 편견 때문에, 일본사람들에게는 일본인 사역자들이 가고 한국사람들에게는 한국인 사역자들이 가고 중국인들에게는 중국인 사역자가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째, 토착민 목회를 훈련한다고 하면 그것은 신학훈련이 아니라 동양선교회의 학교들은 오직 성서훈련원(Bible Training Institute)이다. 하나님의 말씀훈련과 성령충만을 훈련한다. 그들을 불타는 전도자로 만들어서 자기 백성에게 가게 하는 것이다"며 "둘째는 토착민 목회를 위해 재정과 비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토착민 설교자와 가정을 후원하는 것보다는 한 선교사 가정을 유지하는데 5배나 비용이 든다. 예를 들어, 토착민 가족을 위해서는 25달라가 든다면 선교사 가족을 위해서는 125달라가 든다. 이 일에 관련하여 우리는 선한 청지기 정신을 가져야 한다"며 "셋째는 선교사의 언어학습 문제가 중요하다. 선교사는 동양어를 2-4년동안 공부해야 한다. 이것은 토착민 목회보다는 시간낭비가 될 수 있다. 토착민 전도자는 언어 공부에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한 "선교에 있어서 적합성과 적응력의 문제가 중요하다. 선교사들은 토착민들에게 쉽게 동화될 수 없다"며 "사람들이 많은 백인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설교하지 않으면 복음을 들 수 없을 것이라는 그런 가정은 기본적으로 잘못이다. 대부분의 회심자들은 토착 전도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선교사보다 토착민이 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고 전했다.

박문수 박사는 길보른 선교사의 한국사역을 소개하며 "존 토마스 목사가 1919년 3월 기미년 독립운동의 피해조사 차 강경교회에 시찰갔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일경으로부터 구타당해 병을 얻게 되었고, 1920년 2월 일본 경호원이 호놀롤루까지 보호하는 가운데 귀국하였다. 그 사건 이후 이듬해에 영국인 윌리엄 헤슬롭이 한국감독을 맡았는데 그의 부인이 병을 얻어 곤란을 겪자 1년 뒤 귀국하게 되었다"며 "이후 길보른 목사가 1921년에 조선 감독의 임무를 겸직하여 내한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5년 동안 봉직하여 한국성결교회의 발전에 충성하게 된다"고 했다.

이후 길보른은 1924년에 초대 동양선교회 총재 카우만이 소천하자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 제2대 총재에 부임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E. L. 길보른은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여러 해 동안 선교하다가 동양선교회 부총재를 역임하기도 했으며, E. L. 길보른 선교사의 두 아들 에드윈과 엘마 형제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중국이 공산당에게 점령당하자 1949년 한국에 돌아와 선교활동을 계속했다고 박문수 박사는 소개했다.

또한 한국 선교에 있어 길보른이 남긴 큰 발자취로 「활천」의 창간을 꼽았다.

박문수 박사는 "1921년 4월부터 교회발전에 도움이 될 것을 대화하는 성격의 제1회 간담회에서 교단기관지 창립이 논의되어 장로교의 「신학지남」, 감리교의 「신학세계」와 같은 교단지를 위한 내규를 제정하고 명칭을 「활천」(活泉, 산샘)으로 정해 1922년 11월 25일 창간호를 발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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