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daily.co.kr
2018.09.19 (수)

"한국교회, 무엇부터 변화해야 하나?" (고후 6:3-4절)

기독일보 김규진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6. 26 10:18  |  수정 2018. 06. 27 05:18

Print Print 글자 크기 + -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설교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기독일보=설교] 2018년의 6월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민족의 역사의 역사에 크나큰 변화의 한 달이었습니다. 단순히 정치적, 군사상으로만 아닐 우리의 정신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전쟁의 아픔이 있었고 70여년 만에 큰 평화의 희망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자는 환희했고 혹자는 애통했을지라도 2018년의 6월은 우리 모두에게 안팎으로 변화의 달이 되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변화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될지 확실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변화는 우리 사회의 외피는 물론 그 속까지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 요청 속에는 우리 한국교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역사경륜을 믿는 우리가 행여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를 생각했다가는 한국교회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해도 한참을 역행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한국역사 속에서 한국기독교와 교회가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허상과 망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지 역사의 패배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한국사회의 큰 역사적 변환을 맞으면 한국교회, 특히 교회지도자들은 늘 그래왔듯이 이곳저곳 기울이며 또 다른 기회가 없을까 하는 모습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기회를 포착한 사람들이 또 새로운 국가조찬기도회를 주관하면서 저마다 권력에 연줄을 대고자 하는 그런 식의 변화로는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를 해야 한다고 해서 늘 그래 왔듯이 이런 저런 연합기구들과 조직인원들을 헤쳐모여 라고 하면서 변화에 편승해서 자기들의 감투쟁탈이나 이권들을 챙기는 행태들을 되풀이해서는 더욱더 안 됩니다.

이 역사적 변화의 시점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교회를 생각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도 변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변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하면서 이 변화에 둔감해지는 것은 '역사로서의 계시'와 그 계시에 응답하는 '말씀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물론 세상의 역사에서도 도태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한국교회, 무엇부터 변해야 하나? 하고 묻는다면 제일먼저 목사들부터 먼저 변해야 합니다.

목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목사의 목회형식보다는 목사의 자의식과 목회자의 직분, 즉 '성직'이라는 근본부터 먼저 변화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서일과 본문들 중에서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바울사도 시대의 목회자의 부르심과 그 의미를 복음서와 역사적 맥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의 핵심, 목사의 자의식의 자리/성직의 의미와 변화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크나큰 변화의 시대에서 이 질문은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깊이 그 몸으로 먼저 물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20세기의 순교자로 불리는 '디트리히 본회퍼'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회퍼의 질문을 따라 "나를 따르나"는 예수의 부름이 오늘날 목사인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나를 따르라. 28쪽 이하와 '제자직과 십자가',91족 이하. 기독교서회.28쪽)를 함께 묻고 싶습니다.

독일 개신교회는 일종의 국가교회입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목사의 직분, 성직은 교회만이 아니라 국가가 그 신분을 보증하고 그 생활을 보장해 주는 제도입니다.

대신에 국가교회에 속한 성직자들은 정해주는 교회와 기관에서 활동을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안정된 보호아래서 활동하는 목사들은 그 조직에 안주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독일에 나치당이 승리하고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국가교회가 정신적으로 앞장서서 이를 지지하였습니다.

이제 독일교회는 바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되느냐 아니면 제도로서 국가의 교회가 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이것은 목회자들에게 어느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될 것인지를 강요하는 선택의 어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면 국가는 더 이상 그 목사의 신분과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국가의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목사의 성직과 생활을 현실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독일교회는 이런 독일의 엄청난 정치적 변화에 따라 '국가의 교회'가 되느냐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느냐, '국가의 정신적인 공무원'이 되느냐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른 제가'가 되느냐 하는 엄청난 변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본회퍼는 이 변화의 격동 속에서 자신이 보장받고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 아닌 특권(?)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교회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본회퍼 개인의 엄청난 변화만이 아니라 전체 독일교회의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베를린 대학교 신학부 교수를 내려놓고 외롭고 외진 독일 북부 북해를 마주한 '핑겐발데'에서 고백교회의 성직자들을 양성하는 일을 책임 맡았습니다.

