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교회 죽음세미나 및 죽음논문공모 시상식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수서교회가 주최한 제 3차 죽음논문공모 당선자 시상 및 논문 발표회가 19일 오전 10시 부터 수서교회에서 진행됐다. 죽음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논문들을 선정한 이번 수상식에는 최성수 목사가 최우수상, 이정희 전도사가 우수상, 심수빈 전도사와 윤상철 목사가 장려상을 받았다. 우선 이번 수상식의 심사위원장인 이폴연구소장 황명환 목사는 기조강연을 전했다. 제목은 ‘과학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 - 기독교 죽음이해를 중심으로’다.

황명환 목사는 “과학적으로 불멸은 성립하지 않는다”며 열역학 제 2법칙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어 그는 “열역학 제 2법칙은 시간의 흐름 따라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사실”이라며 “이를 통해 진화론도, 불멸도 성립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문화명령’에 보탬이 되도록 과학을 선물로 주셨다”며, 이를 위해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했다. 내용은 이렇다. “과학이 발달될수록 신비를 잃어버리는 게 아닌 오히려 신비의 차원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수서교회 죽음세미나 및 죽음논문공모 시상식
이폴연구소장 황명환 수서교회 담임목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이처럼 그는 “우리는 과학을 배제해서는 안 되지만, 과학이 만능이라는 생각도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그는 “과학을 만능이라 생각해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순간부터 바벨탑 사건이 시작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그는 “오순절 성령 강림절은 바벨탑으로 어긋난 언어가 질서를 되찾는 사건”이라며 “예수를 통해 죽음은 역설적으로 영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힘주어 말했다.

곧바로 죽음논문공모 최우수 당선자 논문 발표시간이 이어졌다. 수상자로 최성수 박사는 독일 본 대학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한 후 장신대, 대신대, 김천대에 출강했다. 또 현재 순천중앙교회 교육 목사이자, 문화선교연구원 객원연구원(영화평론)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제 제목은 ‘과학은 죽음을 극복할 수 있나? - 생명과 죽음의 통합과 상호효과’이다. 강연 서두에서 그는 “제목처럼 우리 생각과 다르게, 현대 과학자들은 불멸 곧 죽음 극복을 자신들의 과제로 삼지 않는다”며 “오히려 과학계에서는 죽음 극복이 판타지와 난센스로 취급 된다”고 전했다. 다만 그는 “과학자들조차 주저하는 질문을 기독교가 굳이 묻는 이유가 있다”고 밝혔다. 이유로, 그는 “첫째 생명연장에 기여하는 과학이 죽음의 문제 앞에서 무기력해 지는 순간, 그 한계를 명확히 밝히려는 것, 둘째 이 문제에 있어 기독교 복음의 가능성 곧 영생을 말하는 복음의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려는 것, 셋째 죽음의 문제에 있어 과학과 신학의 공생을 도모하려는 것”이라 강조했다.

그렇다면 종교와 철학은 왜 죽음에 그토록 천착하는 것인가? 그는 “삶과 죽음의 상호효과”라 말한 셸리 케이건을 인용해, “철학은 죽음을 애써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즉 그는 “사후 영역 까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이념을 추구함으로, 인간학적인 한계를 넘어설 뿐”이라며 “죽음을 적극 성찰하고 해석하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부여해 태도의 변화와 행동을 바꾸도록 고무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했다.

또 그는 “종교도 초월자와 개별 영혼과의 관계성을 통해, 죽음 역시 사후세계를 위한 통과의례로 본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는 죽음의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생을 긍정하고 바르게 살 수 있는 동기와 목적을 제공 한다”며 “생의 영원한 의미와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갈 마땅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그는 “종교는 죽음의 극복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제시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수서교회 죽음세미나 및 죽음논문공모 시상식
죽음논문공모 최우수상 수여자 최성수 박사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과학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어떠할까? 그는 “과학은 철학이나 종교에 비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보다 실증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왜냐면 그는 “과학은 생명을 생각하는 데 있어 영혼을 전제하지 않으며, 나아가 사후 생명의 근거로 영혼불멸 자체는 언급하지 않는다”며 “초월적 존재나 사후세계 자체도 상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과학은 생명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이 시각 안에서 죽음은 물리법칙이 교란된 무질서 상태인 것”이라며 “과학은 죽음의 극복보다 생명의 지속에만 전념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과학의 논리는 물질이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구성요소를 분석하고, 이른바 물질 간 상호 역학관계를 탐구하는 데 천착 한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그는 “과학에게 죽음은 수수께끼나 탐구 대상이 아닌, 지식과 기술의 한계로 발생된 무질서”라며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는 건 단지 과학이 기술적 한계를 지녔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임을 밝혔다.

