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로버트 스트라이븐스 박사가 강연하고 김준범 목사가 통역하고 있다.   ©오상아 기자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설립 22주년 기념 세미나가 25일부터 27일까지 세곡교회(담임 박의서 목사)에서 '장로교회의 창시자 존 녹스와 청교도 목회'를 주제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기념 세미나의 주강사는 로버트 스트라이븐스(Robert Strivens, 영국 런던신학교 학장) 박사이며 강사로는 황봉환 교수(대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김중락 교수(경북대학교), 서창원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가 나선다.

로버트 스트라이븐스 박사는 필립 도드리지와 신학교육. 경건생활.설교를 주제로 강의하며 김중락 교수는 존 녹스와 앤드류 멜빌의 장로교 사상, 황봉환 교수는 존 녹스의 교회 목회사역에 있어서 균형, 서창원 교수는 담대한 설교자로서의 존 녹스를 주제로 강연한다.

25일 필립 도드리지와 신학교육을 주제로 강의하며 로버트 스트라이븐스 박사는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는 오늘날 그의 찬송으로 인해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오늘날 영국의 개혁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들에 그의 찬송들이 들어있다. 18세기의 목사였던 도드리지의 찬송들 중에 아직도 거의 20여곡의 찬송이 불리고 있다"며 "하지만 도드리지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목회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있어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필립 도드리지는 1730년부터 1751년에 죽을 때까지 노샘프턴(Northampton)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했고, 캐슬 힐(Castle Hill)에 있는 회중교회의 목사로 봉직했다.그 21년 동안, 적어도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그의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했고 그들 중에 120명은 목회자가 된 것으로 추산된다"며 "그는 그의 비교적 짧은 생애의 끝에 이를 즈음에, 영국 안팎에서 그 시대에 가장 탁월한 교육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도드리지의 초기 생애는 사무엘 클락(Samuel Clark) 목사와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1702년 런던에서 태어난 필립 도드라지는 성년이 되기 전 부모를 모두 잃고, 런던의 북쪽에 위치한 세인트 알반스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고 거기에서 사무엘 클락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15살쯤 회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클락 목사는 필립 도드리지의 평생의 친구이자 멘토가 된다.

또 클락 목사는 목회자가 되기를 소원하지만 학업을 시작할 학비가 부족했던 도드리지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그가 공부할만한 학교를 찾을 때까지 필요한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로버트 박사는 많은 날들 동안 학비의 부족이라는 장애물을 위해 기도해왔던 "필립은 이 제안을, 주님께서 자신을 목회 사역을 위하여 훈련받으라는 주님의 분명한 인도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이에 필립은 1719년 레스터(Leicester)에서 가까운 킵워쓰(Kibworth)에서 존 제닝스 목사에 의해 운영되던 아카데미에 입학해 학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로버트 박사는 "이 아카데미 또는 학교들은 영국 교회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분열로 인해 생겨난 결과물들이었다"며 "17세기에, 도드리지가 태어나기 약 40여년 전에 성공회 곧 국교회는 그 소속 목사들이 예배와 예전과 설교에 있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했다. 기존교회의 고위직에 있던 많은 자들은 청교도들과 개혁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당시 영국에서 영향력을 얻어가고 있던 청교도들과 개혁자들의 설교에 강력한 탄압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결과 1662년에 선포된 법령은 모든 성공회 목사들로 하여금 공동기도서의 예전과 교리를 준수하도록 했지만 그러한 면면이 전적으로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았던 많은 목회자들이 일어나게 됐다"며 "그들은 그 법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고, 그 결과 2000여명의 목사들이 성공회의 목사직을 박탈당했다"고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은퇴를 했지만, 대다수는 성공회 바깥에서 계속 목회 사역을 했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의 사역의 효율성을 제한하는 법들이 계속 통과되며 박해가 계속돼 벌금이 부과되고 투옥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국교도(Dissenters)'로 알려진 이들의 목회는 멈춰질 수 없었고, 위정자들 또한 결국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관용령(Toleration Act)라는 법령이 통과돼 그들이 계속 목회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럼에도 법에 의한 어느 정도의 불이익은 감수해야 했다.

