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제하는 임희국 교수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지난해 10월 창립된 온신학회(Ohn Theology Society) 첫 전문위원세미나가 지난 20일 오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교회렵력센터 미션홀에서 개최된 가운데, 이날 장신대 임희국 교수(교회사)의 'Glocalization(세계교회 & 한국교회의 신학)을 추구하는 온신학: 한국 장로교 초창기(20세기 초반), 기독교인이 된 유림 선비들의 신앙 범주'를 주제로 발표한 발제가 주목을 받았다. 

임희국 교수는 발제에 앞서 "이 글에서는 일부러 결론을 내지 않았다. 집담을 통해 '온신학'의 노선과 노정을 공동으로 정리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며 "저는 '온신학'이 세계 오대양육대주 교회들의 다양한 신학과 폭넓게 대화하면서 한국 교회 신학의 '정체성과 특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보며 Global & Local을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적 에큐메니칼 신학'을 상정한다"고 말했다.

발제와 관련 임 교수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정책(Nevius Plan)이었다. 그때는 기독교가 주로 사회하층부로 갔는데 그와 별도로 서울 사대부 계층, 간도로 간 분들, 경북 안동의 유림 퇴계의 후손들 가운데에는 스스로 고민 끝에 기독교로 한걸음 다가온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기독교서적을 열심히 읽던 중에 기독교신앙고백까지 했다. 또한 그들의 신앙범주는 교회안에 게토화되지 않고 교육, 사회 등까지 확장됐다. 당시가 식민지 상황이니 독립운동에 힘을 쓰고 이원영 목사같은 분은 농촌 경제 살리기도 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는 족적을 남겼다"고 정리했다.

구한말 '관리 신분에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사대부들'
옥 중에 들어온 '성경', '천로역정' 등 접하고 석방 후 연동교회 입교

구한말 서울 사대부(士大夫) 계층이었던 이상재(학부참사관 겸 외국어학교 교장, 학부아문 참의, 학무국장), 김정식(경무관), 유성준(조경군수), 이원긍(대제학, 군국기무처의원), 홍재기(중추원의관, 총수) 1904년 연동교회의 교인이 됐다.

임희국 교수는 "이 역사적 사건을 이능화(이원긍의 자제)는 의금부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들은 '관리 신분에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의 시초'라고 평가했다"며 "이제까지는 주로 사회 하층민 사이에서 확산되어 오던 개신교의 포교가 이제부터 사대부 상류사회로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임 교수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옥중 집필기록인 '공소산음'(共嘯散吟)이 2012년 1월에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서 발간됐다. 공소산음은 '함께 모여 읊고 흩어져 홀로 음미하다'는 뜻으로 이 기록은 이상재가 의금부 옥사에 수감된 기간(1902-904)에 지은 논설문, 투옥된 동지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시 등을 붓글씨로 묶은 책으로 필사본 1권이다"며 "이 기록은 소위 '옥중 개종자'로 불리는 이상재, 이원긍, 홍재기, 김정식 등이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사실을 파악케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이 집단으로 연동교회 교인이 되었으니 '공소산음'은 연동교회 신앙정신의 머릿돌로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1902년 3년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투옥됐는데 '누명'을 쓴 것이냐는 질문에는 '공소산음'에 나온 김정식의 글을 소개하며 누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식은 여기서 '이름도 없는 죄로 옥중에서 세월을 버리듯 보내고 있으니 사람에게 화가 나고 세상을 개탄하는 마음이 가슴을 메우고 창자를 메꾼다'고 한탄하며 '상제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정동 성서공회를 통해 신학문의 서적 수백 종류를 구입해 도와주었으니, 상제의 뜻을 준행하여 뭇 죄수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선한 길로 이끌어 들이려는 것이다'고도 했다.

임희국 교수는 "1903년 1월 경 감옥 안에 도서실(학당)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성서공회가 재정을 후원해 신학문(서양학문) 서적이 학당의 장서로 비치됐다. 이에 수감자들이 기독교 서적을 빌려 보았다"며 또한 "이 수감자들 선교사 벙커, 아펜젤러, 게일 등이 방문해 위로했다. 한국 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한문에도 능통한 게일이 이들과 잘 소통하는 대화상대가 되었다"고 했다.