즉, 종교 및 철학이 ‘왜’라는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과학은 오직 현상을 인과관계로 분석하는 데만 집중하는 셈이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인간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적극적 삶의 태도를 추구하려는 종교 및 철학과 달리, 과학은 죽음을 단지 기술적 한계로 단정 짓는 것이다. 이른바 그는 “과학은 죽음을 극복하기보다, 단지 죽음 안에서 생명의 연장을 추구한다”고 덧붙였다.

예를 들어, 그는 영국 의료과학아카데미 선임연구원이자 노화 관련 연구자인 톰 커크우드의 말을 빌려, ”2017년 방한 때, 노와 방지를 위한 과학을 통해 생명을 조금 연장할 수는 있다 해도, 죽음까지 극복할 것이라는 생각은 판타지라 규정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최근 인간 수명과 연관 있다는 텔로미어(Telomere)를 전하며, 논의를 진전시켜갔다. 그는 “텔로미어는 DNA 끝에 붙여 있으며, DNA와 염색체 길이가 짧아지는 것을 막는다”며 “다만 텔로미어도 거듭된 복제로 길이가 짧아지면, 세포의 노화 현상이 가속화 되고 이윽고 세포는 죽음에 이른다”고 밝혔다. 텔로미어 발견 이후 텔로머라아제(Telomerase)도 발견됐다. 그는 “텔로머라아제는 텔로미어의 길이를 늘려주는 효소”라며 “과학자들은 텔로머라아제를 통해 텔로미어 길이를 연장하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텔로머라아제의 발견 후 유전학자들은 예쁜꼬마선충(Caenorhabditis elegans) 실험을 통해, 텔로미어 길이가 연장되도록 하여 수명을 6배가 증가시켰다고 한다. 다만, 그는 “이를 통해 인간 수명의 연장을 실용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과학자들은 텔로머라아제가 잠재적으로 암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있음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하여, 그는 톰 커크우드의 말을 계속 인용해, “노화방지를 위한 과학은 다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길로 안내할 뿐”이라고 전했다. 이에 그는 “포스트 휴먼 같은 죽음을 극복하는 불멸의 존재는 어쩌면 허황될 수 있고, 나아가 이는 바벨탑 같은 이상”이라며 유발 하라리가 말한 ‘호모 데우스’를 비판했다.

한편, 그는 “과학은 본래 가치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거대 자본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마저도 차별을 유발 한다”고 지적했다. 즉 과학은 자본과 결탁될 때, 정치적으로 변질 된다. 이에 그는 “과학이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상관관계를 긍정하는 소비자본주의와 만날 때, 만일 엄격히 통제되지 않는 상태라면 원치 않는 방식의 비인간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과학 스스로가 가치중립을 외치지만, 종교와 철학에 의해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이유다. 마치 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살인무기가 될 수 있고, 아니면 가족을 위한 요리를 만들 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은 죽음 마저 차별할 수 있다”며 “안락사, 낙태 등은 자기 생명과 욕망 연장을 위해 타인의 죽음마저 합리화하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지적했다. 즉 혼수불명 상태에서 가족이 결정한 안락사는 죽음의 주체성을 박탈하며, 낙태는 또 다른 생명을 희생함으로 책임 없는 사랑(쾌락)을 정당화 하는 결과다.

또 그는 “과학 기술이 수명을 연장하고 건강한 삶을 보장해준다 해도, 그것은 오직 자본력을 갖춘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일 뿐,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가령, 그는 “가난한 자는 돈을 가진 사람들이 복용할 약을 위한 임상실험대상으로 전락하며, 의료기술이 자본에 의존해 있는 현실에서 빈부 격차에 따라 의료혜택이 극도로 차별화 된다”고 지적했다. 영화 ‘엘리시움’(닐 블룸캠프, 2013)을 제시하며, 그는 “결국 죽음 앞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과학의 선언이 자본력에 따라 생명의 가치를 차등화 시킴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그는 “과학은 이 지점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며 “결국 인간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로, 유한성의 문제를 단지 수명만 연장하는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소위 ‘과학’이 추구하는 ‘가치중립’의 이면에는 정치경제학으로 촉발된 차별이 존재 한다”며 “과학은 죽음의 정치학을 위한 무기를 제공 한다”고 밝혔다. 과학이 종교 및 철학에 의해 통제돼야 하며, 나아가 과학과 신앙이 만나 가치 있는 삶으로 전환돼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그는 “종교 특히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이 비참한 현실에 처해있을지라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해준다”고 전했다. 왜냐면 그는 “예수의 부활은 생물학적인 의미로 죽음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예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안겨다 준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죽음과 함께 살면서도, 오히려 죽음의 위협에 압도되지 않고 생명의 자유와 평강을 누리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며 “이를 가능케 하는 건 오직 믿음과 사랑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을 통해서”라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령의 도움과 능력을 신뢰하면서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 나라는 현실로 경험되며, 죽음은 부활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일 뿐”이라며 “결국 죽음은 예수 안에서 영원히 극복될 것”이라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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