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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예배' 공동체 공동설교자 민영진 박사

◈예레미야의 소명(召命) (렘 1:4-10)

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7 그러나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8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렘 1:4-10)

◈나가사키의 역사와 엔도의 생애: 초월체험(忿怒와 殉難)

2011년 8월 초순에 나흘 동안 나가사키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13회 동북아기독작가회의 모임이 거기에서 있었습니다. 오쿠노 마사모토(奧野政元)라고 하는 일본 작가의 주제 강연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기독교와 나가사키(長崎)와 엔도 슈샤쿠(遠藤周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오쿠노 마사모투(奧野政元), "기독교·나가사키(長崎)·엔도 슈샤쿠((遠藤周作)". 13회 동북아기독작가회의(東北亞基督作家會議)(2011년 8월 나가사키) 주제 강연. 우리말로 번역된 강연 내용은 '월간 창조문예' 2011년 9월호에서 볼 수 있다). 주제 강연 강사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회고하면서 "히로시마의 분노(憤怒)""나가사키의 기도(祈禱)"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일본어 표현으로는 "분노의 히로시마" "기도의 나가사키"). 저는 이 두 표현이, 그날 주제 강연을 맡았던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의 것인지, 그가 인용한 피폭자 중 한 사람인 가톨릭 신자 나가이 기요시(永井潔)의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가사키에서 활동한 그곳의 세계적 작가 엔도 슈샤쿠의 것인지, 혹은 일본인들 사이에 "흔히" 잘 알려진 개념이었는지 더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에 나타난 기독교와 나가사키의 가톨릭 수난사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이 세 가지를 관련시켜 설명하는 강연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의 분노(憤怒)""나가사키의 기도(祈禱)"라는 표현이 나가사키의 기독교 역사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반원폭운동(反原爆運動) 사이에, "미묘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보인다"고 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는, 히로시마 원폭 중심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의 비석(碑石)에는 "편히 잠드소서, 과오는 되풀이 하지 않을 테니"라는 비문(碑文)이 있는데, 이것은,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에 의하면, 원폭투하는 지진이나 홍수 따위의 자연현상으로 생기는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자행된 것으로서, 인도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미국의 반인륜적인 잔학행위(殘虐行爲)였고, 피해자 측, 곧 일본 측에서 말한다면, 우선 그에 대한 미국 쪽의 책임을 분명히 하여, 그러한 피해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계적으로 호소해야할 사안임을 적시(摘示)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가사키의 원폭 중심에 조성된 공원의 한 비문에 적힌 "원폭순난비(原爆殉難碑)"에서 "순난(殉難)"이란 표현은, "순교(殉敎)"나 "순사(殉死)"로도 사용되고 있는 점에서, "어떤 사안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하면서,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국민이 당한 재난이나 고난에 대해서는 일본 국민이 스스로 긍정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제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통역에게 정말 잘 통역한 거냐고 확인까지 했습니다.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는 일본에 투하된 원폭을 말하면서 "피폭에 이르는 본래의 원이이라고도 할 수 밖에 없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戰爭)에 대한 책임, 특히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행한 침략행위(侵略行爲)라는 가해자(加害者)의 책임(責任) 문제도 동시에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할 때,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일본 작가가,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저지른 이러한 역사적 범죄 사실을 받아들일 때에만, 일본이 이 세계 안에서 "평화와 화해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고 할 때, 저는 순간,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상기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저는 일본 교회의 "성숙(成熟)"한 교인 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인해 일본국민이 당한 재난을 일본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행한 침략행위라는 가해자의 책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이해, 일본제국주의의 전쟁과 침략이라는 범죄에 대해 나가사키의 일본 국민이 희생제물이 되었다고 하는 이러한 이해를 일본 기독교의 "성숙(成熟)"이라고 말했습니다만, 나가사키의 "원폭순난비(原爆殉難碑)"를 해석하는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는 이것을 "나가사키와 엔도의 초월체험(忿怒와 殉難)"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일본이, 나가사키가, 그리고 엔도 슈샤쿠 같은 작가도 이질적(異質的)인, 이문화적(異文化的)인 기독교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이런 생각을 못했을 거라는 겁니다.

