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리고 있다.   ©이동윤 기자

[기독일보 이동윤 기자] 기성교회로부터 '무교회(無敎會) 주의자'로 비판받았던 김교신(金敎臣·1901~1945) 선생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오늘날 위기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무교회 집회·김교신 연구자 등 세 그룹이 중심된 '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 총회'를 개최했다. 

▲김교신 선생.   ©기독일보DB

김교신 선생 기념사업회의 창립 목적은 개인 우상화를 피하며 자립적 주체로 신앙과 삶을 살 것을 주장한 김교신 선생의 삶과 신앙·사상을 우리 사회에 보급·계승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선생이 보여준 삶, 남긴 어록에서 위기에 처한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를 구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가 기념사업회를 만든 이유이며,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날 창립총회 1부 축하회는 양현혜 교수(이화여대)의 사회로 김교신 선생의 기념영상을 상영에 이어 전 국사편찬위원장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의 강연, 대한성서교회 전 총무 민영진 교수·김창락 한신대 명예교수의 축사, 유족 대표 김정옥 씨의 인사 순으로 진행됐다.

이만열 교수는 '김교신 선생의 삶과 사상'이라는 강연에서 "김교신 선생은 그의 동지들(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과 함께 '성서연구회' 및 월간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성서를 조선에' '성서 위에 조선'을 세우려 한 신앙인'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김교신 선생에 대해 "그는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의미의 '조선적 기독교' 혹은 '조선산(産) 기독교' 운동을 주장했다"며 "선생은 성경연구를 통해 형해화(形骸化, 형식만 있고 가치나 의미가 없게 됨)돼가고 있던 기성교회를 비판·개혁함으로 그 틀과 제도를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선생은 '무교회주의자'로 불려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만열 교수는 최근 우리 사회와 개신교계가 김교신 선생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김교신 선생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 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학과 신앙을 제대로 갖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가장 주목되면서 되돌아보는 선각자"라며 "근래에 와서 그의 '조선적 기독교'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교수는 김교신 선생의 삶과 신앙에 대해 설명했다.

김교신 선생은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유교적 전통을 지닌 집안이었고, 어릴 때부터 유교적 교육을 받으며 소년기를 보냈다.

일제강점 무단통치기에 선생은 공립 보통학교에서 배웠고, 12살 때 결혼했고 16살에 장녀를 봤다. 이후 어머니와 아내 큰딸 세 식구를 남겨둔 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유교적 교훈을 받아왔던 선생은 '산상수훈'을 통해 기독교의 새로운 가치관에 감복하게 된다. 하지만 두 달이 채 안 돼, 교회분규로 인해 그 교회를 떠나게 된다.

선생은 교회를 떠나기 전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구안론'(求安論)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교회를 떠난 후 우치무라 댁을 방문했고, 이어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청강하게 된다. 선생은 강의 장소에서 700여 명 이상의 청중 가운데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만큼 선생은 우치무라에 매료돼 있었다.

이렇게 매료된 이유는 우치무라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선생은 훗날 "나는 우치무라 선생으로부터 애국과 복음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우치무라의 애국심은 그때까지 내연(內燃)되고 있던 선생의 애국심을 격발·고양시켰고, 우치무라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진정한 민족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줬다.

이만열 교수는 "2J(Jesus for Japan)로 표현된 우치무라의 복음과 애국심은, 이제 선생에게서는 2C(Christ for Chosun)로 발현되고 있었다"며 "김교신 선생과 우치무라 간조는 모두 철저한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였고, 자기 민족을 행복하게 하는 진리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덕주, 140)"이라고 강조했다.

1924년 이후 우치무라의 집회에 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정상훈, 함석헌도 같이 참석하게 됐다. 개인의 진로와 민족 문제로 고민하던 그들은 우치무라의 집회를 통해 믿음(복음)과 애국의 상관성을 확신하면서, 1926년 도쿄에서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매주 성서연구 모임을 갖게 됐다. 이들은 일본어·영어·독일어·희랍어·히브리어 성서를 참고하면서 '조선어성서'를 연구했고, 특히 선생과 함석헌은 희랍어 학습에 열중했다.

1927년 3월 8년만에 선생은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성서조선'이란 월간잡지를 출간했다. 

이 교수는 "일본에서 귀국한 이들 6인의 동지는 처음부터 무교회주의 운동의 깃발을 올릴 의도는 없었다"며 "함석헌도 처음부터 교회에 가지 말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에 갔다가 늘 실망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선생과 류석동, 송두용, 정상훈은 주일마다 서울에서 공개 집회를 열었다. 이것이 '무교회 성서집회'였다. 그러나 이들이 일본인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유로 민족정신이 없는 무리라 규정하며 매도당했다. 또 이들에게 집회장소를 빌려주지 말라는 전달문이 나돌며 집회장소를 찾기도 힘들 정도로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이 교수는 "선생이 양정하교에 부임한 이래 공덕리에서 거주하다가 1936년 여름에 정릉으로 이사했고, 그 뒤 매일 새벽 일어나 냉수 마찰을 한 후 근처의 산에 올라가 오랜 시간 기도하고 때때로 찬송을 통해 영성을 북돋았다"며 "선생을 향해 무교회주의자로 낙인찍기 전에 말씀과 기도생활에 철저했던 선생의 영성을 먼저 헤아려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1940년 3월말, 선생은 12년간 교편을 잡았던 양정을 사임하게 된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순응하지 않던 자신의 소신 때문이었다.

