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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목)

[서진한 설교] 내 옆에... 권력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2. 27 06:42  |  수정 2018. 04. 02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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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창17:1-7, 15-16, 롬 4:13-25, 막 8:31-38

대한기독교서회 서진한 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사장·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서진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제공

최근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제게 가장 혼란스럽고 충격인 것은 미투(# Me too), 성폭력 문제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광범위하고 심각할 줄은 몰랐고, 그런 상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남녀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저는 오늘 본문을 권력의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17:1-7과 15-16)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번성할 것이고, 나는 너와 언약을 맺고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의 자손대대로 영원히 자손들과 언약을 이행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리고 너의 아내 사라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이 두 단락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본문 사이에 할례에 관한 명령이 있습니다. 성서공회의 새번역 성서를 보면 오늘 본문이 포함된 17장 전체의 소제목이 달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할례: 언약의 표" 입니다.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사실 이 본문의 핵심은 할례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서일과는 할례를 제외한 앞 뒤 단락을 선택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만 아니라, 자손들, 즉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또 이스라엘 남자만 아니라 그 집에 들어오거나 그 집에서 태어난 종도 남자라면 모두 할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만약 자손 중에 누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니,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끊어져 나갈 것이라고 합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상 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7: 8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지금 나그네로 사는 이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뒤에 오는 자손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겠다고 하십니다. 언제까지라는 기한도 없이 영원히, 선민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창세기의 이야기에 익숙해서 별 생각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선민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선택받은 백성’이란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은 전제합니다. 1등 백성이 있다면 나머지는 2등, 3등, 아니 그냥 순서에도 들지 못한 백성들도 있게 됩니다. 가나안 땅은 그 선민들이 있어야 할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를 받은 선민들에게 그 땅을 주셨다면, 그 땅에 있는 다른 족속들은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화(化) 혹은 유대화 되든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그 땅에서 떠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팔레스틴 땅의 대립과 전쟁도 이 선민주의와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전통적 생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의식은 그들이 강대한 외세에 시달리던 때, 또 식민지가 되었거나 나라가 망해서 외국에 포로 끌려간 때는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중요한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버틸 힘이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강성할 때에는 그 선민의식은 ‘권력’이 되었습니다.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과 우월의식을 갖게 되고, 그들에게 동화(同化)를 요구합니다. 과거 일본제국이 우리 민족을 지배하면서 동화를 요구한 것처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동화, 유대화의 상징은 ‘할례’입니다.

 그런데 이 선민의식에 따른 유대화, 곧 유대사람처럼 되기를 강요하는 유대화는 사도 바울에게서도 문제가 됩니다. 초기교회에서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기를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돼지고기처럼 유대인들이 지키는 금지 음식 전통을 지킬 것도 강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만 아니라 바울의 여러 서신서들을 보면 당시 이런 유대화 요구가 매우 강력했음을 알게 됩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이런 문제로 인한 갈등이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당시 교회의 우두머리인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베드로가 갈라디아에 와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탁에 같이 앉았는데, 베드로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하고 신경 쓰였던 것 같습니다. 마침 예루살렘에서 “할례 받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오는 것을 알고, 비난 받을 것을 염려하여 그 자리를 떱니다. 이 일에 대해 바울은 할례로 구원을 받느냐며 베드로의 태도를 맹렬히 비판합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 아니라 믿음으로 된 것이다. 율법은 죄를 만들었다. 율법이 없었다면 죄짓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논리적 비약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원래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 정신’ 위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의 정신은 지금도 따라고 실행해야 할 가치입니다. 또한 율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논리도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법률이 없다 하더라도, 어떤 일을 저질러서 남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법 조항에 걸리고 아니 걸리고를 떠나서 잘못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서신서에서 ‘율법’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할례를 받는 것, 부정한 식품을 먹지 않는 것 등을 포함해서 유대화를 강요하는 것 모두를 대표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유대화 강요에 관한 여러 주장을 한데 묶어서 ‘율법’이라고 규정하고, 그 주장들을 공격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그런 데서 오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은 논쟁에 아브라함을 끌어들입니다. 율법이 모세시대에 전해졌다면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매우 좋은 논리적 근거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알고 율법을 따랐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따름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 그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하는 것으로 구원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점에서 생각해 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우월성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선민, 즉 피가 좋은, 순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가운데는 순혈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차별’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 약속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브라함과의 직접적인 혈연관계를 깨뜨려버립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피를 타고나야만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이냐? 아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브라함 자손이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개념을 혈육의 세계에서 뜻의 세계, 신앙의 세계로 옮겨놓음으로써, 유대교의 한계를 벗어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일은 이스라엘의 혈육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로 열려진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주의를 떠나면서 비로소 세계의 종교로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를 읽으며 주로 교리라는 눈으로 읽게 됩니다만, 바울은 책상에 앉아서 연구만 한 오늘날의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편지는 각 지역에 세워진 신생교회들을 염려하며, 그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화를 내고 책망하며 또는 칭찬하고 극진한 가르침을 주려는 현실적인 필요를 따라 쓰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를 신학체계를 세운 신앙논문처럼 읽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주요한 신념이지만 동시에 ‘율법’이라 칭하는 유대 우월주의를 깨뜨리려던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신생 교회 내에 생겨난 강력한 우월주의와 권력에 맞선 것입니다. 혈육관계와 상관없이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바울의 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권력’이 되지 못하도록 만든 ‘권력 해체’의 선언입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막 8:31-38)은 예수 수난 예고 중에 첫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의 수난 예고는 모두 세 번 나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8장에 첫 번째, 9장에 두 번째, 10장에 세 번째 예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자는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살아난다.”고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이 확립된 이후입니다. 그러나 스승을 따라 길을 걷던 제자들의 상황은 다릅니다. 스승이 예루살렘(권력 중심지)을 향해 가면서 “내가 죽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제자들에게 사흘 후에 살아난다는 것은 불확실한 반면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말은 눈앞에 닥친 현실적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수난고지 때는 무서워서 아예 말도 붙이지 못했고,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첫 번 고지 때는 베드로가 옷깃을 당기면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항의합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크게 나무라면서 자신이 장로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의 배척으로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 번째 고지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이방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방사람들은 로마 총독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장로, 대제사장, 율법학자는 당시 유대의 최고 권력이었습니다. 로마가 뺏은 정치권력를 제외한 나머지 권력의 총합입니다. 그 권력층과 로마의 결탁으로 자신이 죽을 것이라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성전모독죄도 씌우지만, 주로 활동 초기부터 문제가 된 정결법과 안식일 법을 위반이 정죄의 이유였습니다. 같이 앉으면 부정하게 되는 죄인, 세리들과 같이 앉았고 나병환자를 만졌으며, 안식일을 공개적으로 어겼습니다.