초월에 대한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용을 요약합니다. "초월(超越)이란 넘어서 나아가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대로 확대(擴大)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부정(否定)됨으로서만 실현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자신과는 철저히 이질적인 것, 절대적인 타자(他者)와 만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을 부정(否定)하는 것과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전 인류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普遍的) 가치를 만들 수 있다..... 이곳 나가사키도 또한 작가 엔도 슈샤쿠도 기독교 라고하는 이문화(異文化)와의 만남으로, 일본 자신이 부정(否定)되는 위기(危機)와 고난(苦難)을 체험하고, 기독교 라고하는 이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보다 보편적(普遍的)이고 초월적(超越的)인 가치를 지향하는 그러한 문화적 특색을 창조해낸다"는 것입니다.

◈타자(他者)로부터의 감각적(感覺的) 접촉(接觸)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절대적으로 다른 가치와 만나는 것을 오쿠노 마사모토 작가는 타자(他者)로부터의 감각적(感覺的) 접촉(接觸)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엔도 슈샤쿠가 그의 작품 소설 '침묵'에서, 타자(他者)로부터의 감각적(感覺的) 접촉(接觸)이 지닌 치유(治癒) 내지는 구원(救援)의 기능을 보는 해석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퍽 평범한 경험에서 놀라운 가치를 발견합니다. 엔도슈샤쿠는 환자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간호사의 손을 예로 들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대표작 소설 '침묵'은, 그가 폐암(肺癌) 수술을 받았을 때 죽음과 직면한 경험 직후에 창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소설에는 그의 투병 경험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엔도가 폐암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같은 병실에 자기보다 한참 젊은 청년이 역시 폐암(肺癌) 말기 증상으로 밤마다 고통과 공포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어서 간호사에게 어떻게 해서라도 저 고통을 좀 진정시켜 줄 수가 없느냐고, 옆에서 보는 자기까지도 너무 괴롭다고 했더니, 그 간호사는, 그 젊은이에게 30분마다 마약을 주사하는데, 이제 그것마저 효력이 없어 마약 주사를 더는 놓지 못하고, 그 대신, 아파하는 그 환자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때로는 그렇게 손을 잡고 있으면 그 환자의 고통이 조금씩 잦아드는지 환자가 평안을 되찾는다는 겁니다. 환자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는 것입니다.

엔도 역시 똑 같은 체험을 합니다.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래도 하나님이 계시는 걸까? 어머니의 권유로 12세에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데, 이런 고통 속에서 하나님 없이,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육체적 고통 속에서 병상에 누워 있는데, 하나님 없음, 고독, 두려움, 고통을 모두 함께 치유하는 것이, 바로 타자(他者)로부터의 감각적(感覺的)인 접촉(接觸)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을 그 영혼의 밑바닥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종교적 교의(敎義)나 신앙고백 같은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의 접촉이라는 감각적(感覺的) 사실(事實)에 근거한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강연 내용 요약)

"같은 시기에 병상에서 엔도는 이노우에 요지(井上洋治) 신부에게서 17세기 나가사키의 가톨릭 신자들의 수난과 순교의 역사를 듣고, 그 유명한 '후미에',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후미에(踏み絵, 일본의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가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기독교 신자를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 자료를 얻게 된다. "후미에에 새겨진 숱한 사람들의 발가락 자국에 마음에 강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후미에를 밟는 인간의 감각적 사실과, 밟히는 예수 상(像)의 동일한 감각적 사실을, 아마도 엔도는 병상에서 오래 동안 지속적으로 그 이미지를 그렸을 것입니다. 후미에를 밟는 것이, 결정적인 인간의 죄로서의 행위를 형성하는 것인가에 대해....(간호사에게 들었던 이야기에서처럼) 간호사가 환자의 손을 맞잡는 사실이 타자로부터의 위로와 평안으로서의 의미가 부여된 것처럼, 죄의 행위로서 범한 발가락의 감각이, 결국은 피해를 받은 쪽에서 죄의 용서로 느낄 수 있고, 그와 같이 의미가 부여된다면, 이것은 최상의 기쁨으로 전환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고, 속죄와 회개의 행위가 성취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요?"(오쿠노 마사모토)

"새벽에 로드리고 신부는 봉행소 안마당에서 후미에를 밟게 된다. 닳은 동판에 새겨진 신의 얼굴에 가까이 가는 그의 발에 격렬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 순간 후미에 가운데의 예수는 '밟아라.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라고 .... '약한 것(배교)이 강한 것(순교)보다 괴롭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침묵>(소설)"<위키백과>)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에게서 그들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을 때의 소명 경험에서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각적(感覺的) 접촉(接觸) 체험(體驗)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의 소명 경험에서 입술이 불로 지짐을 당하는 경험을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타자로부터의 감각적 접촉"이라고 해석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 6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7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새번역 사 6:1, 6-7)

