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최근 프랑스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주간지 사무실에 괴한이 난입해 총을 난사해서 직원과 경찰 등 12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언론사의 주간지에서 이슬람을 우스꽝스럽고 외설적으로 묘사한 만평이 이런 참사의 발단이 되었다. 테러 용의자 2명은 범행 후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사건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반테러 시위가 일어났고, 참가자는 최소 370만 명 이상으로 프랑스 사상 최대 기록이었다. 반테러 시위자들이 외친 구호는 'Je Suis Charlie' 이를 번역하면 '나는 샤를리다'이다. 테러를 당한 언론사는 풍자 전문 주간지 'Charlie Hebdo'인데, 구호의 의미는 '나도 샤를리니, 나도 죽여라, 절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를리 에브도 최신호의 표지.   ©美 CBS 웹사이트 캡처

사실 샤를리의 풍자 만평은 이슬람만을 향하지 않았다. 유명 정치인이나 유대교, 카톨릭 등도 풍자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테러공격을 받은 날 발간된 샤를리 엡도의 최신호 커버스토리는 이슬람 혐오자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샤를리가 특정 종교를 악의적으로 혐오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볼 때, 샤를리의 행동은 특정 종교에 대한 분명한 혐오이자 종교 차별이다. 하지만,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프랑스 국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테러에 대한 반대를 넘어 샤를리의 행동을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포괄적 차별금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샤를리의 종교차별이 표현의 자유로 뒤바뀌는 일이 바로 프랑스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에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이는 타종교에 대한 모욕이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의 구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종교와 관련해서는 한계가 있으며, 누구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도발해서는 안된다.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의 종교를 모욕하거나 놀릴 권리는 없다'고 말하며, 힘을 실었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을 통해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구호.   ©jtbc 뉴스 캡처

첫 번째는 '혐오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샤를리는 오래 전부터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풍자와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이슬람과 관련된 만평이 특정 종교에 대한 악의적인 공격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가 된 풍자 만평도, 최근 전세계적으로 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무장 이슬람단체 IS(이슬람국가)의 테러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랑이 증오보다 강하다'는 카피문구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모하메드의 가르침을 앞세워 전세계적인 악행을 일삼는 이슬람단체에 대한 비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를 표현하는 방법이 이슬람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욕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비판하는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비판받는 사람이 느끼는 모욕감과 혐오감만으로 비판을 혐오로 단정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혐오와 표현의 자유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테러에 대해서, 한 쪽 진영에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폭력으로 규정하고, 다른 한 쪽 진영에서는 폭력을 유발한 차별적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가고 있다.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 이렇게 상반된 입장으로 갈리는 것을 보면서 혐오행위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구분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현재 이 두 가지 경계선에 끼어있는 것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살상테러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370만 명 이상의 프랑스 국민들의 구호에서 보듯이 살상테러의 피해자의 주장이 가해자의 주장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혐오와 자유의 구분이 특정 사건이나, 대중의 감정적 지지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결국 우리나라에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 할지라도, 이 법을 통해 차별을 시정하고 평등을 구현하기보다는, 이 법이 이슈를 선점하고 대중의 정서적 지지를 확보한 측에서 그 반대 측을 압박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소수자들의 서울시청 불법점거.   ©뉴시스

우리는 샤를리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그 반대가 되어야 할까? 샤를리가 되어 반발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상대방이 도발과 모욕이라고 여기면 무조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잠깐의 평화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한 손엔 칼을 들고 자기중심의 평화를 주장하는 종교에게도 관용이 필요한 것인가?

마찬가지로 동성애 옹호자들이 동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그에 반대하는 모든 의견들은 다 혐오로 몰아세우는 것은 정말 인권적인 행동일까? 그리고 차별금지의 내용을 법으로 정하고 국가에서 각 개인을 통제한다면 그 법이 정말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사용되고 적용되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줄까? 샤를리 사건만 봐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글ㅣ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 건강한 사회를 위한 국민연대(건사연)는 많은 독소조항들을 포함하고 있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시민단체로, 동성애 및 동성결혼, 종교 및 표현의 자유 문제 등 차별금지법과 관련하여 다루고 있다. 블로그 '바로가기'

※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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