 마가복음은 매우 격동적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2장에서) 안식일에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 비벼먹습니다. 안식일에 하면 안 되는 ‘노동’을 한 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항의하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 아니라는 아주 결정적인 말씀을 선포합니다. 혹시나 당시 율법을 무슨 종교영역에 국한된 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유대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현재 우리의 실정법과 같은 것입니다. 그 실정법에 신성까지 덧씌운 무서운 법이었습니다.

 유대의 소위 ‘경건한’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께 데리고 나오자, 그들은 지켜봅니다. 예수가 병자를 고쳐주는지 아닌지를! 촌각을 다투는 병이 아니니, 안식일 이후로 미루어도 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날 그 자리에서 그를 고쳐줍니다.

 그러고서는 안식일에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따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폭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이것은 패러다임의 완전한 전환입니다. 안식일 법의 근간을, 그 기준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 죽일 모의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법을 어기라, 폐기하라 하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안식일 법을 어떤 시각에서, 누구의 자리에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병들어 고통 받는 중풍병자의 입장에서 봤습니다. 그들은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배고픈 사람 먹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편에 섰고 그들의 입장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당시 권력에게는 대단한 도전이 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세 번 고지하는데, 그 세 번이 다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첫째로는 ‘내가 죽는다.’ 둘째로는 ‘죽은 뒤 살아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교훈이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교훈들은 본래 수난고지와 한 덩어리 전승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마가는 이 교훈들을 수난고지에 이어놓았습니다.

 첫 번째 고지 후에는,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달릴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십니다.

 두 번째 고지에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서 다퉜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누가 더 높은가, 귀한가 하는 소위 권력서열 문제로 다툰 겁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오신 후에 무슨 이유로 다퉜는지를 물으시면서, “첫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꼴찌가 되고 낮아져서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안고서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한 것이고,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 번째 고지는 수난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체포되고, 넘겨지는 데 대한 설명들이 있습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스승은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시는데 제자들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붙이지 못하고 멀찍이 따라갑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성에 들어가는데, 복음서를 잘 살펴보면, 죽음을 각오한 혁명군이 성으로 들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읽힙니다. 긴박한 상황에서 내가 성공할지 실패해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실패하면 죽을 것이고, 성공하면 그 후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우리 부탁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십시오.” 이것은 성공했을 경우를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마구 누르고 고관대작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위대하고자 하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 역시 섬김 받으러 온 것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라’거나 ‘모든 사람들의 꼴찌가 되라’는 첫 번째, 두 번째 고지에 이어지는 교훈과 맥락이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데 왜 처형당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잘 섬긴다면 권력자들에게 처형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고분고분하고 무슨 일에든 봉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그를 내쫓거나 죽이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 율법체계에서 밀려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권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그들에게 피해를 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는 일이 됩니다. 이것은 ‘편애의 섬김’입니다. ‘편파적인 섬김’입니다. 헤롯도,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도 섬겼으면 좋았을 것을! 주님께서는 그 체제에 짓밟힘을 당하는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정치’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만드는 이념과 제도를 사회에 세웁니다. 누구에게도 불편부당하지 않는 제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정치인에게는 그것이 중요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앙’은 약한 사람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편애하려고 합니다. 물론 신앙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선은 쫓겨나고 짓밟힌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동시에 그들을 짓밟고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신앙 안에서, 사랑과 분노는 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은 정치일 수 없고, 신앙인은 법조인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사회에, 성적으로 짓밟힌 그 여성들, 그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통로가 있었고, 그 고통을 함께 공감하고 저항할 여지가 남아있었다면, 이렇게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이런 일들이 덮여 있다가, 비 온 뒤 죽순 솟듯 이렇게 터져 나오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그런 점에서 ‘신앙’이 없거나, 적어도 신앙이 희박한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세웁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죽음,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은 어이없는 실수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이 살아온 삶의 결과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아픈 사람들의 편에 섬으로써 권력자들에 맞섰으니, 적어도 눈 밖에 났으니, 수난은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결과이며, 그 결과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삶은 그분의 십자가와 무관하게 되고, 그분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 십자가를 향해 가는 마지막 길에 제자들이 동행합니다. 여러 해 동안 같이 일하고 뜻을 나눴던 제자들이 이 길에서 스승과 정반대의 생각을 합니다. 몸은 같은 길 위에 있지만, 바라는 바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기존 방식의 권력, 현재 세계의 권력을 갈망합니다. 스승은 고독합니다. 그 길 위에서 홀로 외롭습니다. 죽음은 눈앞에 있는데, 사랑하는 제자들조차 그와 함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 고통, 죽음을 앞둔 수난의 외로움 그것은, 성폭행을 당하고, 낙태를 하고, 그러고서도 또 성폭행당한 피해자들, 그러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의 외로움, 고통과 억울함과 겹쳐집니다.