그들은 캠브리지나 옥스퍼드 같은 잉글랜드의 대학들은 졸업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만의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법이라 정부 당국에서 많은 핍박도 있었지만 18세기 초에 이르면서 규제들이 점점 풀렸다. 그러면서 성공회에서 추방당한, 비국교도 진영의 학교들은 영국 개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로버트 박사는 "필립 도드리지가 17세의 나이에 입학했던 학교도 바로 이런 비국교도 학교들 가운데 하나였다"며 "그가 거기에서 그의 선생님 존 제닝스 목사로부터 받은 4년의 교육은 그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훗날 자신의 학교를 세워서 운영했을 때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소개했다.

그는 "제닝스는 당시 비국교도 진영에서 성장하던 목회자 그룹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리처드 벡스터의 신학적 관점(Richard Baxter)과 존 로크(John Locke)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으며, 신앙에 있어서 어떤 인간의 신조나 체계를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며 도드리지의 제닝스에 대한 말을 인용했다.

"그는 어떤 특별한 인간의 체계를 전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때에는 칼빈주의자였고, 어떤 경우에는 항론파(Remonstrant, 화란 교회에서 칼빈주의를 반대하며 알미니우스의 견해를 따랐던 자들)였고, 어떤 경우에는 백스터주의자였고, 어떤 경우에는 소시누스파(Socinian)였으며, 진리와 증거만이 그를 결정했다"

로버트 박사는 "이것은 제닝스가 그의 학교 교육에 접목시킨 방식이었다. 성경은 인간이 만든 모든 체계들과 신조들과 신앙고백들을 뛰어넘는 유일한 가이드가 되어야 했다"며 "학생들은 어떤 특정한 견해를 고수해야 된다는 강요를 받지 않았으며 모든 문제들은 스스로 조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으며, 오직 성경에만 호소하며 그들의 조사에 비추어서 그들이 이르게 된 견해를 주장하도록 가르쳤다"고 했다.

도드리지는 제닝스에게 받은 교육에 대해 "그(제닝스)는 언제나 성경이 정통의 유일한 표준이라는 것을 우리의 생각에 주입해준다. 또한 그는 질문의 자유를 극도로 격려한다. 그는 모든 주제에 관한 모든 종류의 저자들을 우리에게 소개하되, 감염을 두려워하여 이단적인 부분들을 뛰어 넘어가라는 충고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우리는 모든 견해들을 가진 작가들을 참고로 했지만 우리에게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도드리지는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했다. 로버트 박사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침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났다"며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그 학교에서 추구되던 집중강의 외에도, 그는 60권의 주요한 대작 고전들을 읽으면서 인용문들을 빼곡하게 복사해 놓은 노트를 함께 작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또 자기자신을 위해 '학창 시절 행동 지침을 위한 규율들'이라는 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로버트 박사는 "1723년 1월 도드리지는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서 조사 되어 목회자에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그리고 바로 그 지역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도록 요청을 받았는데 바로 같은 해 제닝스가 갑작스럽게 죽게 돼 도드리지는 킵워쓰에 있는 제닝스의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아서 그곳에서 목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갔다"고 했다.

▲한국개혁주의 설교연구원 설립 22주년 기념세미나가 25일부터 27일까지 세곡교회에서 진행된다.   ©오상아 기자

그러다 1725년 인근 마을인 마켓 하버러로 이주해 데이비드 썸(David Some) 목사와 협동 목회를 수행하도록 강권을 받아 그리로 가게 됐고, 그의 나이 25살이었던 1727년 후반기에는 신학교육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로버트 박사는 "아마도 데이비드 썸 목사가 도드리지에게 제닝스의 학교를 다시 출범시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한 것으로 보인다"며 도드리지는 그의 절친한 친구들과 서신을 통해 이 문제를 나눴고, 실제 그의 친구 토마스 선더스(Thomas Saunders)는 자신의 동생을 목회자로 훈련시켜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도드리지는 그 일에 자신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거절했다.

로버트 박사는 "그러나 1729년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도드리지가 선더스의 동생을 포함한 몇 명의 학생들을 받아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1729년 4월 데이비드 썸 목사는 지역 목회자회에 정식으로 도드리지에게 마켓 하버러에 학교를 세우도록 요청하자고 제안했다"며 "이 제안은 참석 목회자들의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전했다.

