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대림다문화센터 대표ㅣ대림중국교포교회 담임)

조선왕조 제4대 왕인 세종은 약관 22세에 왕위에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우리글이 없음을 한탄하던 중 조정에 정음처란 문자 연구기관을 두어 집현전 학자로 하여금 우리글을 만들기 위한연구를 하게 하였다.

세종25년 드디어 '훈민정음을 "정제 3년 동안의 실험 기간을 거쳐 세종28년 9월에 이를 밝힘으로써 우리 글자를 갖게 되었다.

훈민정음이 정제된 이래 우리의 뜻과 생각들을 우리글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유롭게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글은 그 글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 그리고 삶을 나타낸다.

시인은 그 글자를 통해 아름답고 선명하며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감동 시키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위로해 준다.

그러나 반대로 어린 아이를 유괴한 흉악한 유괴범은 같은 글자를 가지고 부모에게 공갈하거나 협박하는 편지용으로 사용을 하기도 한다.

시인이 사용한 글자는 같지만 누가 사용 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의 종이 되어 사탄이 사용 하느냐 의, 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서 사용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와 결과로 나타난다.

왜 그럴까?

어느 종교이든 종교는 죄의 실재와 그 현실성을 인정하지 않고는 거론 될 수 없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살펴보자.

로마서의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이 계속 된다.

교리는 딱딱하고 쉽지 않지만 실제 우리 삶에 적용될 부분이 많다. 구원은 죄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이것이 풀려야 우리에게 승리가 오고 축복이 오며 구원에 이르게 된다.

본문에는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면서 참된 삶을 세워져 갈 것인가 하는 성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삶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를 가르친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 인가를 섬기고 살게 된다. 무엇인가에 잘못 빠지면 안타까운 인생이 된다. 인생은 사람이 생명을 바칠 만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무의미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

어떤 이들은 생명을 걸만한 일이 아닌데 거기에 목숨을 걸어 인생을 낭비한다.

사람이 성공하든 출세하든 그것은 더 높은 가치를 가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곧 저주와 같다.

감옥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 하므로 무가치함을 느끼니까 되는 대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발견하는 길은 본래 조물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과는 다른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신 사실을 알면 내 존재 가치가 향상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중요하므로 “너희는 너희 죽을 몸을 지배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라”고 본문 저자는 권면 한다.

사람은 어떤 주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달라 질 수 있다.

과거에는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 왕 노릇 하여 우리를 마구 끌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의, 의종이 되었다.

(롬6:113) 이보다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은 없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 이었는데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 되었고 의에게 순종함으로 의의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자유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의의 종이 된 우리들은 과거의 죄와 부정의 모습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함에 이르는 삶을 살아가야 하라고 하신다.

최초의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범죄 함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 인간의 후손은 죄에 종노릇하며 살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이제 주인이 달라졌다. 지금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의도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히 죄의 종이 되지 말고 의의 종이 되라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의의 종이 되었다.

너희의 주인이 사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꾸 옛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기려 하고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언제 까지나 이 찬송만을 부를 수 없다.

이제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찬송 일세”라고 감격의 찬송을 부르자.

어떻게 해서 이렇게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 졌는가? 내가 잘나서 공로가 있어서 의로움이 있어서인가? 결코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이다 “17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이니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서 감사를 드려야 할까?

“18절”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완전히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는데 오늘 본문에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신분이 변했는가? ‘너희에게 전하여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라고 했다. 여기에 “마음으로 순종했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진정 어린 순종이 바로 의의 종 된 사람의 특징이다.

생각해 보자. 이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시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제 우리는 주님의 한 지체가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을 의 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 하신다. 세상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릴 때 보다 기쁨은 없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보다 더 멋진 일은 없다.

인도에서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작은 호랑이를 한 마리 잡아서 집에서 길렀다고 한다. 말도 잘 들어서 애완용으로 가져 와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는 피곤해서 졸고 있었는데 그놈이 옆에 와서 손발을 핧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그랬기에 괜찮다고 생각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 깨서보니 그 호랑이가 손을 깨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머지 그 놈의 눈빛을 보니 먹이를 노리는 눈빛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그렇지 않던 놈이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손을 핧다 보니 붕대가 풀리고 피가 흘렀다고 한다. 피 맛을 본 이놈이 주인의 손을 깨물고 결국 주인을 잡아먹으려고 하더라는 것이다. 평소에는 조용하던 호랑이가 흉기가 되어 결국은 나를 잡아 삼키려 했던 것이다.

호랑이가 결국 자신을 위협하는 흉기가 됐다. 죄의 싹은 미리 잘라 버려야 한다.

죄라는 것도 마치 작은 호랑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겁날 것이 것도 없고 귀찮을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냥 품고 있으면 언제인가는 독이 되어 나를 해치려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의 종이 되는 죄의 해법은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오직 주의 품꾼으로 써 주시옵소서”라고 구하고 참 자유함에 이르는 길임을 잊지 말자 (행 2:37-38 롬6: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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