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8:31-47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 시작 기도
아버지! 인생의 모든 날이 죄악 가운데서, 주의 진노중에 지나가나이다(시 90:9).
그리할진대 즐거워하는 자리, 기뻐하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아 주의 진노를 받음이 합당하나이다(렘 15:17).
죄악중의 인생으로 인해 오염된 영혼, 보혈로 씻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죄의 몸을 맑은 물로 씻어 정결케 해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니 무덤에 앉아 주의 말씀을 얻어먹겠나이다.
그것만이 나의 기쁨이오니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의 무덤, 아들의 무덤이 되어 빛이 비추어지게 하소서. 생명으로 인도하소서.
어찌할 수 없는 죄인, 아들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감히 당신께 나아갑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제 영혼을 소생시켜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에서 가르치신다.
그의 가르침은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것으로 영생의 말씀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그의 기원을 시비하며 그를 박해하고 죽이려한다.
아들의 말은 생명을 주나 오직 영으로만 알 수 있다(6:63).
유대인들은 아들의 말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도리어 그 말씀 앞에서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가 그니라'(헬, 에고 에이미)라고 하며 신적 자기 계시를 하신다.
그리고 이 계시는 그가 땅에서 들리신 후에야 알 수 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30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다(31절).
"너희가 내 말(가르침)을 붙들고 있으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될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일이 없는데 당신은 왜 우리에게 자유롭게 되리라고 하는가?"(33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하게 될 것이다"(36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안다.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고 있다"(38절).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할 것인데, 그러나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가 한 일을 하고 있다"(40절).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우리는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고 우리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다"(41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났으며 그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42-43절).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인 마귀에서 났으며 또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 안에서 서 있지 않다. 그의 거짓말은 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44절).

"그러나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희중에 누가 나를 죄 있다고 단정하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너희가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7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신다.
이는 창세전 아버지와 함께 하신 관계성과 그에게 들은 말씀인 영생을 전하시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이다'라는 자기 계시로 표상된다.
그가 전한 영생의 말씀을 듣는 자는 영생을 얻으며 그가 증거한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에 참여한다(5:24; 17:3).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며 도리어 반박한다.

한편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들은 초막절 가르침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한 이들을 내포한다(30절 참고).
내 말에 '거하면'은 '머물러 있다'(stay), '기다리다'(wait for), '붙들다'(hold)로 번역된다.
곧 그들이 아들의 말을 '붙들고 있으면' 참으로 그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여기 '아들의 말'은 영생의 말씀이며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된다(6:63).
베드로는 이 말씀을 붙들고 떠나지 않았다(6:68;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 그가 보내실 성령, 곧 진리의 영이 그의 말을 생명이 되게 한다.
그 때 그들은 진리를 알게 되며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를 알다'(32절)는 '내가 그인줄 알고'와 병행을 이룬다(28절).
'내가 그인줄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을 아는 것이다.
곧 그가 창세전부터 아버지 안에 거하며 그의 영광가운데 있음을 아는 것이다(1:14,18).
그는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고, 그를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계시되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것은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을 아는 것이다.
이는 아들의 말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가 누리는 영생의 삶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진리가 그를 자유롭게 한다. 곧 영생의 삶이 그를 자유케 한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께 반문한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른 사람의 종이 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새삼스럽게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유대인들이 말하는 종과 자유자의 개념은 여종의 몸에서 난 자인가? 자유로운 여자의 몸에서 난 자인가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0-31).

