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상무 박만규 목사

오늘 성경 말씀 중 복음서에 나오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는 게네사렛입니다. 마가복음 6장 53절에 나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과 더불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 기적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많은기적을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과정에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으로 빵을 먹은 것에 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막 7:2-5)

예수님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과 식사만 할 뿐 아니라 가르침도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선교활동을 정결의식을 꼬투리 잡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당시는 자기의 성결을 더럽히는 것이 장로들의 전통이었으므로 겉으로는 당연할 수 있는 문제 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고르반 예식을 예로 들면서 전통과 교리를 내세워 불효까지 합리화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그리고 더러운 것은 사람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것(막 7:15)이라고 하시는 지난 주일 민영진 박사님께서 설교 말씀을 통해 정리하신 "악덕목록"(기독일보 20018. 9. 4. 게재)을 오늘 말씀에서도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마가는 길고 긴 정결 논쟁을 통해서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도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묻고, 예수님은 선교활동에서 (정결치 못하다고 생각하는)이방인들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은 참으로 더럽고 유대인은 깨끗한 생각 그 자체가 더 더러운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도 이 말씀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마가는 7장 2절에 부정한 손 얘기에 이어 부정한 귀신 들린 여인의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사람의 마음속 더러운 생각이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과 여인의 딸의 부정한 귀신들린 것과 연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여인이 간청하는 딸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환자를 의사에게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 이상하게 예수님께 아프다는 딸을 데려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집을 방문하시든지 그런 얘기조차 없습니다.

교회 현관에 꽃을 두었는데 밤에 쌓였던 향기가 아침까지 진동합니다. 이처럼 진리는 버려두어도 꽃향기처럼 자연스럽게 알려집니다. 예수님의 행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 땅에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이 여인은 예수의 발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딸의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는 확신가운데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악한귀신'은 개역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귀신'은 객관적 실체라기보다 인간 내면의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안에 욕심이 바로 귀신의 실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태에서 구원과 자유를 선포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영'과 '악한 영',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 내면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이 사람을 더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쁜 영의 목록을 보면 '음란', '악의', '방탕' '악한 시선'과 '교만과 어리석음' 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는 발 앞에 엎드린 여인의 아픔을 잘 아셨을 것입니다. 여인은 이방인 세대를 상징합니다. 혈통은 그리스 사람으로 시로페니키아 출신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에게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혈통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예수님의 반응은 여인의 간절한 요청에 매우 차갑습니다. 귀신을 내쫓으려면 안수 기도를 하든가, 귀에 손을 넣든지, 혀를 넣든지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집에 가실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자녀를 배부르게 하는 게 먼저라고, 유대인은 먼저고 이방인은 나중이라고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빵을 던져서 개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하십니다.

이방여인을 개에 비유했으니, 이방여인의 딸은 강아지로 취급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전형적인 유대인으로 돌변하신 모습니다. 바리새파의 생각을 그대로 말씀하십니다. 불쌍한 여인을 다시 발길질 하는 형국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의 반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모습을 전한 마가가 여인의 혈통을 언급한 것은 이 여인은 아마도 상류층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잘난 여인, 잘난 맛에 사는 여인이 지금은 예수님 앞에서 엎드러져 있습니다.

이런 간청을 건드려 보는 예수님의 의도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뜻을 간파하고 그 말 너머의 말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개'라는 표현을 덥석 물었습니다. "상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 정도면 예수님의 마음이 흡족하시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에수님은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서 바짝 엎드렸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생각하면 혈통이 신분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어미의 절박함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회개와 거듭남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병든 딸을 위해서 강아지 엄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당당하게 제가 개라면 강아지라면, 강아지의 몫을 제게 주십시오. 그렇게 당당히 예수님께 청구했습니다. 그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다시 데려오지 않았지만, 그 딸은 즉각 치유되었습니다.

그 어미가 달라진다면 자식도 달라졌겠습니다. 개가 되고 엎드려 거듭난다면, 그 딸을 사로잡는 더러운 귀신도 내쫓김 받는 것 아닌가 라는 마가의 선언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후속 세대가 더러운 귀신 들린 상태에서 구원을 받은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천민자본주의의 후예로 살아 왔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동안에 우리 자녀들은 더러운 자본의 영에 매여 귀신들린 노릇을 하게 된 것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마저 이런 노릇을 하는 것 아닌지 참담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지난 주말 한겨레신문은 1면에서 '명성교회 세습 문제'를 다뤘습니다. 기자는 기사의 첫 머리에서 부터 '교회는 누구의 것'인가 하고 묻습니다.

기사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명성교회>는 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2014년 아들에게 <명성교회>와 10분 거리에 떨어진 하남에 <새노래 명성교회>를 지어주고 성도 600명을 보냈다. 그러다가 금년 3월에 합병했고, 지난해 12월 12일에는 그 아들이 위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그러나 통합총회 재판국은 8대7이라는 표결로 <명성교회> 세습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결과에 장신대학생들은 동맹휴업, 1000여명에 달하는 목회자들은 반대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순결함을 위해서 세습은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합교단의 세습방지법은 2014년에 만들었다. 그러나 총회재판국은 '은퇴하는 목사는 세습이 안된다'는 금지조항이 이미 2015년 은퇴를 한 뒤 2년이 지났으므로 금지조항의 '은퇴하는'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또 지난 달에는 <아세아 연합신학대> 총장을 지낸 김세진 목사는 명성교회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이어 받았다면서 교회는 원래 세습으로 이뤄진다고 설교했다. 명성교회측은 실력이 있는데 아들이라서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교회는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전하면서 차정식 교수(한일 장신대)는 양적으로 급성장한 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주의 말씀이라면서 이 세대가 추구하는 가치는 명예와 돈과 권력을 쫓는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말합니다.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말씀을 통해 다시 봅니다.

예수님께서 사로잡힌 악한 귀신으로부터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것에서 해결 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을 외면한 채 입으로만 성령 충만을 외치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악한 영으로부터 사회와 우리가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바라보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는 지난 2018년 9월 9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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