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기독교학술원 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기독일보DB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교회 석학인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가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두 번째 기고글을 통해 "동성애가 창조 질서라는 주장은 성경 가르침에 배치된다"고 주장했다.

김영한 박사는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창조 질서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주석하는 작업을 했지만, "이것은 이성애(異性愛)를 가르치는 창세기의 창조 질서로서의 남녀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해를 동성애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박사는 ▶퀴어 신학자들의 동성애 옹호는 창조 원리를 간과하는 큰 실책을 범한 것 ▶성적 타락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더욱 훼손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남녀로 창조한 이유는 생육 번식과 차이성과 다양성을 위해서 ▶동성애는 창조 질서인 이성애의 변태로 창조 질서가 아니 ▶퀴어 신학은 남녀의 생물학적 질서와 남자와 여자의 몸의 연합을 무시한다 ▶부활시 성을 초월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성 평등 함축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생물학적 몸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김영한 박사의 기고글 전문이다.

"동성애가 창조 질서라는 주장은 성경 가르침에 배치된다" - 퀴어 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II)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가 창조 질서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주석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애(異性愛)를 가르치는 창세기의 창조 질서로서의 남녀의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해를 동성애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신학적 성찰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질서와 가정과 사회 질서에 근본적으로 왜곡을 초래하는 괴기한 발상(a queer idea)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 동성애는 창조 질서의 이성애의 변질(타락)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동성애를 성경적 관점으로 보는 퀴어 신학의 입장에서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을 해석하는 주석서(The Queer Bible Commentary, 2008)까지 발행했다. 이들은 창세기 1장-2장에서 남자와 여자로 주어진 창조 질서인 가정(家庭)을 부인한다. 퀴어 신학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아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지, 남자와 여자로만 창조된 것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것은 특정한 목적과 필요에 따라 이차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남자와 여자로서 이루어진 창조 질서는 가부장적 진술일 뿐이며 인간에게 반드시 이성애적 행위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인류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정신질환자, 독신자, 동성애자를 포함하지 못하는 진술이라고 본다. 인간에게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향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고 동성애 실천은 마땅하다고 본다. 필자는 퀴어 신학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성경의 본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했다기 보다는 성경본문을 젠더 이데올로기로 왜곡했다고 본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남자와 여자로서 인간 창조는 생육, 번성, 충만을 위해서이다. 퀴어 신학자들의 동성애 옹호는 이러한 창조 원리를 간과하는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동식물을 암컷과 수컷으로 지으셨다. 그리고 인간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다. 암컷과 수컷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소 번식과 생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복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a). 창조 원리는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생육, 번성, 땅에 충만이 가능하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일차적이지 이차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사람은 누구나 남자나 여자로서 일차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창조 원리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은 생물학적으로 절대적이고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 후손의 생육, 번성, 충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이성애의 변태로서 성적 타락이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성적 교류를 한다는 것은 창조 질서에 맞지 않다. 성 기관이 다르고 남자와 여자가 성적 교류를 통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 가정이기 때문이다. 가정이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으로 인간에게 허락하신 창조의 복이다. 인간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고 아담에게 배필을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가정이란 반쪽인 남자와 여자가 서로 만나서 불완전한 인격과 몸을 완성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동성결혼에서는 이러한 창조의 복인 남편과 아내 (짝)의 하나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의 교환이란 짝이 되는 성 기관을 통하도록 창조주가 만드신 것이다. 남성 끼리의 성교는 항문성교로 나아가는데, 항문은 배설 기관이지 생식기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항문성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성적 질서를 교란시키는 가증한 일이다. 여성 끼리의 성적 교합도 창조 질서에 배치되는 것으로서 가증한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가정이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만드는 것이다.

2) 성적 타락은 인간의 하나님 형상을 더욱 훼손한다.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젤렘 צרם)은 인간이 가진 하나님을 닮은 존엄성이다. 이 형상은 인간에게 주어진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라고 할 수 있다. 원의(原義)란 의와 진리의 거룩함(엡 4:24)이다. 그러나 성적 타락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만든다. 창세기 6장에 의하며 인간이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하나님의 신이 인간에게서 떠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창 6:2-3).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구절은 인간의 성적 타락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늘에 있는 신적 종류의 존재들"을 말한다. 이들은 모든 민족의 신앙에서 신들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들을 하늘 궁정의 신하들로 낮춘다(욥 1:6; 2:1; 시; 82:1).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성적 타락으로 인간에게 있는 신적 생기(生氣)가 소멸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생기는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형상을 상실한 육의 사람들에게 '새 사람을 입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3) 하나님이 인간을 남녀로 창조한 이유는 생육 번식과 차이성과 다양성을 위해서이다.

