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기·안나오미 선교사 가족. 이들 선교사는 네 아이들 가운데 셋을 입양해 모두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정선기 선교사 제공

"지금도 한국에 가거나 소식을 들으면 누가 집사고 차 샀다고 하는 건 하나도 안 부러워요. 그런데 아이를 입양했다고 하면 정말 배가 아파 죽겠어요(웃음). C국에 있으면서 한국 선교사나 사역자 가정이 모두 11명의 아이들을 입양할 수 있도록 소개해 줬어요. 입양도 중독성이 있어서 한 명을 입양하면 동생을 또 입양하고 싶어지거든요. '입양전도사'라는 타이틀이 무엇보다 가장 자랑스럽지요."

[미주 기독일보] 정새별(15), 정새날(13), 정결(12), 정휼(10)… 가슴으로 낳은 아이 셋과 배 아파 낳은 아이 하나. 첫째, 둘째, 셋째는 모두 미국에서 7학년을 같이 다니고 막내는 5학년을 다닌다. 흔히 '입양'이라고 하면 생기는 편견이나 오해는 이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한국과 C국, 미국에 살면서 부모 못지 않게 '선교사 훈련'을 단단히 받은 연유인지 성숙하지만 동시에 순수한 미소를 잃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평온함 마저 느껴졌다. 기독일보는 안식년을 맞아 애틀랜타에 머물고 있는 정선기·안나오미 선교사 부부를 지난 12일(현지시간) 만났다.

■ '입양'과 '선교'를 예물로 주고 받고…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6인 가족'

결혼 전부터 '입양'을 꿈꿨던 청년 정선기(男)는 'C국'을 가슴 깊이 품고 기도하던 청년 안나오미(女)를 만나 결혼 예물로 '서로의 비전'을 주고 받았다. 결혼 전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 적어 내려간 '미래 이력서'에는 첫째를 낳고 둘째부터 다섯째까지 입양하고, 입양이 끝나면 C국으로 가서 선교하고 이후 미국에 와서 공부한다는 장황한 계획이 있었다.

돌아보니 방법이나 시기는 달랐지만 틀림없이 계획했던 것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안에서 모두 이뤄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 이들은 가장 먼저 소중한 아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나 하나 꺼냈다. 첫째 아들 정결을 낳고 3살이 됐을 때, 4살이 된 누나 새날이를 입양했다. 사랑을 독차지 하던 결이 갑작스런 변화에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아기를 고아원에서 보낸 새날이 역시 적응이 힘들어 온 가족이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고 안나오미 선교사는 회고했다.

이후 환경을 바꿔보고자 서울로 이사했고, 얼마 안돼 아토피가 심해 정서적인 문제까지 겪고 있던 8개월 된 휼이를 입양했다. 다행히 휼이는 1년간 놀이치료를 받고 아토피는 물론 정서적으로도 회복돼 정선기 선교사 가정에 큰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 선물 같은 아이가 됐다. 결이 역시 동생이 생기니 많이 의젓해 졌고, 자연스럽게 누나와의 관계도 좋아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안돼 홀트 측의 연락을 받고 만 8살이 되기 직전의 새별이를 입양했다. 통상 만 8살이 되면 영아원에서 육아원으로 넘어가는데, 이후에는 입양이 불가능하다. 홀트 측에서 너무나 착하고 예쁜 아이여서 육아원으로 넘어가기 전 정선기 선교사 가정에서 입양해 주길 바란 것이다. 그렇게 당시 8살이던 큰 딸, 새별이가 왔다.

세 명의 입양자녀들은 모두 본인들의 입양사실과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정선기 선교사 부부가 입양 당시 받았던 자료를 통해 종종 아이들에게 입양과정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특히 막내 휼이는 생모(生母)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생부(生父)가 키가 큰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입양 모임에 가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곤 한다. 세 아이 모두 가족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자신의 성장과정 부끄러워하기 보단 남들과 조금 다른 특별한 이야기로 삼을 정도로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 온 가족이 선교사로 바쁘게 사역…갑작스럽게 발견 된 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꾸려진 6인 가족의 다음 행보는 바로 C국이었다.

"그곳에서 7년을 있었어요. 언어도 언어지만 문화가 너무 달라서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들은 오히려 넷이 같이 학교를 가면서 빨리 적응했어요. 넷 다 같은 유치원에 넣었는데, 작은 아이가 울면 큰 아이 반에 넣어주고, 큰 아이가 울면 작은 아이 반에 넣어주면서 서로 위로를 받은 것 같아요. 나이는 달라도 고아원에 있던 기간 동안 교육을 받은 정도가 달라 셋은 늘 같은 학년이었어요. C국에서는 그래서 세 아이가 5년 동안 항상 같은 반이어서 싫어했는데, 미국에 와서는 처음으로 다른 반이 돼서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네 아이의 아버지인 정선기 선교사

C국에서 정선기 선교사는 현지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사역과 한인교회 사역을, 안나오미 선교사는 중국교회 주일학교를 셋업하는 사역을 열심으로 감당했다. 그 와중에 고아로 자란 고등학생을 딸처럼 맞아 함께 살았고, 떠난 후에는 안 선교사의 사역을 이어 감당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또한 한국어 찬양을 중국어로 번역해 333곡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바쁜 중에도 '운명처럼' 인근에서 유일하게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과 연결돼 아이들을 도왔고, 주변 사람들에게 입양을 적극 권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한참 바쁘게 사역을 하던 중 4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게 된 안나오미 선교사에게 갑산성암이 발견됐다. 이미 임파선까지 전이된 상태여서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선교를 내려 놓을 수 없어 수술을 받고 다시 돌아가 2년 뒤 다시 전이돼 재수술을 해야만 했다.

"다른 것보다 아이들에게 다시 한번 엄마를 잃게 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매달렸어요. 어릴 때라지만 고아원 생활을 3년, 8년 정도 했기 때문에 부모가 없다는 것, 엄마가 없다는 것에 대한 아픔이 커요. 막내는 생모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또 암이라니까 정말 많이 아파했어요. 다행히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셔서 지금까지는 다시 재발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 아이들을 통해 주신 '축복과 행복' 너무 커…"꼭 입양하세요!"

지난해 애틀랜타로 와 2년째 안식년을 연장한 정선기 선교사는 조지아크리스찬대학(총장 김창환 목사)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중이다.

현재 C국은 선교사를 색출해 추방하는 분위기여서 다시 C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 힘들 것 같다는 이들은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곳으로 갈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으셔서 저희를 그저 통로로 사용해 주시고, 아이들이 받은 복에 저희는 밥숟가락 얹어 놓는다고 생각해요(웃음). 아이들을 통해 얻는 행복이 너무 큽니다"라고 행복한 미소와 함께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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