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는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가 지난달 25일 진행한 '초기한국성결교회 인물연구 프로젝트'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에서 서울신대 목회신학연구원 원감 박문수 박사(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가 발제한 '어니스트 길보른(Ernest A. Kilbourne)의 생애와 선교사역'을 10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박문수 박사는 "1902년 8월, 요코하마 항에 어니스트 길보른 가족이 도착한다는 소식은, 1년 전인 1901년 2월 21일 일본에 도착하여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을 시작했던 카우만 부부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며 "이때의 흥분되고 기대감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레티 카우만은 『동양선교회 창립자 찰스 카우만』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 찰스 카우만(좌), 어네스트 길보른(우)   ©pasteve.com

"찰스 카우만은 동료사역자를 필요로 했으며, 돕는 자요 진정으로 짐을 나누어질 자로서 어니스트 길보른을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일으키셨다. 요코하마에 도착하는 증기선에 길보른 형제와 그 가족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행복한 날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날은 그리스도께 첫 영혼을 인도한 날이었다. [중략] 그들은 완전히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고 최고의 팀이 되었 다. [중략] 그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사랑과 죽어가는 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니 '완벽하게 한 마음으로 합쳐졌다' 그들은 연합된 헌신을 깨지 않고, 4반세기 동안 같은 길을 걸었다."

박 박사는 카우만 부부가 1901년 2월에 일본을 떠난 후, 길보른은 "하나님께 대한 약속을 다 지킬 때까지 함께 가기를 거절하고 남아서 일을 계속했다"며 "어니스트 길보른이 회심했을 때 하나님께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는 전신회사에 근무할 때 무료승차권을 남용한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사에 완전한 재정적 보상을 하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시기에 그는 전신기사선교단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했다"며 "이듬해에 그는 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성령께서 감동하신 대로 '마음과 생활의 거룩'을 실천함으로써 온전함을 얻고자 했던 성결한 믿음의 실천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 박사는 "드디어, 어니스트 길보른은 자주 출석했던 교회가 그들에게 충분한 후원을 약속 했기에, 아무런 걱정없이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예약하려고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그러나 막상 후원을 약속한 교회로부터 출발 직전 그 약속이 취소되었ㄴ다는 전보를 받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내분에 빠져 후원서약이 취소되었던 것이다"며 "그러나 이 소식에도 길보른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나는 하나님께서 일본에 가는 것을 원하신다고 확신한다'고 다짐하며 '신앙선 교'(Faith Mission) 정신을 강조했다. 또한 아내에게는 '나는 물[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소!'라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소개했다.

길보른은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재정적 필요까지 공급하신다고 믿었던 것이라고 박문수 박사는 설명하면서 "박명수는 이런 신앙선교 정신은 '냅을 비롯한 하나님의 성서학 원의 영향력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며 "드디어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석탄을 연료로 한 증기선인 일본선박 니뽄 마루(Nippon Maru) 호에 승선하여 24일만인 1902년 8월에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한국성결교회성장사'는 길보른 가족이 처음 4일동안 세찬 폭풍우로 인한 배멀리로 고생했으나 24일간 바다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많은 일본사람들을 생각하며 식사시간에도 승무원들과 함께 무릎을 맞대고 식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한다"며 "여행의 마지막 구간은 도쿄 역으로 가는 덜컹거리는 협궤 열차를 타는 것으로, 거기에서 그들은 그림 같은 인력거에 올라타고서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카우만의 집에 도착했다. 당시에 어니스트 길보른은 지갑에 단돈 5달러만 남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카우만은 일본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나까다 쥬지 목사와 함께 '예수 교복음전도관'(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란 간판을 내걸고, 성서학원과 함께 복음전도관 운동을 시작했다"며 "카우만의 초청을 받은 어니스트 길보른은 이제부터 동양선교회 부총재로서 카우만 선교사를 도와 일본선교를 위해 온 힘을 쏟게 된다. 이들은 평생을 '선교의 동역자'로서 함께 하였다"고 전했다.

박 박사는 " 카우만과 나까다가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양의 학생들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카우만 부인은 1905년 4월 이들 중국과 한국학생들을 통하여 아시아에 선교하려는 (구체적인) 비전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며 " 카우만과 길보른은 나까다 쥬지와 함께 '동양선교회'를 설립하였는데, 그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서적 성결'의 선포에 있었다. 그들은 마틴 냅(Martin Knapp)이 조직한 만국사도성결연합(the 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Union)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여 일본에서 그들의 사역을 위한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냅은 일찍부터 세계선교에 대한 꿈을 가져왔고, 그런 선교를 위해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 세례로 성화되고, 성령의 은사로 능력 충만한 사역자가 필요했다. 이런 사역자들을 양성하 고자 성서학원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00년에 하나님의 성서학원을 세웠고, 이 학교는 20세기 초 성결운동에서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이다"며 냅의 방식을 소개했다.

또한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은 여러 해 동안 만국사도성결연합 후원자들이 가진 주된 관심의 하나였으며, 비록 동양선교회는 분리 조직의 하나였지만 동양을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하나의 출구로서 고려되었다"며 "어니스트 길보른은 1910년 경 동양선교회를 시작할 때 만국사도성결연합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감사를 표했는데,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자유로운 헌금으로 도왔기 때문이다"고 전했다.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는 만국성결연맹이 발행하는 신앙잡지 「하나님의 부흥사」 ( God's Revivalist )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자신들의 사역이 소개되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며 "그렇지만 동양선교회는 독립선교단체이었고, 만국성결연맹 은 동양선교회의 사역에 간섭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동양선교회'라는 명칭이 처음 나온 것은 나까다 쥬지가 발행하는 「불의 혀」( Tongues of the Fire ) 1905년 4월호이었지만, 동양선교회라는 명칭과 조직이 확정된 것은 1905년 11월이었다. 동양선교회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이다"며 "동양선교회가 조직된 지 다음 달인 1905년 12월, 일본어로 발행된 「불의 혀」에는 동양선교회의 성격과 목적 그리고 교리와 전도방법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며 그 내용을 소개했다.

"[동양선교회는] 동양 여러 나라에 순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라 안팎의 성도들로부터 조직된 단체입니다. 종래의 성서학원과 그리고 각지의 복음전도 관은 본회에 부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본 또는 외국에 있는 어떤 단체, 그리고 어떤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 박사는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웨슬리안 계통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며, 아울러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복음주의 신앙 위에 세워졌다고 밝히고 있다"며 '교리'에 대한 나까다 쥬지 목사의 소개를 인용했다.

또한 복음전도를 강조하며 불신자는 물론 기존 신자라도 온전한 신앙을 갖지 못하거나 사중복음을 알지 못하면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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