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진행한 '초기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에서 서울신대 목회신학연구원 원감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가 발제한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찰스 카우만(좌)과 어네스트 길보른(우).   ©pasteve.com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어니스트 길보른 가족은 1902년 8월,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다. 이대부터 어니스트 길보른은 동양선교회 부총재로서 카우만 선교사를 도와 일본선교를 위해 온 힘을 쏟게 된다.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 길보른은 선교사 주택이 아닌 도쿄 주변의 시골에서 토착민의 집에서 살고자 하였다"며 "카우만은 이 요청을 동의하여 보내주면서 다음의 충고를 하였다"고 설명했다.

"기억하세요. 공부만 하는 것입니다. 언어를 공부하지 않고는 설교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언어공부에 있어서 당신의 진보를 방해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박 박사는 "길보른은 일본어를 배우는 지름길은 곧 일본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1903년 4월 동경 북쪽에 있는 우쯔노미야(Utsunomiya)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 직접 지방전도관을 세웠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집은 교회가 되 었다. 새신자들을 양육할 필요가 있었고, 1주일에 14번 정도로 예배와 모임을 가졌다"며 "어니 부부(Edward and Esther Erny)는 '길보른 가족은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배웠다'라고 묘사했다"고 했다.

또한 "길보른 가족은 전형적으로 볏집으로 이은 지붕을 가진 토착민 농가에서 살았다. 거기에서 그들은 일본사람들의 스타일로 생활하도록 적응하였다. 길보른은 일본인들과 같이 살면서 일본인들에게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특히 주위에 많은 젊은이들이 운집하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 구루마다라는 젊은이는 훗날 일본 성결교 회의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며 "그는 일본선교에 직접 뛰어들어 불철주야 활동하면서 일본선교를 위해서는 미국 선교사의 수를 늘리지 말고 일본인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선교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토착민 사역이 해결책'이라고 언급하였다"고도 소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어니 부부의 'No Gurantee But God'에서 소개된 복음전도관과 성서학원의 사역을 설명했다.

"[첫째는] 복음전도관(a Gospel Mission)을 여는 것인데, 여기서는 일년 내내 매일 저녁 그리고 주일에는 두세번씩 장년집회와 어린이집회를 등을 열어 순복음을 전하려고 한다. [둘째는] 젊은 회심자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하여 성서학원(Bible Training Institute)을 세우는 것인데 여기서는 신시내티의 성서학원과 같이 '구원의 도' '성경의 종합적 연구' 특히 신약성경을 평이하게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동시에 개인전도법과 같은 과목을 실습하는 실습반을 만들 것이다. [셋째는] 이 학생들이 전도를 위하여 준비되면 이들은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시골지역에 파송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특별한 목적은 이 사역자들이 온전히 구원받고 성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박문수 박사는 "이처럼 성서학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령충만한 사역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며 "어니스트 길보른이 일본에 도착한 이후 10년 만에 최초의 '대거부락전도운동'의 형태를 하나님께서 어느날 아침 그들에게 보여주셨다"고도 했다.

"'불가능한 것'이라고 적[사탄]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6천만 인구의 이 제국의 수백만 가정들을 생각하라. 끝없는 뒷골목들이 있는 혼잡한 도시들을 생각해 보라. 여기저기 가로질러 있는 큰 산들을 보라. 깊은 내륙에 있는 셀수 없는 마을들로 우송되는 인쇄물들을 생각해보라.

6천만의 인구를 생각할 때 불가능하며, 끝없는 소로들을 지닌 복잡한 도시 들은 생각할 때 불가능하며, 사방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을 생각할 때 불가능하지 않는가? 오지에 펼쳐진 셀 수 없이 많은 마을들에 전도지를 전달할 것을 생각할 때 불가능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중략] '불가능' 그 자체가 아닌가? 이런 물음에 대해 길보른 목사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그는 담대함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내가 지닌 모든 것은 물론 그에게 속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한 그는 자기 아내의 결혼반지마저 선교사역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한 자기부정의 사람이었다." - Edward and Esther Erny, No Guarantee But God

이어 박문수 박사는 "그는 호주머니에서 그가 가진 전부인 5달라를 꺼내어 성경을 열어 '너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 16:15)는 구절 위에 얹어놓았다. 어니스트 길보른은 겨우 생활 필수품만 남기고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했다. 그는 값이 비싼 금시계를 싼 것으로 교환했다. 저금액은 모두 선교에 썼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같은 이유로 결혼반지를 헌물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생명보험도 포기했다"며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자기부정의 삶을 실천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기 부정의 사람이었고, 선교 동역자인 것을 증명했다. 그가 전신회사에서 책임적인 지위에 서게 될 때 그는 넉넉한 옷장을 가졌지만 선교사 로서의 그는 한 벌 옷만을 입었다. 주중에 그는 단추를 풀어 입었지만, 주일에는 변화를 주어 단추를 채웠다."- Edward and Esther Erny, 위와 같은 책 55쪽