같은 해 9월, 도드리지는 노샘프턴에 있는 캐슬힐 교회로부터 담임목회자로 청빙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마켓 하버러를 떠나기를 거절했다. 그가 세운 학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랜 설득 끝에 도드리지는 그 청빙을 받아들디고 노샘프턴 교회에 그의 학교도 함께 간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1730년 1월, 27살이었던 도드리지는 노샘프턴에 학교를 새롭게 세우고 1년 내에 머시 메리스(Mercy Maris)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도 하게 된다.

로버트 박사는 "도드리지의 아카데미의 일반 학생들의 하루 일과는 여름에는 6시, 겨울에는 7시에 시작됐다. 학생들은 이 시간에 일어나 먼저 기도회로 모였는데, 이 기도회는 학생들에 의해 인도됐으며, 그 다음에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아마도 개인 묵상과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다"며 "학생들은 다시 8시에 가정 기도회를 위해 다시 한 번 모였고 아침 식사가 있었으며 아침 강의들이 있었다. 오후는 일반적으로 짜여진 활동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며 저녁 7시에는 학생들과 가족들은 다시 저녁 경건회로 모였으며 학교의 문은 10시에 잠겼다"고 했다.

또 "학생은 성경에서 말씀을 한 구절을 읽을 것이 기대됐는데 특별히 원어 성경을 사용하도록 했다. 아침에는 히브리어 원전에서 구약성경의 한 본문을 읽고 영어 번역을 뒤이어 읽어으며, 저녁에는 헬라어 성경에서 신약 본문을 읽었다. 성경 봉독 후에는 도드리지가 그 본문에 대해 해설을 하면서 설명하고 거기에 따르는 실천적인 적용을 주곤 했다"며 "이러한 방식으로 학생들은 5년 동안 구약성경 전체를 한번, 그리고 신약성경은 두 번에서 세 번에 걸쳐서 도드리지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로버트 박사는 "학과목은 일반적으로 목회를 의도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3년 동안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목회 후보생들은 일반적으로 5년을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강의들은 라틴어보다는 주로 영어로 이루어졌다(당시 대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언어는 라틴어였다"며 또 "학생들이 도드리지의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과목은 속기로,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기록하고 책들로부터 노트를 정리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속기를 능숙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덧붙여 "신입생들은 고전어와 성경원어에 집중했다"며 "일반적으로 이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이미 기존의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어야 했기 때문에 이전 학교에서 라틴어와 헬라어의 기초를 이미 쌓은 상태에서 입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드리지는 매일 저녁 강의를 통해 학생들이 이들 언어에 대한 지식을 확고히 하도록 했다. 졸업반 학생들은 헬라어를 잘 따라오지 못하는 신입생을 도왔다"고 소개했다.

로버트 박사는 특히 "도드리지는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필수적으로 성경 원어에 능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며 "히브리어를 아는 것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그는 '(히브리어 지식의 습득은) 결코 생략될 수 없는 것이며 우리 시대의 젊은 신학도들은 강단을 위하여 자신이 잘 준비되어 있는지를 판단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큰 반쪽(구약성경을 지칭-역자주)을 연구함에 있어서 다른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설교자들은 성경번역자들의 커다란 은택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덧붙여 "도드리지는 '히브리어를 등한히 하는 것은 비국교도 목사들에게 있어서 매우 드문 일인데 이는 참으로 만족할만한 일이다. 비록 슬프게도 국교회 안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 의해서는 종종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고도 말했다"며 "도드리지는 헬라어에 능통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히 여겼다"고 말했다.

성경 원어가 충분히 정복된 후 과목들은 대부분 신학 과목들로 구성됐다. 로버트 박사는 "비국교도 학교들은 또한 일반적인 교과목들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고 있어 도드리지는 1학년들의 커리큘럼에 논리학, 수사학, 지리학, 순수철학, 기하학, 대수학 같은 과목들의 강의를 포함시켰다"며 "그 다음에 삼각함수, 수학, 자연철학, 경험철학(과학), 그리고 일부 역사과목과 해부학 등이 포함됐고 순수문학에 대한 강조도 있었으며 마지막 학년 강의에는 민법, 고대 신화, 그리고 잉글랜드 역사(특별히 비국교도들의 역사와 성공회로부터의 분리의 원칙들) 등을 강의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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