물론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예속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후손, 곧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임을 자부한다.
이것은 비록 정치적인 예속 하에 있으나 영혼의 내면적인 자유를 잃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바로 죄를 범하는 죄의 종이라고 하신다.
그들이 자유하다고 자부하는 내적 상태는 바로 죄의 종의 상태라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죄의 종임을 입증한다.
그들이 혈통적으로는 분명 아브라함의 자손이다(37절 참고).
하지만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이 아니라 영적인 후손이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7).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또한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 행위로 증거되는 자손이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8-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죄의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나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오직 아들이다(갈 3:16).
그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만이 아버지 집에 영원히 거한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유하다고 했으나 이는 거짓된 자유이며 실상은 죄의 종이다.
자유케 되는 길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유케 되는 길을 제시한 아들을 죽이려 한다.
이는 아들의 말이 그들 안에 거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의 믿음은 불충분한 것임이 밝히 드러난다(30,31절).
곧 그들의 믿음은 베드로처럼 아들의 말, 곧 영생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유대인들도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아들과 유대인들은 각자 그들 나름대로의 출생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한다.
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를 보내신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인 마귀가 행한 대로 한다(44절 참고).
이로써 아들의 아버지와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현저히 대립된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한다.
자기들의 아버지는 (마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할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오실 그리스도를 보고 믿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복은 아들을 통해 만민이 생명을 얻는 것이다(창 12:3; 갈 3:8, 26).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이 오셔서 이 복을 성취할 때를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가 보고 믿은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전하는 아들을 죽이려한다(40절).
그러니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의 자식들이다.
그들의 아버지 마귀가 행한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항변한다.
그들은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제 예수께 반대하는 논법을 바꾼다.
당시 유다 자료를 보면 음란한데서 태어나는 것은 이웃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를 말한다.
곧 율법을 위반하여 태어난 자를 말하며, 예수가 바로 그런 자라는 역공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가 주장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기들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일컫는다.

예수께서 다시 반론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였다면 어찌 아버지께로부터 온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말이다.
참으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났고 그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그가 보내신 아들의 말을 깨닫지 못하는가?
이로 보건대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다.
마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파괴하는 살인자이며, 하나님이 계시한 진리를 부인하는 거짓말쟁이다.

여기서 말하는 마귀의 거짓말은 진리를 부인하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요일 2:21).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아 진리에 서지 못한다.
말씀(진리)도 태초부터(처음부터) 있었고 거짓말도 태초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마귀는 창세전부터 이미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말쟁이로 존재한다.
마귀에 속한 자는 예수가 말씀하시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도 믿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를 죄있다고 정죄한다.

그들이 진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그 출처가 마귀에게서 났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속하여 그가 아들에게 보내신 이들, 그들은 진리(영생의 말씀)를 듣는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는 영생을 얻으며 진리를 알며 자유케 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진리'를 구한다.
그 진리가 인생을 자유케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대교에서 진리는 율법이었고 율법의 탐구가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 믿었다.
'율법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진 자는 왕국의 멍에와 세속적 염려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멍에를 벗어던진 자는 왕국의 멍에와 세속적 염려의 멍에를 짊어질 것이다'(P.Aboth 3:5).

이슬람교에서 진리는 다섯 개의 기둥으로 표현된다.
신앙고백, 기도, 적선, 금식, 순례이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드리는 기도이다.
이러한 규정들을 지킴으로써 알라신의 돌봄을 받고 아브라함처럼 하늘을 여행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성경의 내용과 다른 구전전승이다.

불교에서 진리를 아는 것은 '열반'(니르바나, nirvana)이다.
불교에서 고통의 근원은 욕망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목마름'(갈증)이다.
인간은 목마르며 무언가를 욕망하며, 이 무언가를 얻게 되면 또 그걸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런데 삶이나 존재, 물질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구적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속적이고 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욕망과 집착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들이 꺼지는 것, 그것이 열반이다(열반; 꺼짐).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자유는 집착과 탐심으로부터의 해방, 곧 정신적 자유이다.

동양종교에서 진리는 '도'(道)이다.
도는 원초적인 상태이며 동시에 지고의 원리이다.
이것은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것이다.
도교는 인간의 육신 안에 우주 전체, 즉 순환주기며 우주를 관장하는 신들 전체가 깃들어져 있다고, 우주는 거대한 하나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육신과 정신을 관류하는 각기 다른 에너지들 사이, 또 이들 에너지와 우주 사이의 조화 유지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므로 도교에서는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것, 곧 순리대로 사는 것이 자유이며 궁극적으로 불멸의 길이다.
'도' 사상을 윤리로 정착하려한 공자는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 무모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름에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건기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해두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

한편 헬라 철학에서 진리는 '신성한 이데아'(지고의 선)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신성한 이데아는 이성을 통해서만 도달하는 세계이다.
인간의 감각은 현실만을 관찰하는데 이는 기만적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유는 현실 세계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와 신성한 이데아를 알고 관조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신적인 관조야 말로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활동이라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신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누스'(신적지성을 통해 관조할 수 있는 원리)이다.

