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씀 : 마 27:11-26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 묵상

"아버지, '그(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무리들 중에 제가 있었나이다. 진리의 영으로 진리를 알지 못해 종교적 순응주의자가 되었나이다. 이제 진리 안에서 불순응하는 저는 심히 곤고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 받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시여, 나로 진리 안에서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 당시 유대와 예루살렘 지역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이 당시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는 종교에 관해 관용의 정책을 폈다.
그는 이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달리 인간의 신격화를 극구 반대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인간은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태도'를 견지하였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이야기 7권).
그래서 그는 로마속국의 민족이 어떤 종교를 믿든지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종교의 문제로 사회가 혼란이 일어나는 것만을 문제 삼았다.

빌라도는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파견된 유대지역의 총독이다(26-36).
그는 합리적인 인물이자 고도의 정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전형적인 로마의 페어플레이 감각을 가진 유능한 행정관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유대인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의 미움을 받았다.

빌라도 총독의 임무는 우선 법과 질서를 유지하여 사회적 혼란을 막는데 있었다.
무엇보다 종교적 마찰이 우려되는 예루살렘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확고한 지배하에 두는 것이 통치의 우선순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폭동이든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한 실례로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는 포악하고 잔인한 일도 자행하였다(눅 13:1).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를 빌라도에게 데려온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갖기 않은 유대교도는 유대법을 따르고, 죄를 지은 경우에도 유대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
예수께 정죄된 신성모독의 죄는 돌로 쳐 죽임당해도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적으로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경우에는 로마 총독의 허가가 나야만 했다.

한편 로마법에 따르면 자기가 믿는 신을 모독하는 일은 죄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야기되면 주도자를 '추방'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티베리우스는 한 때 테베레 강 서쪽에서 발생한 종교적 소요사건을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긴급조치령을 발동하여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행 18:2).
그러나 그는 긴급조치령을 법제화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후에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한편 역사가들은 만일 빌라도가 로마의 법대로 예수를 추방했더라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을 것이고, 흑해 같은 곳으로 추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물론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대되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빌라도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국 로마에 해를 끼친 셈이 된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어찌하여 로마법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주었는가?
그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순응한 무리들의 요구로 인함이다.
오늘 말씀을 포함하여 사복음서를 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확신하였다(눅 23:13-15; 요 19:4-5).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눅 23:22).
빌라도의 무죄 확신은 그의 아내가 그에게 보낸 메시지에 의해 확증되었다.
"저 죄 없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어젯밤 꿈속에서 제가 이 사람 때문에 몹시 고통을 받았습니다"(19절, 쉬운 성경).

만일 빌라도가 아니라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예수는 누구에 의해 수난당하고 죽임 당했는가?
그것은 예수 자신의 최초의 수난 고지에 증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마 16:21).

예수께서는 오직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등 성전 지도자에 의해 고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신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는가?
그것은 외적으로 권위를 위협하는 이단자를 척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 그들은 창세전 영원의 진리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고전 2:8).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다.
예수를 심문한 빌라도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여 백성들에게 묻는다.
또한 그는 예수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 넘겨진 것이 그들의 시기로 인함인 것을 알았다(18절).
마침 바라바라고 하는 악명 높은 죄수가 한 명이 있었다.
그래서 빌라도는 백성들에게 둘 중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17절).

이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중들에게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도록 요청하도록 지시한다(20절).
무리들은 종교 당국자의 말과 권위에 순응하여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죽이라고 요청한다.
빌라도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예수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무리들은 외친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22절).
빌라도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는다. 무리들의 폭동을 두려워한다.
결국 로마법도, 양심의 법도 버린 채 죄책감을 없애려 손을 씻고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준다.

무리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종교 권위 철저히 순응하는 이들이다.
즉, '종교적 순응주의'(religious conformism)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제도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속에서 태어난 가정에 대해 순응한다.

만일 가정에 불순응한다면 그는 친밀하고 질서정연한 가정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축복을 박탈당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본래적 가정의 질서에 불순응하라고 명한다(마 10:35-37).
순응해야 할 가정에 대해 불순응을 명하는 것은 불순응에 대한 가장 과격한 진술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성한 가정에 불순응해야 하는가?
그것은 맹목적이거나 이기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초대 교회의 뚜렷한 정황처럼, 우리의 가정이 소중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의미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면 마땅히 불순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위한 불순응일지라도 그것은 모험을 수반한다.
그 모험은 우리 자신의 양심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부담이다.
이는 우리의 한계로 인해 진리에 대해 늘 모호한 입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순응하는 것이 무력한 항복인지, 거기에 순응해야 하는 사랑과 지혜라는 요소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위한 불순응은 자신이 틀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수행된다.

불순응의 문제는 가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뚜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운명에 의해 처하게 된 종교에 순응함으로써 불순응으로 인한 모험을 피하려 한다.
순응하는 모태신앙인은 기독교든 불교든 그런대로 모태로부터의 신앙을 받아들인다.
다른 종교로의 개종은 친밀하고 질서정연한 가정에 파장을 일으키며, 특별한 의지나 능력이 아니고서는 견뎌내기 힘들다.

