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3.1운동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2018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정기 학술 심포지엄이 3일 오후 2시 종각 YMCA 2층 친교실에서 ‘3.1 독립운동의 지역적 전개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개최됐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장 장규식 중앙대 교수의 개회사로 시작된 심포지엄에서 기조발제로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이 나서서 강연을 전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3.1운동
한국기독교역사학회장 장규식 중앙대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그는 3.1운동의 의미를 제시하면서, “3.1 정신은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등평화로 규정될 수 있다”며 “이는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여전히 미완성의 혁명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며 “해방 후 제헌헌법 전문에서도 3.1운동이 언급된 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은 완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인은 당시 3.1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주동자로 나섰다”며 기독교의 핵심적 역할을 역설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참여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성경에서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가 위대한 애국자들”이라며 “구약의 모세, 에스더 그리고 신약의 바울 사도가 좋은 예”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에스더는 자기의 동족을 구하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목숨 걸고 왕 앞에 나가 동족을 구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그는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며 “당시 기독교인들은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적 행위가 아닌 것으로 착각한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반면 그는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며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 거의 모두는 신앙적 결단에 의해 참여했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이승훈 장로와 신석구 목사를 제시했다. 그는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 장로는 평양에서 몇몇 목사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했지만, 당시 그들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원칙을 배웠기에 난색을 표했다”며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책상을 치면서 그들에게 ‘나라 없는 놈이 어떻게 천당에 가?’라며 심하게 호통을 쳤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이승훈 선생은 일제의 재판정에서도 당당히 “한국의 독립은 한국의 영광일 뿐 아니라, 튼튼한 이웃을 옆에 갖는 일본 자신의 행복도 된다”고 밝혔다.

또 그는 “신석구 목사는 1918년 서울 수표교교회를 담임하다 3.1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신석구 목사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더불어 천교도는 교리 상으로 서로 용납키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놓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하여, 김 소장은 “신석구 목사는 새벽 때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결국 그는 3.1운동 참여를 결정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아울러 김 소장은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역할이 두드러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기독교는 3.1운동의 초기 조직화단계의 7개 계열 가운데 6개 계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최초의 독립선언이라 할 수 있는 2.8학생독립선언을 후원했다”고 전했다. 당시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3.1 운동 방법을 그는 제시했다. 바로 그는 “1919년 3월 평남 강서지역에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전단지”라고 소개했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 지며, 신자는 매일 세 때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3.1운동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이를 놓고, 김 소장은 “이는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했던 태도”라며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와 더불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의지할 것으로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그는 “이러한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이라며 “고난 중에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전했다. 바로 그는 “이점이 당시 총인구 1.5%에 불과했던 기독교 세력이 지도적 총 피검자(기소)의 17.6%나 차지하게 했던 주요 요인 이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는 “기독교인들은 3.1운동 초기 조직화 단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전국적 확산 단계에서는 교회를 통해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했다”며 “기독교 조직의 적극적 참여가 없었더라면, 3.1운동은 그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강조했다.

3.1운동의 적극적 참여로 기독교의 피해는 극심했다. 김 소장은 “1919년 4월 5일 일어난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방화 사건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바로, 3.1운동 총 피검자 19,525명 중 기독교인은 3,426명으로 제일 많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는 3.1운동이 교세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걸 재차 말했다. 그는 “당시 장로교는 교회가 1,705개소, 신자 144,062명이고 감리교는 교회가 472개, 신자 35,482명으로 두 교파만 합해도 신자는 179,544명에 이르렀다”며 “3.1운동 후 전년도 대비 교회는 88개소, 신자는 무려 22,409명이 줄었다”고 강조했다.

한편, 앞서 김 소장이 설명했듯이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어느 정도 고수했다. 때문에 그는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에게 사전에 거사 계획을 일체 알리지 않았다”며 “아마 엄격한 정교분리를 교리처럼 가르치던 서구 선교사들의 간섭과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반면 그는 3.1운동에 큰 도움을 준 선교사들을 소개했다. 그는 “미 감리회 한국선교부를 책임지던 웰치 감독은(Bishop Herbert Welch)는 미국에 건너가 교계신문 The Christian Advocate에 ‘1919년 한국 독립운동’이라는 글을 당해 7월 24일부터 4회 걸쳐 게재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그는 웰치 감독이 목격했던 3.1운동의 글을 전했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이 운동에서 사람들이 변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은 다소 오해를 살 만한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마음은 뜨거웠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잇고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이 봉기가 시작되면서, 공포에서 대담함으로 바뀌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약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과 희망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후의 한사람 까지 싸울 것이다’...(중략)... 그들의 용기, 끈기, 독창성, 보여준 조직력은 가장 오래된 선교사(웰치 자신)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또 그는 “평양에 활동했던 익명의 선교사가 초기 3.1운동 관련 자료를 모아 10부로 구성된 ‘한국독립운동 발발’이라는 자료 보고서를 편집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한국독립운동의 개시 부터 독립 운동의 전개 과정 까지 상세하게 설명 돼 있다”며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는 “이 보고서의 9부에는 세브란스 병원 교수였던 스코필드 선교사가 현지를 답사하고 남긴 ‘수원 제암리의 대학살’, ‘수촌 만행 보고서’, ‘화수리의 살인 사건’과 더불어 1919년 6월 5일자 상하이 가제트에 실린 피터스(당시 일본 東山學院 교장)의 ‘한국에서 일본의 도덕적 실패-일본 정부와 국가의 책임’이라는 기고문도 편집돼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그는 “재한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계속 선교활동을 하는 한,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며 그 한계를 지적했다. 나아가 그는 “한국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결국 기독교인들의 만세 시위 가담을 되도록 말리려 했다”며 “또 한국인의 독립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시정 개선 혹은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 정도에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며 한계를 지적했다.