덧붙여 "이원긍은 게일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고 김정식은 처음에 게일이 준 한문성경을 사양했으나 그의 끈질긴 전도로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며 김정식은 게일이 번역한 '천로역정'을 읽고는 '200여 년 전 영국의 요한 번연이 12년 동안 옥중에서 저술한 것이다'며 존 번연의 감옥살이의 처지에 공감하기도 하고, 그의 삶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파악해 신약성경도 몇 번 읽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무디의 설교집을 읽으며 거기서 신앙의 기쁨과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임희국 교수는 말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투옥됐던 감옥에 갇힌 사람 중에 이승만 전 대통령도 있었다'고 하는 것에 관한 답변은 전문위원 중 한명인 이치만 교수(장신대)가 답했다.

이어 임희국 교수는 "그 당시 연못골 예배당(연동교회)의 출석교인은 160여 명이었고, 교회가 있는 연못골(연지동)은 천민들의 주거지로 이른바 칠천역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시 연동교회 교인 중에는 천민들이 많았다"며 "이것은 교회 내부 변혁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사회의 반상계급 타파에도 선구적이었다. 몇 년 뒤(1908) 일부 양반들이 미천한 상놈과 교인으로 섞이는 점을 매우 어색하게 여기고 또 꺼려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나기는 했으나, 연동교회는 교인 구성에서 사회 모든 계층을 망라함으로써 기존 신분질서를 타파하는데 앞장섰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동교회는 신약성경 로마서에 증언된 복음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로 발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양반이든 상놈이든-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임희국 교수(사진 왼쪽)는 "그들이 시대상황 속에서 고뇌를 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기독교를 만났다"고 말했다.   ©오상아 기자

'양반의 선비정신' 살아있던 '양반교회' - 안동교회

또한 1909년 서울 북촌 안국동에 설립된 '안동교회'는 '양반교회'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며 구한말에 강계부사를 지낸 한필상 장로, 중추원 참의를 지낸 윤치소 장로(윤보선 대통령 선친), 내부대신을 지낸 유길준, 유성준 형제 등 그 당시 정부 고관 출신들이 다수 이 교회의 교인이었다고 소개했다.

임희국 교수는 안동교회가 예배당을 지을 때 30간 짜리 기와집 한 채를 헌납한 박승봉 장로에 대해 소개하며 "박승봉은 조선 정부가 미국과 '조미조약'(1882)을 체결한 다음, 미국으로 파송돼 참사관으로 일했다(1885~1889). 그는 임금인 순조의 외가 직계 자손으로 학문에서도 당대 최고의 유학자 집안에서 글을 배웠다"며 '세도가 박승봉', '세속적 결핍과 아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그가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뭘까' 질문했다.

그는 당시 그의 행적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며 "그는 1907년에 궁내부 협판이라는 직위의 고위공무원이었는데 수년 전 외교관 경험을 살려서 이준이 황제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도록 역할을 했다. 대한제국의 위기실상을 만국에 알리고 일제의 식민통치 야심을 천하에 폭로하려는 밀서였다. 그러나 그 일이 성사되지 못했다. 이준은 거기에서 자결했고, 박승봉은 중앙정부에서 쫓겨나 서북지방(영변)의 관찰사로 좌천됐다"며 "이 와중에서 그는 기독교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서북 영변의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지방의 부호들을 설득해 학교 설립기금을 마련하게 하고 남강 이승훈으로 하여금 기독교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하게 했다. 그때 박승봉이 밝혔던 심중의 생각이 지금 안동교회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며 소개했다.

"기독교가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야만 백성들을 빨리 깨우칠 수 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서울에서 회령까지 철로가 난다 하니 정거장이 서는 읍촌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워야 한다."