그러나 가정과 종교, 전통에 순응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들은 도리어 변화를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개종은 자신의 변화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을 개종시키는 변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모험이 가져오는 죄책감으로 인해 그들은 자만할 수 없게 된다.
즉 순응하지 않는 위험과 그런 위험으로 인한 근심과 의심과 영광을 그들의 양쪽 어깨로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개인구원에 의한 가정구원은 지엽적인 문제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 집단에 순응하는 것에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무리들은 종교 당국자에 의해 지시를 받는 순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안전한 교리, 확고한 권위, 질서 있는 체제가 제공하는 종교에 순박하게 따르는 자들이다.
종교 권위자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종교 권위자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 외친다.
종교의 순응에 길들여진 그들... 그들이 무슨 잘못인가?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이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일견 교회에 순응하는 이들의 역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끊임없는 증언의 역사이다.
그 당시는 옳았지만, 지나고 보면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 역사도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옳다고 하는 것을 '순응'하며 믿었으나 지나고 보니 '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한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조차 순응하지 말아야 합니다'(폴 틸리히).
물론 그런 불순응의 행위에는 모험이 내포된다.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순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가장 고상한 형태의 종교까지도 포함에 모든 인간적인 것에는 하나님을 저항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저항하는 그 무엇은 그 무엇 자체를 절대화하려는 성향이다.

하나님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다.
다시 말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와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불순응은 한시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문화와 나아가서 우리의 교회를 '궁극적인 것,'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저항이며 불순응이다.

그런데 이러한 불순응은 인간이 감당하기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선지자들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불순응한 이들은 그 일에서 끊임없이 도망하려 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고백은 그들의 고백이며, 오늘도 불순응의 저항을 하는 이들의 고백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예레미야의 주저함과 무거운 과업은 무엇이었는가?
대다수 선지자들이 형통을 선포하나 그는 거룩한(?) 성전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불순응의 용기를 감행하는 자는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 무엇이든 그 자체로 절대화하려는 우상 숭배에 맞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심판을 참되고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용기있는 행동이 어려운 것은 다분히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양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즉 우리의 죄책감이 불순응자가 되려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다.
그래서 진리를 위해 불순응하는 자는 그로 인한 죄책감을 하나님의 긍휼로 감당하는 자이며, 위험을 무릅쓰는 실패까지도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용납하는 자이다.
그 때 먼저는 자신을, 그 후에는 다른 사람을 진리로 이끌며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인생과 신앙, 목회에서 철저히 순응하는 자였다.
진리에 순응하기보다 신앙의 전통, 체제, 권위에 순응하는 자였다.
그로 인해 내가 순응하는 그것들로부터, 권위자로부터 많은 편리함과 유익함을 누렸다.

그렇게 순응하면서 나는 우상숭배자가 되어갔다.
내가 깨달은 파편적인 진리를 절대화하였다.
내가 몸담은 기관의 사역들을 '궁극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갈 2:20절, 십자가 죽음을 모든 진리인 것으로, 가정 행복이 최대의 관건으로 절대화하였다.
순응하는 자에게 순응시키는 기관이나 지도자가 면류관이 현황(炫煌)하였다.
나는 어느 기관에서나 인정을 받았고, 칭송을 받았고, 기관장의 사랑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알지 못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순응주의자들의 반열에 섰다.
그러나 내가 그런 자리에 있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내게 임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한 소중한 것들은 심판의 태풍으로 휩쓸려갔다.
심판의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 나는 홀로 거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심판의 자리, 고독(어둠)만이 나의 절친이었다(시 88:18).
그런데 하나님은 고독한 중에서만 하실수 있는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진리가 아닌 모든 것에 불순응하는 용기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여 고독 가운데 처한 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한다.
그는 결국 심판에 이르고 마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을 사는 자는 영원하지 않은 것을 절대화하지 않는 자유를 누린다.

무엇이든 자신을 '궁극적인 것'인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심판에만 합당하다.
직분도 기관도, 심지어 교회까지도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되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와 목회자들, 성도들을 보며 눈물 흘린다.
결코 영원하지 않은 것들, 결국 한 줌의 재가 되고 말 것들을 '궁극적인 것'으로 섬기며, 거기에 순응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며 간구한다.
심판이 복인 것을 아는 그 날까지...

3. 기도

아버지...
저는 철저히 순응하는 자였습니다.
종교적 순응주의에 길들여진 자였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목회의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순응하였습니다.
영으로만 아는 진리에는 무심하였습니다.
저는 종교 당국자에게 순응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중 하나였습니다.

오, 아버지...
제게 소중한 것들, 사람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제게 임한 심판은 진실로 합당합니다.
심판의 자리에서 성소를 지으시고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나이까!
그러나 죄책감과 실패의 모험은 여전히 저를 번민하게 합니다.

아버지...
다시 아버지만을 바라봅니다.
나를 초월하고 상황을 초월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거기에 순응하여 안일을 꾀하려는 내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 나를 용납하시는 주님이 달려 계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으로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에 불순응하며 죽기까지 주님을 따를 수 있나이다.
오, 주님 오늘도 도우소서! 저를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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