 권력이란 개념에는 모든 형태의 권위, 혹은 세력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누가 정권을 잡느냐 하는 소위 정치권력, 국가권력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경제적 권력까지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권은 짧고 재벌은 길다’는 말 흔히 농담처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꼭 그런 데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사회 구석구석에, 이러저러한 모든 ‘조직’에, 모든 ‘관계’에 다 있는 것입니다.

 저는 권력을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의 발전 과정에 국가나 왕조는, 왕 될 만한 힘을 가진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다수에게 복종만을 강요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국가나 왕조의 집중된 권력과 힘을 통해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했습니다. 만약 막지 내지 못하면 백성들은 살육당하고 노예가 되었습니다. 공동의 생존이 걸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권력이란 필요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권력이 통제되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침묵하게 하는 칼이 됩니다.

 연이어 여기저기서, 그것도 우리의 일상 가까운 데서 터지는 성 폭력, 미투 고발을 보면서, ‘아 내 주위가 전부 권력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부모로서 자식에게 강요할 때, 나는 권력일 것입니다. 내가 선배로서 후배에게 뭔가를 계속 요구하고 뜻대로 끌고 가려 할 때, 나는 권력일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부목사에게 요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내고… ‘아! 이것이 권력이었구나!’ ‘내 바로 옆에도 권력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 더 보태면, 예수님께서는 그냥 말씀으로만 하셔도 될 것을, 굳이 어린애 하나를 불러내 안고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흔히 교회 설교에서 ‘어린아이’를 어떻게 표상합니까? 순진무구, 때 묻지 않은 존재,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물론 어린아이에게 그런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전혀 아닙니다. 지금 시리아에서 내전이 벌어지는데, 티브이에서 가끔 접하지만, 가장 처참한 것은 아이들 아닙니까? 아이는 완전한 약자의 상징입니다. 자신의 수난을 고지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우리 주위 벌어지는 일들을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족을 하나 붙일 생각입니다

 창세기 우리가 읽은 본문은 17장이었습니다. 이 본문 뒤에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복 주시겠다면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년에 올 때 네가 자식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나이가 99세이고, 사라의 나이도 90으로 경수가 끊어졌는데, 무슨 수로 애를 낳는다는 말인가?”합니다. 그래서 그냥 아들 이스마엘이라도 복 받고 잘 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창세기 18장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마 17장보다 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라의 웃음”입니다.

18장에서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들이 대접을 받은 후,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고지합니다. 장막 뒤에서 그 말을 들은 사라가 피식 웃습니다. 그러자 그 사자가 “어찌하여 사라야 웃으면서, 이 늙은 나이에 내가 어찌 아들을 낳으랴 하느냐?”고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강조합니다. 그러자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누가 웃은 것이 진짜입니까? 17장처럼 아브라함이 웃었습니까, 18장처럼 사라가 웃었습니까?

 오늘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이 엄청난 신앙인으로 그립니다. 불가능하여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분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도 믿었다 못 믿었다 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사라도 그랬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믿음을 내세워서, 율법을 내세우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권력에 맞서는 것입니다.

 바울의 뜻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과 관계없이, 창세기 17장과 18장의 두 본문 사이에도 모종의 권력 관계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권력, 사회적 권위의 갈등 관계가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이 두 본문이 어떻게 전승되었는지, 또 어떻게 이런 형태로 정리되었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만약 사라가 웃은 게 확실하다면, 아브라함은 신앙이 좋은 믿음의 선조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17장의 묘사대로 아브라함이 웃었다면, 사태가 좀 꼬이게 됩니다. 왜 여성이 웃었다고 하는 전승이 생겼을까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뭔가 생각할 거리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2월 25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사순절 두 번째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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