임희국 교수는 "1909년 3월에 서울의 북촌에서 박승봉 등이 안동교회를 설립하는데 동참했을 때, 북촌의 양반인 민준호, 한필상, 홍운표, 유창겸, 서병철, 김시제, 안기선, 이주완, 박주완, 현재, 조종만 등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교회창립 당시 이러한 역사를 안동교회 홈페이지에는 '비록 양반들이 많이 모이기는 했지만 옛 전통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개혁하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었다'고 한다"고 말하며 "안동교회의 신앙정신은 -사회 특권층끼리 모여서 그들만의 교회가 되지 않았고-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으로 열린 교회로 사회와 소통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것이 곧 안동교회의 '양반정신'이다. '양반의 선비정신'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고 했다.

북간도 명동학교 학생들, 정재면 선생에게 성경 배워 기독교로 입교
1909년 5월 23일 명동학교 학생 모두 다 기독교인...명동교회도 창설

임 교수는 북간도에 이주한 선비들이 기독교인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1908년도에 윤동주 마을에 명동서숙이 생겼다. 거기서 선생님을 찾았는데 그 사람이 정재면(정병태 선생)이었다. 그는 나중에 목사가 되고 1946년에 기독공보가 만들어질때 사장을 했다. 그 후손이 한신대 학장 정대위 목사의 아버지이다"고 소개하며 "그는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동네에 와서 '나는 여기서 공부도 가르치지만 예배, 성경도 가르치고 찬송도 해야한다'고 해서 마을 지도자들이 회의를 해서 신식교육은 가르쳐야 되니까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마을은 첫시간부터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며 신식교육을 받았다. 명동학교(편집자주: 1909년 4월 명동서숙이 명동학교로 이름이 바뀌었고, 정재면 선생은 5월 부임했다)는 학교가 곧 교회, 교회가 곧 학교였다. 칼빈식으로 하면 '학교 곁에 교회'가 있는데 이것이 우리 장로교에도 중요한 정책이었다. 명동학교는 두개가 같이 붙어있는 그런 경우였다"고 말했다.

덧붙여 "명동촌의 유지들은 모두 한학의 대가들이었는데 정 선생의 조건을 받아들이게 되면 조상제사를 폐지해야 했다"며 그러다 "드디어 용단을 내렸는데 마을 어른들은 '기독교와 함께 들어오는 신문명에다 민족의 앞날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고 과정을 설명했다.

구한말 지식인들 '고뇌'하며 답 찾아가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조우'

▲'봉경' 이원영 목사

마지막으로 임희국 교수는 경북 안동의 유림 '퇴계의 후손들' 가운데 이원영 목사를 소개하며 "이원영 목사는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으로 퇴계학맥을 이어가는 집안의 교육전통에 따라 네 살부터(1890) 약 16년 동안 퇴계 학문을 했다. 그분의 설교문을 제가 정리해서 내기도 했는데 퇴계 사상까지 알아야 이분 설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며 "후학들 중에서 우리나라 제1세대 목회자들의 설교를 신학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 교수는 "이원영 목사는 8.15 광복 직후 1946년 9월에 경북 안동에 경안고등성경학교를 설립했다. 그 학교가 현재 경안성서학원, 경안신학대학원대학교로 발전해있다"고 덧붙였다.

발제를 정리하며 임희국 교수는 "저한테 와닿은 것은 '고뇌'였다. 그들이 시대상황 속에서 고뇌를 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러면서 기독교를 만났다. 처음에는 책으로 만나고 그 다음엔 성경을 깊이 읽게 됐다. 경상도 안동의 노회록을 보면 모든 노회들이 처음부터 성경을 깊이 읽도록 지도하고 스왈론 선교사가 성경통신과를 반드시 하도록 지도한 것을 볼 수 있다. 1920년대에 그래야 주일학교 선생을 할 수 있도록 해놨다"며 "그래서 경북 안동 지역에 가면 50년대까지 기도원을 거의 볼 수 없다. 그쪽의 장로교 하면 제가 소개하는 이런 쪽의 기독교 성격이 강했는데 산업화 이후에 순복음쪽 요소가 왔고, 오늘날 교회가 교회 울타리 안으로 갇히고 성장만 지향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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