예레미야의 소명 경험에서도 하나님께서 팔을 펴서 손으로 그의 입을, 입술을 만지고 그 입 속에 당신의 메시지를 넣어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9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사 6:9-10)

◈애국의 금도(襟度) (고전 13:1-13)

고린도전서 13장을 대할 때마다 저는 개인적으로 1960년 4월 19일 저녁을 떠올립니다. 그때 저는 연세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그날 12시에는 대강당에서 전교생 예배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회 주관으로 예배에 불참하고 전교생이 3·15 부정 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집단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신촌에서 광화문까지 시위를 했습니다. 서대문, 광화문, 경무대 앞까지 가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경찰이 데모대 해산과 경무대 접근 저지를 위해 발포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생각보다 격화되었습니다. 부상 학생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가기 시작하면서 주력(主力) 대열이 학교로 돌아 왔습니다. 대강당 마당에 모였습니다. (우리의 책가방이 그 마당에 있었습니다). 백낙준(1895~1985) 총장과 보직 교수들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태를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을 했는지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기성 정치인들은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사회적 격변을 겪어야 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우리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백낙준 총장의 연설, 설교를 듣고서 감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길지 않았습니다. 채플을 빼먹고 데모에 참석한 학생들을 나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제일 걱정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2학년 신학생인 나는 한심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숙맥 같았습니다.) 놀랍게도 백낙준 총장은 우리가 그날 오후에 한 일을 "장하디 장한 애국적행동"이라고 평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옛 질서는 이제 곧 무너지고, 새 질서가 올 터인데, 그때까지 이 사회가 혼란을 겪을 터인데 새 시대의 주역인 우리 학생들이 할 일이 있다고 당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갑자기 고린도전서 13장을 암송했습니다. 내 귀에 익은 <1938년 개역> 본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성경 구절을 암송한 다음에, 그는 "오늘 제군(諸君)들이 보여준 애국심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어야 할지를 바울의 사랑의 논리에 빗대어 배우고자 합니다. 나는 단지 바울의 "사랑"이란 말을 "애국심"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65세의 백낙준 총장은 고린도전서 13장 1-13장을 줄줄 유창하게 암송해 내려갔습니다. 암송을 끝낸 다음 그는 우리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새로 건설할 제군들이여, 오늘 애국심을 보여준 제군들에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애국심은 인내를 수반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애국심은 온유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애국심에는 시기나 질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끼리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애국심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애국심 때문에 교만해져서도 안 됩니다. 5 애국심은 무례하게 행치 아니합니다. 애국심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다. 애국심은 성내지/분(忿)내지 아니합니다. 애국심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6 애국심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애국심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애국심은 나라를 사랑할 때 당면하는 온갖 어려움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애국심은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애국심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애국심은 모든 역경을 견뎌내야 합니다. 제군들은 지금 국가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에 새 역사 창조의 역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군들이 하는 모든 일에는 이러한 애국심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우파나 좌파나, 보수나 진보나, 야당이나 여당이나 상대를 포용할 도량, 아량, 너그러움, 관대함 으로서의 금도(襟度)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전 13:1-13의 "사랑"에 "애국심"을 대입하여 실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대단히 낯설고 이질적인 이문화적인 윤리이지만, 우리의 전통이 다른 전통을 만나 우리가 부정되고 새롭게 형성되는 초월 체험을 하면서 새로운 보편적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심(눅 4:21-30)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에서 저는 두 가지 점에 착안합니다. 하나는, 엘리야도 엘리사도 예수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것, 예언자들이, 특히 예수의 경우는 그가 속한 정통 노선에서 늘 소외되었었다는 것, 오히려 이방인들이, 곧 엘리야 시대에는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고, 엘리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예수는 늘 추격과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았지만 그는 용케도 늘 잘 피하셨다는 것, 어떤 기적적인 도피 기술을 가지고 계셨던 것일까요?

■ 민영진 박사는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로, 구약 신학학자로서 모두가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경번역가이다. 연세대신학대학을 거쳐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 목사는 '표준새번역'과 '새번역'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등의 성경 개정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 2019년 2월 3일 주현절 5주(주현절후 넷째 주일) '함께하는 예배 공동체' 설교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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