이후 선생은 '성서조선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된다. 성서조선'의 주필을 맡은 그는 1942년 '조와'(弔蛙·얼어죽은 개구리를 슬퍼함)'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성서조선사건'은 성서조선 1942년 3월에 실린 권두언 '조와'(弔蛙)에서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개구리에 빗댔다고 본 조선총독부가 성서조선을 강제폐간한 사건이다. 이때 그동안 발간된 성서조선의 전편을 압수 폐기하는 조치의 성서조선사건을 일으켜 전국의 '성서조선' 독자 수십인과 김교신이 1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옥중에 있는 동안 선생은 기도에 더욱 힘썼고, 매일 주기도문을 300번 혹은 100번씩 외웠다고 한다. 취조한 형사는 선생과 동지들을 두고, "네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아온 조선놈들 중에서 가장 악질분자다...네놈들은 종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조선 민족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닦으려는 악질분자다"라고 했다.

이러한 일본 형사의 발언에 대해, 이 교수는 "선생의 중심을 꿰뚫어 본 독백"이라고 평가했다.

옥에서 나온 선생은 흥남질소비료공장에 입사, 징용으로 각지에 흩어지는 동지들을 규합하며 수천 동포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시 유행하던 발진티부스에 감염된 환자를 간호하다가 자신도 감염돼 1945년 4월 25일,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해방을 남겨둔 채 타계했다.

이 교수는 이어, 김교신 선생의 '무교회주의'와 '조선산' 기독교에 대해 설명했다.

이 교수는 "선생은 한국교회사에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신앙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제도와 형식만 남은 교회를 두고 당시 기존의 신앙인들이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며 "그런 후에, 당시 조선교회를 향해 선생과 동지들이 왜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처럼, 그때도 성서가 제시하는 그 본질을 떠나서 교회가 제도와 관행에 얽매어 형해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생과 동지들이 '무교회'라는 화두로 조선교회에 물음을 던지고 도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며 "그렇게 유추한다면 당시 성서연구를 계속해오던 선생과 동지들은 이미 역동성을 잃은 한국교회에, 교회개혁이라는 차원에서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고 행동화하려 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어 이 교수는 "선생이나 동지들, 소위 '무교회주의자'들이 꿈꾼 '조선교회상'은 성서에 입각한 더 '순수한' 교회였다고 생각한다"며 "(그것은) 구미를 통해 유입된 기독교나 교회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내리고 열매맺은 교회였을 것이다.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성서를 통해 직접 한국에 유입된 기독교, 그렇게 해서 한국적인 문화 토양에서 자라 열매를 맺은 '조선산'(朝鮮産) 기독교를 꿈꾼 것(이덕주·139)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선생의 이같은 시도가 '조선산' 기독교를 위한 꿈이었다면, 그것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복음을 수용한 지 130년을 넘겼는 데도, 아직도 한국교회가 자기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아직도 한국교회의 신학은 자기상항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육화시킨 그러한 자기신학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정체성이 모호한 '번역 신학', '수입 신학'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면, 당연히 자기 상황을 문제시해 여기서 진액을 짜면서 학문적인 신학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며 해외 신학에 의존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교수는 또 "수입신학·번역신학에도 심지어는 구미식의 시장화한 교회형태까지 보이면서 바알과 아세라의 전당으로 교회가 변모되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회는 선생과 동지들이 꿈꿨던 '조선산' 기독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며 "이런 점에서 선생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큰 울림을 다시 던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오늘날 구미에 유학하는 이들이 그쪽 학계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한국적인' 교회를 소개해달라는 것이다. 그때 내세우는 인물이 김교신, 함석헌이요, 그 자료는 '성서조선'이다. 이를 감안하면 선생은 이제 우리 신학계, 신앙계에 조언자로 새롭게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오늘 선생의 이름을 내세워 기념사업회를 갖게 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식의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고, 불신앙의 소련 공산주의도 아니고, 더욱 세속적인 민족운동도 아니고, 권력자에 대한 영합·협조도 아니고 순수한 무교회의 복음신앙에 의해 조선인의 영혼을 신생시키고 이를 자유와 평화 및 정의의 백성되게 하기 위해 선생은 귀한 일생을 바친 것"이라는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이며 동경대학 총장이었던 '야나이하라'의 글을 소개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이어 2부 창립총회가 열려 경과보고, 선언문 채택, 정관심의 및 선택, 기타 토의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갖고 있다.   ©이동윤 기자

기념사업회는 이날 발표한 선언문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90여년 전,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를 내걸고 타락한 교회와 위선적인 목회자 및 교인을 향해 '신앙의 본질회복'를 외쳤던 그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상황인지도 모른다"며 "문제는 위기를 위기로 의식하지 못하는 오늘 우리의 무감각한 시대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동안 말없이 김교신 선생의 삶을 그대로 본받아 살기를 애써온 사람들, 선생의 신앙과 사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규명해 세상에 알리려 애써온 사람들,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상황을 가슴 아파하면서 교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애써온 사람들이 기념사업회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며 "강고했던 중세 교권주의 교회에 대항해 '오직 믿음', '오직 성서'를 외치고 실천함으로 교회사 뿐 아니라 인류역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루터의 종교개혁, 그 신앙과 정신에 투철했던 김교신 선생의 가르침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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