퀴어 신학자들은 창조 이야기 해석에 있어서 다양성만을 인정하고 생물학적 번식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서로 다르게 창조하셨는가? 여자와 남자의 서로 다름 속에서 서로 다름을 용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서로 다름 속에서 일치와 사귐을 이루어가라고 하나님은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지은 것이다." 퀴어 신학은 인간 창조를 설명함에 있어서 후손의 번식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번식이 없으면 인류는 지속될 수 없다. 인간을 여자와 남자라는 성적 짝으로 지으신 것은 인류의 번식을 위하여이다. 창세기 1장 28a절은 27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이유가 인류의 번성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인류의 생육, 번성, 충만, 정복에는 자식들의 생산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후손의 번식은 인류 사회 생존과 존속의 생물학적인 근거다. 정신 세계의 융성은 생물학적 세계의 번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퀴어 신학은 여자와 남자의 서로 다름 속에서 다름을 용납하고 더불어 살아가라고 남녀를 지으셨다고 하면서 "성을 통한 번식"을 언급하지 않는다. 남녀 사이의 신체적인 성적 교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영지주의적 오류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을 선하다 보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 교섭을 죄로 보았고, 육신을 무덤으로 보았다. 그러나 창세기는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차이성을 생물학적 성(性)의 차이로 본다. 서로 다름은 성의 다름이요 서로 끌림은 성의 다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성이란 인류를 지탱하는 생물학적 동력이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남자 둘이나 여자 둘만 지으셨다면 인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을 아담과 하와라는 이원적 성적 존재(dual sexual being)로 지으셨다는 것은 인류 사회 존속의 동력이 되게 하신 것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지는 짝이 없는 가정은 후손이 없다. 동성 가정은 후대를 이을 수 없으므로 그 가정은 소멸하며, 그러한 가정으로 이루어진 사회 또한 소멸될 수밖에 없다.

4) 동성애는 창조 질서인 이성애의 변태로 창조 질서가 아니다.

퀴어 신학은 이성애가 창조 질서라는 것을 부인한다: "자연생명세계와 인간세계에 동성애가 있다는 것은 남녀의 구분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과 뜻을 위해서 생겨난 것임을 가리킨다. 동성애는 남녀의 사랑과는 다른 성적 사랑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동성애가 있다는 것은 인간이 남녀의 구분을 넘어서, 그리고 남녀의 사랑을 넘어서 인간의 존재와 본분, 사명과 책임을 더욱 깊이 생각해보라는 요청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남녀의 사랑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퀴어 신학은 동성애가 마치 자연생명 세계와 인간 세계에 자연적으로 있는 것처럼 주장하나 이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질서로서의 이성애적 질서를 부정하는 그릇된 견해다. "동성애는 남녀의 사랑과는 다른 성적 사랑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는 주장은 퀴어 신학의 괴기한 주장으로 전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괴기하다"(queer)는 것이다. 사랑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사랑이 있다. 에로스(Eros): 남자와 여자 사이의 육체적 사랑, 필레오(Phileo): 친구 간의 우정, 스톨게(Storge): 부모의 자녀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Agape): 신의 인간 사랑, 무한한 사랑 이다. 동성 간의 감정적 교감은 우정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동성애처럼 성적 교류가 전혀 없다. 다윗과 요나단처럼 동성 간의 우정이란 아름다운 덕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동성애는 두 사람이 정신적 교감에만 머물지 않고 성적 교류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이성애인 에로스의 변태로서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퀴어 사랑이다. 이에 반해서 필레오는 친구 간의 사랑이며, 스톨게는 부모의 자녀 사랑이며, 아가페는 하나님의 인간 사랑이다. 이들 사랑은 아름다운 덕을 가진 사랑이다. 그러나 동성애는 변태적 사랑으로 대부분이 오래 지속하지 않고 단기로 끝난다. 동성결혼, 동성 커플에서 정절성이나 관계의 지속성은 매우 낮다. 남자 동성 간 결합에서 정절이 지켜지는 경우는 156쌍 중 7쌍으로 매우 드물며, 그 관계속도 대개 5년 이내이다. 레즈비언 간 커플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남성 사이의 성적 행위는 항문 성교로 이어지며 이는 에이즈라는 불치병을 초래하여 수명을 현저히 단축시킨다.

5) 퀴어 신학은 남녀의 생물학적 질서와 남자와 여자의 몸의 연합을 무시한다.