박문수 박사는 대거부락전도운동에 대해 말하며 "일본 전역에서 6년 동안 당시의 화폐단위로 30만환을 사용하면서 가가호호 축호전도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선교이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고 소개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가슴에 지니고 복음수용에 아주 용이한 일본의 수백만의 영혼들에게 가야한다. 일본제국 내의 모든 지역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없다. 일본의 어떠한 장소도 철로에서 50-60마 일이 넘지 않는 범위 내에 위치한다. 철로가 놓여있지 않는 작은 마을이 있더라도 교통수단이 분명히 있었다. 그와 같이 유리한 조건 때문에 이 조밀하고 아담한 제국은 이 세대가 다 지나기 전에 충분히 복음화 될 수 있다." - 주승민 박사, 'E. A. 길보른의 현대적 이해: 선교사가 된 전신기사'

그러면서 "길보른은 일본에 도착하여 아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많이 있음을 발견했다. 일본은 일찍이 복음이 들어왔지만 하지만 기존의 선교사들은 주로 도시에서 사역을 했다. 그들은 시골의 오지에 가기를 싫어했으며 복음을 전하기보다 도시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서 서구문명을 전달하는데 주력하였다. 심지어 동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골도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지역이 많았다"며 "이것은 일본사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도시에서 살기를 원했고, 도시생활을 즐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선교의 본질은 영혼구원이라고 믿고 특히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을 복음화하려고 계획했던 것이다"고 했다.

이어 "어니스트 길보른은 1917년 10월 31일 최초로 일본 성결교단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사중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나 카우만과 나까다 쥬지의 중재역할에 있어서도 잘 감당했던 화해의 일꾼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카우만과 길보른은 대거부락전도운동(the Great Village Campaign)을 통해 전 일본 국토를 순례하며 전도했다. 그때 카우만의 병세가 악화되어 치료하기 위해 1917년 11월 3일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선교지는 길보른에게 맡겨졌고 결국, 카우만은 1924년 9월 14일, 향년 5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덧붙여 "한국과의 첫 번째 접촉은 두 명의 한국인 신자(김상준과 정빈)들이 동경성서학원에 찾아오면서부터 이루어졌다. 그들은 색다른 바지정장을 하고, 갓을 쓴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더 나은 준비를 위해 그곳으로 인도하셨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좀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에 대하여 배우기 위하여' 동경성서학원에 온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구원의 목회에 대한 실제적인 훈련을 받고자 하였다"며 "카우만과 길보른은 이것을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한국에 진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호로 해석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방식이 한국에서도 역시 적용되었다. 한국성결교회 초대 감독인 존 토마스도 가세하였다"며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위해 값을 지불했다. 그들은 서울 도심에서 부동산을 구입하고 전략적인 장소에 성서훈련원을 세웠다. 그 신학교로부터 목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도록 파송되었다"고 했다.

또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십자군전도대(The Every Creature Crusade)가 한국에서도 조직되었다. 다시 하니님은 뜨거운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의 전염성있는 간증에 복주셔서 생명의 말씀을 가가호호 전하여 3천만 인구의 4분의 3이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며 "1969년 당시에 동양선교회는 한국에서 600개 교회와 16만 5553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1931년 일본의 동양선교회 소속 교회는 완전히 자립하게 되어 선교회의 본부가 한국으로 이전했고 어니스트 길보른은 한국사람들을 동일한 뜨거움과 관대함으로 대함으로써 일본사람들처럼 한국인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호주성산성결교회 임운규 담임목사는 '한국 성결교회의 개척자 김상준과 정빈: 성결교회 백주년 기획 기고3'(크리스천투데이)라는 신문 기고에서 "김상준은 1881년 평남 용강군에서 경북 의성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903~1904년경 평양시내에서 노방전도대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와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의 '조선의 봉사제를 폐하여' 집안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 일로 인하여 부친(김상붕)은 매질도 하고 문중회를 열어 설득도 하였지만 듣지 않아 결국 '불효 자식'이라 인정하고 하인에게 멍석말이를 시켜 들에 내다 버리게 하였는데 그 하인은 상준을 문중 사람들 몰래 풀어놓아 피신케 하였다"며 "1905년 초, 고향 용강에서 피신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학공부를 하기로 하고 도쿄 가시와끼에 있는 도쿄성서학원을 찾아가서 입학을 하였고, 4월부터 정빈과 함께 1학년으로 공부한다. 1906년에는 이장하가 입학하여 세 한국 학생이 공부했다"고 소개했다.

또 "정빈의 정확한 출생일은 알 수 없으나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전해진다. 정빈은 10세부터 고향에서 예수를 믿었고, 1905년 일본 도쿄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동기 김상준과 함께 학업했다"고 했다.

박문수 박사는 "한국에서 복음전도관은 1907년 5월 2일,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과 함께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다"며 "김상준과 정빈은 전도관을 열기 위하여 서울의 번화가인 종로 염곡에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세를 얻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시작했다. 그리고 건물매입을 위해 5천달라가 필요하다고 기도부탁을 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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