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 담임 및 평택샬롬나비 문화예술위원장)
박종서 목사(양지평안교회 담임 및 평택샬롬나비 문화예술위원장)

극장에서 관객들은 예술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모든 방어를 내려놓는다. 이들은 기꺼이 몸으로 감정의 범람을 허락하고 격렬한 흥분을 느낀다. 관객은 연주자의 욕망의 자리가 되고 연주자는 관객의 ‘이상화’를 삼킨다. 그럼에도 ‘극장문화’는 사람들의 격을 올려주고 인간의 욕망을 포장하거나 완곡하게 표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극장에서는 종종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건드리거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섬뜩함이 일어나지만 결국 적당한 타협을 만든다. 이것을 ‘히스테리’ 문화라고 한다. 히스테리는 원래 트라우마의 억압이 실패해 다른 곳을 비집고 나와 대체되는 것이다. 이 때 노골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우아하게 포장한다. 화끈하게 어디 가서 키스하는 것 보다 우아한 곳에서 비싼 커피한잔 마시며 격이 있게 노는 것이 히스테리다. 음악회는 바로 이러한 충족을 주는 격조 있는 문화행위다. 그리고 극장은 이런 히스테리 문화를 표출하는 곳이다.

나는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 마다 내안에 이런 히스테리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 분의 설교가 시작되면 나는 설교 내용과 관계없이 수 분 안에 그분의 음성과 분위기에 압도된다. 한번은 사랑의교회에서 옥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왜 내가 목사가 되어서 이 고생을 하지? 나도 이런 좋은 교회에 나와서 좋은 설교 듣고 그냥 평신도로 살걸....” 하는 후회에 잠긴 적도 있었다. 그분의 설교는 항상 웅변적이었고 감동적이다.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설교에 도입부는 피아니시모로 시작되면서 오르락 내리락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나아간다. 중간 중간 스포르짠도(외적 강도가 아니라 의미의 강도)가 나타나면서 역동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직은 클라이막스가 아니다. 적설한 성경인용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이 클라이막스를 때릴 때, 회개와 결단이 일어난다. 사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옥 목사님의 설교는 베토벤의 음악과 거의 흡사하다. 죄책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다가 다시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베토벤의 음악은 옥 목사님의 꾸지람(율법)과 감쌈(은혜)의 설교와 닮아 있다. 베토벤의 인간적 고뇌와 상념의 폭이 넓고 깊고 다양하듯 옥 목사님의 설교도 그렇다. 베토벤의 음악은 항시 웅변적이어서 종지부에는 모든 악기가 폴테시모(ff)로 꽝, 꽝하며 종결을 알린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몇 번씩 꽝, 꽝하다가 나중에 길게 꽈앙~~하면서 아쉬운 연주를 마감한다. 옥한흠 목사의 설교도 그렇다. 언제나 웅변적이다. 물론 교회에서 일어나는 결단과 감동을 극장 문화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문화의 영역으로 너무 깊게 들어가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권면은 성도들에게 모욕으로 들릴 수 있다.

