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형규 목사
▲故 박형규 목사 ©기장총회 제공

[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박형규 목사가 18일 오후 5시 30분 자택에서 가족들이 함께 하는 가운데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3세.

'길 위의 신학자'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불리워진 故 박형규 목사는 제66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남북평화재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단과 한국 교회, 우리 사회의 정의 평화 생명 운동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故 박형규 목사는 1950년 부산대학교철학과를 중퇴하고 1950~58년 미 육군에서 근무했다. 그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해 1959년 일본 도쿄(東京)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63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0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공덕교회와 초동교회에서 목회 사역했다.

1967년 한국기독학생회 총무를 지냈으며, 1968년 기독교서회 발행 ‘기독교사상’ 주간, 1970년 기독교방송 상무이사를 지냈다. 1972년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1992년 8월까지 20년간 시무했다.

특별히 박 목사는 1960년 4·19혁명 당시 경무대 근처 궁정동에서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나오던 도중 총소리를 들었고, 이후 피 흘리며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에 충격을 받아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그는 이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마포, 공덕동은 가난한 동네였다. 집이 없어서 굴속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교인이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 갔다가 나오면서 봤다고 말해주는데, 총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뛰어다니고 있는 거였다. 그때가 4․19 사건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갔는데, 피 흘려 다친 사람이 모이고, 사람들이 숨 가쁘게 뛰어다니던 모습을 보았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어. 목사가 돼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너무 무관심했구나 생각했다. 난 죽어가는 학생들 뒤를 따라가면서 많이 울었다. 피 흘리시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그날부터 내 설교가 과격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실천하여 1973년 반유신체제 시위인 '남산부활절사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민청학련사건)과 '기독교장로회 청년 전주시위사건' 등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평생 여섯 차례 옥고를 치렀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는 35년 만인 2014년 무죄 선고를 받았다.

저서로는「해방의 길목에서」(1975), 「해방을 위한 순례〉」(1984), 「파수꾼의 함성」(1972),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2010)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301호이며, 유족은 아들 종렬 종관, 딸 순자 경란 씨 등 2남 2녀이다.

한편 기장총회는 박 목사의 장례를 총회장으로 치룰 예정이며, 5일 장으로 거행한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입관예식을 치룬 후 20일과 21일 서울노회, 기독교빈민선교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천노회, 생명선교연대 등이 주관하는 추모예식을 드린 후 22일 오전 9시 기독교회관에서 총회 주관으로 장례예식을 드릴 계획이다.

이후 같은 날 12시 30분 서울제일교회 주관으로 파주 기독교상조회에서 하관예식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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