거기에 오는 신학생들은 그들의 앞날에 놓인 국가가 보증하고 보장하는 모튼 특권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독일전역에서 모여든 신학생들은 23명 정도에 불과한 소수였습니다. 그만치 예수를 "따르는 것'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어떤 환경에서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중세기에 절정을 이룬 천주교회의 성직자/신부들의 권력과 영광, 부와 명예를 누리는 모습은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어떤 면으로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국가교회라는 제도 아래 또 다른 특권을 누렸던 성직자/목사들의 모습도 안정적인 제도권의 비호를 받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교회역사 속에서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성직들과 수도사들과 전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어 교회가 교회로 이어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감당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개신교회는 국가교회와는 다른 자유로운 교회로 발전했지만 미국이 누리는 지배적인 권력과 부의 영향은 미국교회와 그 목회자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정부가 추구하는 길이 예수의 길과 다르다고 판단되었을 때에 일어났던 '고백교회'운동과 그 성직자들은 모든 제도적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오늘과 내일에 그 역사적인 자리를 잡아야 한다면 바로 이 점에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이를 외면하고 급변하는 사회분위기에 따라서 조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권력지향의 목표를 바꾸어서 간다고 하면 한국교회의 내일은 더욱 암담할 뿐입니다.

한국교회가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내일에서 다시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변화의 구심점이 되려고 하면 교회의 지도자들, 그 중에서도 반드시 복사들의 내면적인 자의식부터 변화하여만 합니다.

목사직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정립과 교육과 훈련,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성격을 새롭게 하는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한국교회는 역사의 후퇴를 맞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나 형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직업이 다르고, 우리의 인종과 나이가 다르고, 우리의 성병이 다르고, 우리의 성격이 다르고, 우리의 배경과 경험이 다르고, 우리의 소속이 각각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라는 이 한 가지,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그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그동안 걸어왔던 많은 목회적, 선교적, 그리고 봉사활동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가나안교인'이 200만에 이른다는 통계가 짐작은 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교회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사정이 이러한데 앞으로 오는 급변하는 한국사회 속에서는 어떤 현상들이 일어날지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변하는 한국사회를 새로운 목회적, 선교적 장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도 한국 사회만큼 변화의 속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시작과 중심에는 성직자주의를 극복하려는 목사들의 시작이 무엇보다도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한국교회, 무엇부터 변해야 하는가 하는 시작은 목사들의 성직자주의에 대한 내면적인 특권의식부터 버려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그것이 국가교회 형태를 가졌던, 정교분리에 철저한 교회형태를 가졌던, 더 나아가 급진적인 종교개혁운동의 일부에서 있었던 것처럼 소위 말하는 '자유교회(Free church)'의 형태를 가졌던 개신교회의 성직론은 천주교회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목사들의 내면적인 변화가 시급하다고 했을 EO, rm 말은 개신교회의 목회자들은 겉으로는 천주교회의 성직자들과 다르다고 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천주교회의 성직자주의에 사로잡혀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그런 천주교회의 성직자중심제도가 오늘 한국천주교회의 장점이 되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반(反) 종교개혁적인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신교회의 목사들이 속으로 성직자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구태여 개신교회를 지켜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협상을 하든 천주교회의 성직자주의로 돌아가 그 특권과 비호를 받는 것이 차라리 정직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만약 개신교회 목사가 외면적으로 천주교회의 성직자주의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내면적으로 또는 목사개인이 안정과 특권을 보장 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런 천주교회의 성직자주의를 알든 모르든 실제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하면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이점을 모든 개혁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직의 개념과 사역98Ordained Pastor-Ministry)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던 시대와 성서적 원시 교회시대에 있어서 사도가 되던 또는 다른 명칭으로 불리던 오늘과 같은 '성직'의 개념과는 다른 교회의 사역자였습니다. 사막교부시대에 이르러서도 '성직'의 개념은 조직화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흘러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교회가 되면서 사정은 더욱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도 로마제국의 통치철학과 조직에 발맞추면서 '성직'의 계급화가 확립되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이제 제국을 통치하는데 정신적 중심에 섰습니다. 그리고 '성직'은 또 다른 '계급'의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신분과 생활의 보호와 보장을 받게 되면서 '교황' 제도가 본격화 되었습니다. 그 결과 중세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이르렀고 도 성직의 타락 또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맞서서 교회와 성직의 본직이 성서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기치 아래 종교개혁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독일 종교개혁은 '국가교회'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발전했습니다.

또 다른 종교개혁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간 교회에서 발전하고 완전한 정교분리의 형태를 가진 교호와 그 사역이 발전하였습니다.