‘옥한흠 목사님이 살아계셨다면 현 시국을 어떻게 보았을까?’ 라는 주제로 옥목사님의 과거 설교의 일부가 편집되어 SNS를 떠돌아다닌다. 그 내용은 로마서 13장1, 2절의 말씀을 강해한 것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좋은 지도자든 나쁜 지도자든, 무능한 지도자든, 부패한 지도자든 그 권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그 권세의 존경을 표해야 한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했던 말씀과(빌라도의 권위가 위에서 왔다는)태도가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라는 미명하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며 통치자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어떻게 부모와 스승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들에 대한 도전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을 침해하는 죄다.” 라는 것이 옥 목사님의 설교 요지다. 이러한 내용에 리듬이 들어가고 고저(高低), 액센트, 크레센도와 디크레센도가 조합된다. 특히 클라이막스에 다다르기 전, 점점 빨라지는 템포는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헐떡이게 하며 정신없이 빨려 들게 한다. 이 때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고 설득당해 “신앙인들은 무조건 권위에 복종해야 해! 권위에 불순중은 곧 하나님에게 대한 거역이야”가 저절로 세뇌된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이게 뭐지?" 하고 설교를 새김질 해보면 결국 십자가는 예배당 안에서만 적용이 되고, 나올 때, 이 세상의 불의와 공의를 위한 십자가의 영성은 마음 안에 억압해 두고 순한 양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골방에서 나의 경건만 유지하면 된다. 예배당에서 현실로 나올 때 극장의 히스테리 문화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지 십자가의 말씀을 가지고 나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손에 넘겨져 부조리한 죽음을 맞는 것은 하나님이 빌라도에게 준 권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하나님의 뜻과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거절하고 일본의 권위에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부조리위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수 있지만 부조리에 침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볼 수 없다. ‘독일루터복음주의 연맹’은 히틀러의 권위에 순종해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다. 이 침묵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도둑질을 시킨다고 물론 아버지의 권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나쁜 아버지도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상식’이다. 때로 상식이 더 ‘상위법’이 될 수 있다. 아버지에게 침묵하고 저항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상식’과 ‘일반은총’을 통해서도 자신의 일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상식이고 일반은총의 영역이다. 하나님이 시민의 함성으로 일하고 계신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수구보수 기독교는 침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함성을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병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은 ‘거짓자기’다. 성경 어느 곳에서 거짓으로 살라고 말씀한 곳은 없다. 옥 목사님의 ‘경건의 영성’과 ‘기도의 영성’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들을 골방의 영성에 가둠으로 불의에 침묵하는 성도들로 만들었다. 성도들은 순한 양이 되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엄청난 공격성이 억압된다. 이 억압된 에너지를 유아적 성도들은 자신 안에서 다루지 못한다. 결국 이 공격 에너지는 교회와 사회로 투사되어 교회를 분열시키고 사회적으로는 종북 빨갱이와 수구보수의 이원적 논리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히스테리의 특징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 형태에서 몽롱하게 머무는 것이 히스테리의 특징이다. 건강한 사람은 단지 극장 안에서만 이것을 체험하고 극장을 나온 후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병자는 온 세상을 모두 히스테리화 한다. 이것이 바로 유아의 특징이다. 유아는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좌와 우’ 등의 이분법적 구분으로만 세상을 본다. 때문에 유아의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엄마의 품과 힘 있는 아버지다. 아버지에게 야단맞고 엄마 품에 안기는 이것을 반복하면서 유아는 힘을 얻어 결국 세상으로 나간다. 그러나 병적 히스테리는 영원한 유아다. 절대로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엄마 품만을 찾는다. 이들은 어떤 깊이 있는 체험이 그들의 삶을 흔드는 것을 경계한다. 혹 이런 자극이 있다고 할지라도 극장 안에서만 일어나야지 극장 밖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옥 목사님은 일반은사도 기독교적 영성도 천부적인 귀재이시다. 그러나 이 영성들은 때로 감성과 혼동을 일으킨다. 성도들은 ‘좋은 설교’를 ‘좋은 예술’로 받고 여기에 머물려 한다. 에스겔은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겔33:32) 라고 말씀한다. 성도들은 설교를 사랑의 노래, 좋은 연주로 듣지 그것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려 하지 않는다. 감동적이고 예술적인 설교는 설사 그 내용이 복음적이고 십자가의 영성이 묻어 있다 할지라도 일반의 영성으로 희석되거나 성도들이 유아에 머물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교회가 성도의 자율성을 도둑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좋은 설교, 감성적인 설교는 성도들을 극장의 문화에 가두고 누군가를 우상화하여 살아가는 팬으로 전락하게 만들 수 있다. 수구 보수교회는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사역만으로도 너무 정신이 없는데 교회 밖으로 성도들을 내 모는 것이 사치한 일이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핑계에서 나와야 한다. 보수 기독교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도록 균형을 맞추어 주어야 한다. 보수기독교가 건전한 보수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보수교회의 상징인 옥 목사님과 같은 ‘극장문화’의 우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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