20세기 들어서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전개되면서 진리는 하나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정신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의 해결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진리이다.
진리를 담지한 종교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사는 인간에게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 수단이 되었다.
더불어 물리적인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자리매김을 하였다.
정치적 억압, 경제적 착취, 사회적 불의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리가 주는 자유로 각인된 것이다.

이에 편승하여 기독교마저도 종교다원주의 경향에 함몰되는 위험이 있다.
곧 기독교가 현세적 문제 해결이나 정신적 평온함을 주는 종교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과연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면,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는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셈이 되고 만다(한스 큉).

사실 상기한 모든 진리들은 세상에 속한 것이요 세속적인 종교가 내세우는 진리이다.
그것들은 설령 진리라고 말하나 아래(땅)에서 난 인간이 겪는 궁극적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곧 죄 가운데 살면서 죄의 종노릇하다가 사망으로 끝나는 인간의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

반면 기독교의 진리는 그 기원과 목적을 전혀 달리한다.
'진리를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그임을 아는 것'이다.
곧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사귐과 그 영광을 아는 것이 진리의 본체이다.
그 때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다.
그래서 진리는 아들의 말을 듣고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영생이다.
이로써 창세전부터 현존하는 아들이 있는 곳에 아들과 함께 있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여 주신 영광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진정한 자유이며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4. 나의 묵상
나는 20대 초반 불교를 통해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 하였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부처가 말한 '너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는 가르침의 적용이었다.
그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자 무던히도 발버둥 쳤다.
30대 초반 소위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가질수록 목마름은 커졌고, 욕망도 비례하였다.
열반을 하지 못해서인가...? 그렇다고 속세를 떠날 용기도 없었다.
20대중반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다.
신앙의 내용은 적극적인 삶과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성공적인 삶에 있었다.
진리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고 다수가 가는 길을 따라 갔다.

그 후로 반세기가 훌쩍 지나갔다.
진리에 무지한 채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한 신앙생활은 갈수록 쇠락하였다.
갈수록 풍성한 삶이 아니나 갈수록 왜곡되고 변칙적이고 세속적이 되어갔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내 이름을 내는 탑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무엇보다 죄의 세력을 감당할 길이 없어 죄의 종노릇을 해야 했다.

유대인들처럼 아브라함을 나의 조상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
돌아보니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나를 심판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진실로 그의 공의는 참되고 의로우셨다.

심판의 자리는 아들의 무덤과 연합된 자리였다.
그 안에서 일으킴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비로소 진리를 알았다. 그 진리는 만물 안에 속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영원한 생명이다.

벌써 7년이 다되어 가는데, 영생이라는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계시로 아는 비밀이라고 하였다(엡 3:3; 골 1:27).
입술로만 하나님의 자녀요 실상은 죄의 종노릇하던 자에게 베푸신 은혜가 기이하고 놀랍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신 한량없는 은혜이다.
그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자 오늘도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
쉼 없이 역사하는 죄의 세력 앞에 토설하고 자복한다.
오호라 나는 비참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영으로 사는 한 날, 영의 이끌림을 받는 이 날이 되기를 간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평생 목마름으로 고통당했습니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어찌할꼬' 하면서 진리를 찾아 다녔으나 늘 그 자리였습니다.
결국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나의 인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자를 진멸하지 않으시고 진리로 이끄셨습니다.

아버지여...
진리를 아는 것은 아들이 말한바 '내가 그임을 아는 것'입니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사귐을 아는 것입니다.
아들의 무덤에 두시고 진리를 계시하셨나이다.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자유는 만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 진리, 이 자유를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죄의 세력은 여전하여 죽을 몸을 이끌어갑니다.
다시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 실로 두렵습니다.
주여, 나를 사로잡아 주소서. 당신께 매이게 하소서.
육신의 생각을 멸하시고 영의 생각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진실로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되시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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