종교개혁시대는 물론 천주교회 안에서도 제도적 교회에 대한 반대운동이 있었습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재세례파 운동'으로 드러나는 '자유교회'는 성직과 평신도의 구별과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정치지형이 완전히 변했던 나치시대에 독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느냐 국가의 통치철학을 따르는 '국가교회'가 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앞서 본회퍼의 경우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신분과 생활의 보호와 보장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모두의 바람입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서 보는 현상은 본말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의 보장을 넘어서 신분의 특권화 의식은 오늘 한국교회를 위기로 몰았고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설자리를 잃고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이 신분의 특권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최저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목사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직제도'의 변화와 역사적 차이를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 서품식(Ordination)을 통하여 신적질서(Ordo)에 들어가는 초자연적인 신품(神品)으로 그 신분(身分/Status)의 변화를 입는다. 사제(신부)가 됨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character indelebilis) 신적특권을 누린다.

개신교회: 안수식(Ordination)을 통하여 교회의 질서에 따라 목사의 직임(職任/Office)을 받는다. 목사(牧師/Pastor)는 신분이 아니라 직분으로 교회의 전체목회를 담당한다.

자유교회(Free church): 취임식(Installation)을 통하여 교회목회 중 설교와 목회사역을 감당한다(Function) 목사는 본질적으로 교회 안의 평신도와 구별되지 않는다.

여기서 '성직'이 안수를 통해 신적질서(Divine Order)로 들어가는 신분(Status)의 변화를 받는 것인가? 아니면 안수를 통해 교회의 사역(Service)로 들어가는 직분(Office)을 받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목사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목사의 직분으로 사역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복음의 일꾼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눅14:27).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원하셨던 공동체는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특권화 된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를 위한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에 따라오는 십자가를 지고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분이 달라지는 것을 위해 따르지 않았고 그들은 그들의 생활이 보장되어서 따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일꾼이 되는 삶의 방식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동체는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가 성장하면서 제도화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특권이 현실적인 특권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조직 안에서 '사도'라는 명칭이 등장하면서 변해 갔습니다. '사도직'은 일꾼들의 특수한 '신분'과 특권을 말하는 것 같지만 고전 4:1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을 사도라고 부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꾼 (휘페레타스/attendants or servants)'이요 '관리인 (오이코노무스/stewwards)'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에는 이 구절들의 제목을 '사도의 직분'으로 부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 합니다".(고후 6:3-4, 새번역). 여기서 '거리낌거리(프로스코펜)'라는 말은 '걸림돌/Stumbling block'을 가르칩니다. 이렇게 조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목사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도 목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나 선한 마음과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길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차라리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막 9:42 새번역).

목사 된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두렵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목사는 아무나 하나?' 또는 '이래도 목사가 되고 싶나?'하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 하나님의 일꾼은 이렇게 살고 이렇게 일합니다(고후 6:5-13)라는 말씀을 들으며 더욱도 '목사는 이래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자백이 듭니다.

오늘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한국교회도 변해야 살 것인데 무엇부터 변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거기서 제일먼저 목사들이 변해야 한국교회가 산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내면적인 자의식, 또는 특권의식이 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의 직분은 신분이나 특권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에게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니 목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처리하신다고 했던 언행이 선한 믿음을 추구하는 성도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는가를 회개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사에서 김교신을 중심으로 한 소위 말하는 '무교회주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운동을 교회를 파괴하는 무리들이라고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 운동은 '무 성직자주의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이 운동은 성직자의 문제를 보면서 문제의식도 없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데 실망한 이들의 교회를 위한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그 옛날의 '무교회주의 운동', '무성직자 운동'을 다시 그리고 깊이 돌아보고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탈출하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변화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만치 교회의 위기의 중심에는 성직자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타락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회개하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수많은 예수님의 선한 종들이 있어 오늘의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의 시작과 중심에는 역시 성직자/목사들의 위기와 타락이 시작이요 중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목사/성직은 특권적인 신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을 따르고 성도들과 교회, 나아가 세상을 섬기는 직분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직분을 신분으로 내심 착각하는 가운데 성직의 타락은 물론 교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가 아무리 급변하고 그 변화의 결과가 무엇인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불확실하더라도 막사/성직들이 마르게 서면 한국사회와 교회의 앞날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 희망은 하나님께서 일구어 가시는 희망입니다.

■ 김고광 목사는 수표교교회 원로목사로, 기독교사상사 편집위원(현)으로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성육원 이사장, 수표교교회 담임, 산타클라라 한인 연합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 상기 설교는 지난 2018년 6월 2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관련기사

Print Print 글자 크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