한편, 그는 “3.1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의 한국교회와 무엇이 달라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존경을 받았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당시 한국교회는 신앙적 성격에 있어 지금과 달리, 사사화(私事化)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며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와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또 그는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놓고, 그는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과 거기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겼다”며 “우리는 3.1운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여, 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며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해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 시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그는 “3.1운동에 대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이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3.1운동
송현강 한남대 사학과 교수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이어 송현강 한남대 사학과 교수는 ‘서울·경기지역의 3.1운동과 기독교’를 설명했다. 그는 “기독교의 3.1운동 참여 과정에 있어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다”며 “첫째 평안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장로교의 흐름, 둘째 북감리교의 운동 흐름, 셋째 남감리교의 흐름”이라고 제시했다. 이어 그는 “북장로교, 북감리교, 남감리교의 네트워크를 통해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가담했으며, 교회와 학교들이 있어 인적 자원을 정교하게 동원해 만세시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그는 “서울지역 3개 교단 소속 교회는 연합단체인 YMCA 등과 유대 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3.1운동을 통해 큰 규모의 연대를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그는 “각 교단이 네트워크로 구성돼 포물망으로 3.1운동이 불붙듯 번져갔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여러 인물들을 소개했다. 그는 북감리교에 있어 중요한 인물인 박희도를 설명했는데, “박희도는 1919년 2월, 경신학교 출신으로 당시 연희전문, 보성전문, 경성의전, 경성공전, 경성전수학교의 대표들을 규합해 3.1운동을 위한 상호결속 다짐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그는 “당시 3.1운동은 학생 세력이 중요한 동력 이었다”며 “연희전문 김원벽, 세브란스의전 김문진과 이용설의 소임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북감리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이사 겸 정동교회 목사였던 이필주는 배재 학생 간부들과 함께 3.1운동을 모의했다”며 “당시 3월 5일 시위에서 배재 학생 18명이 체포됐고, 당시 제 5대 교장인 H.D 아펜젤러는 교장의 인가를 취소당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1919년 2월 28일 북감리교의 이화학당 학생들은 정기회합에서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북감리교 계통의 이화학당 간부 학생들은 정동교회 담임 목사인 이필주로부터 감화를 받고 있었다”며 “이화 학당 대표였던 신덕심·유점선·김마리아·노예달의 주도하에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시민들과 합세했고, 종고 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고 전했다. 하여 그는 “일본 헌병은 28명의 이화 간부급 학생들을 검거해 5명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그는 “당시 감리교회는 3.1운동 모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물론 그는 “장로교회 역시 3.1운동에 적극 참여해 수난을 당했다”며 “당시 연동교회는 대표적 3.1운동의 거점기지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에 갇혔던 김 마리아를 비롯해, 김백원, 함태영, 이혜경, 정선희, 이정숙, 김영순, 신의경 모두 연동교회 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당시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했던 선교사들과 달리, 적극 3.1 운동을 정중동(靜中動)으로 지원했던 당시 세브란스병원 교수 스코필드 선교사를 제시했다. 그는 “앞서 김 소장이 말했던 것처럼, 1919년 4월 4일 세브란스병원의 스코필드는 사건 현장을 직접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자택에 부상자들을 숨겨줬다”며 “4월 7일, 진관내동에 가서 만세 부른 후 태형 맞고 나온 부상자 정태순·정태석을 방문해 세브란스에 입원시켰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그는 “이런 식으로 입원시켜 도와준 환자는 30명에 달했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제한적이지만 3.1운동 정신을 긍정한 재한 선교사도 소개했다. 그는 “2월 11일 서울 선교사 쿤스와 저다인·빌링스는 응접실에 태극기를 걸어 놓아 한국인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며 “또한 쿤스의 집에서 클라크·탐스·빌링스·루이스 등 남녀 선교사 23명이 모여 3.1 운동 사태를 논의했다”고 전했다. 나아가 그는 “4월 17일 선교사연합회 특별위원회가 정동 빌링스 선교사의 집에서 개최돼, 3.1운동으로 기독교인 박해 및 선교방해 상황을 조사해 본국 선교본부에 알렸다”고 전했다. 비록 제한적이지만 3.1운동의 상황을 알렸다는 점에서 재한 선교사들의 노고는 기억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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