기독교는 영지주의와는 달리 몸의 종교이다. 창세기 1장이 이야기 하는 바 같이 남자와 여자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창조의 질서이다. 퀴어 신학은 남녀의 생물학적 질서가 절대적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창조한 것은 서로 다름 속에서 서로 다름을 넘어서 깊은 사귐과 하나됨을 이루어 생명과 정신의 깊이와 풍요로움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와 낯섦 속에서 더욱 깊고 높은, 다양하고 풍부한 생명과 정신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나님은 인간을 여자와 남자로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로 된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것도,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며, 오히려 다름과 낯섦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며 향유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이다." 이 문장에서 퀴어 신학이 여자와 남자의 생물학적 성의 차이를 무시하고 정신과 생명의 깊이와 풍요로움만을 강조하는 것은 영지주의적 태도이지 성경적 태도는 아니다. 퀴어 신학은 서로 다름, 깊은 사귐, 하나됨을 강조하나 이것은 정신적 차원에서만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퀴어 신학은 창세기 2장 24절(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이 말하는 몸의 다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다름, 깊은 사귐, 하나됨을 간과하고 있다. 이는 몸의 다름과 신비를 강조하는 복음의 영지주의화를 시도하는 것이요, 성경적 태도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퀴어 신학은 이 주장에서 남자와 여자의 가장 근원적 차이인 생물학적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깊은 사귐과 하나됨을 이루어 생명과 정신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말하나 이러한 일치나 하나됨은 정신적 일치를 말할 뿐 몸의 일치와 하나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몸의 하나됨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동성애는 몸의 하나됨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창조 질서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몸을 무덤으로 보고 죄악시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한 몸 됨이 신랑 그리스도와 신부 교회의 하나됨을 상징한다고 피력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1-32a). 여기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고 하며 이것이 큰 비밀이라고 하였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한 몸이 아니라 다른 성을 가진 남자와 여자가 몸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이 말하는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영지주의자들의 영지적 연합과는 다르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부부로서의 하나됨이라는 몸의 결합 속에 하나님이 인간 안에 내주하시는 신비스러운 구속과 인간의 신성화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가 몸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을 적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 4:2-3). 몸이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중성이나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 오셨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동성애 행위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로 거룩하게 지으신 창조 질서의 몸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음행과 동성애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바울은 음란한 행위를 한 고린도교회의 성적 탈선자들과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다음같이 경고하고 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남색하는 자들"(아르세노코이타이, άρσενοκοιται)는 단지 이방신전에서 매음하던 남창(男娼)들의 남색(男色, male sexual pervert)에만 국한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남색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동성애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장 10절에서도 율법의 다른 죄들을 범하는 자들로서 "남색하는 자들을 위하여"(아르세노코이타이스, άρσενοκοιταις, for homosexuals)이라는 표현도 동성애자들을 가르키고 있다.

6) 부활시 성을 초월한다는 예수의 말씀은 성 평등 함축이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생물학적 몸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퀴어 신학은 동성애의 정당화 근거로 부활 시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다는 말씀을 든다. 퀴어 신학자들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예수께서 열어놓은 부활의 생명세계는 창조의 뜻과 목적이 실현되는 세계다. 예수는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마 22,30)고 했다. 하나님의 창조가 실현되고 완성되는 부활의 때에는 남녀의 구별과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의 구분과 차이는 궁극적인 것도 근본적인 것도 아니다." 이 문장에서 퀴어 신학은 동성애 정당화를 위하여 남녀의 성이 철폐되는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에는 생물학적 성이 추월(追越)된다는 예수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지상에서 남녀의 신체적 구별과 교류를 철폐하라는 것이 아니다. 종말 시에는 남자와 여자가 가정이라는 생물학적 신체의 결합에 기초한 신분에서 탈피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결단코 현세에서 남녀라는 남편과 아내의 신분을 철폐하지 않는다. 남녀의 성과 결혼을 철폐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같이 영지주의의 위험을 예언하고 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딤후 4:1-3a).

정통 기독교의 견해에 의하면 하늘나라에는 육신이 아니라 부활한 몸으로 가는 곳이니 생물학적인 남녀의 성은 부활의 몸 안에서 극복된다. 그러나 성경은 현세에 사는 자들의 삶은 생물학적 몸이기 때문에 가정의 대를 잇고,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생산해야 한다. 그런데 동성애는 자녀의 대가 끊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우리는 중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남자이든지 아니면 여자로 사는 것이다. 성으로 중성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창조 질서의 근본으로 만드신 섭리다. 이것을 어기고 인간은 살 수 없다. 부활한 몸은 하늘의 천사처럼 생육 번식이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있고, 가정을 가진 자로서 생육 번식의 위임을 받고 있다.(계속)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퀴어신학 #동성애 #동성혼 #동성결혼 #김영한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