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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3 (목)

[탈북민 수기] 드보라가 전하는 "나의 출애굽기"

기독일보 노형구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8. 03 15:03  |  수정 2018. 08. 04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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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다시는 푸른 하늘을 못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곧 이어 두고 온 딸이 생각났다. 이제 막 돌을 넘긴 우리 딸... 아직 젖도 때지 못한 딸아이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겠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나는 막무가내로 잡아가는 공안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

“나 잠깐 할말 있소. 우리 딸이 지금 막 돌이 지난 간난 아이라 아직 젖도 때지 못했소. 나 좀 보내주시오”

그렇지만 공안은 매정하게 무조건 조사부터 받으라고 말했다. 조사를 받으러 공안국으로 가는데 그 짧은 거리에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날 조사하는 공안은 집에나 있지 왜 나왔냐, 왜 한국 가려고 했냐 라고 계속 질문했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워 돈 벌러 나온거다. 라고 계속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울부짖음은 통하지 않았다. 조사관은 나에게 “북한 갔다가 2달이면 온다 걱정하지 말라, 이번에 오면 다른데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라...” 하고 위로인지 놀리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하며 나를 구류장에 집어넣었다.

구류장에 들어가니 그곳에는 여러 중국 여성들이 나와는 다른 죄목으로 갇혀있었다. 구류장에 있던 사람들은 젊은 조선 처자가 여기 왜 왔는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어쩌다 잡혀왔는지 감이 없었다. 그때 내 이야기를 듣던 다른 여성들이 나를 한국에 보내주겠다고 했던 브로커의 인상착의를 물어봤다. 내가 이러이러하게 생겼다고 설명을 했더니 그곳의 여성들은 대번에 “그놈이 스파이네. 그 영감 지금까지 많은 탈북여성들을 신고해서 잡아넣었을꺼여” 하며 “그 놈 이리 악하게 굴면서 얼마나 잘사는지 보자” 하며 내 대신 화를 내었다. 알고 보니 그 브로커는 숱한 탈북 여성을 신고해서 잡아 넣은 전문 스파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스파이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표출할 정신조차 없었다. 내가 하도 울기만 하니까 구류장에 계신 분들이 불쌍하게 생각해서 나를 위로하면서 다시 넘어올 수 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면서 5원 10원씩 돈을 모아서 줬다. 그때 당시 나는 한국에 넘어갈 생각으로 집에서 추수하고 번 돈 1,500원을 숨겨온 상태였기에 구류장의 언니들이 주는 돈이 그렇게 큰 도움은 아니었지만 많은 격려가 되었다.

내가 잡힐 때는 대대적인 북송이 있었던 시기였다. 북한과 중국의 연합 작전으로 수많은 탈북자가 잡혔고, 중국 국경 변방 경비대로 이송되었다. 우리는 1주일 만에 북송을 당했다. 다리 건너 북한 땅으로 오자마자 공기가 달라졌다. 북송을 당하면 먼저 보위부의 조사를 받게 된다. 보위부 요원들은 우리에게 쌍욕을 하면서 혹시 중국에서 숨겨온 돈이 있으면 지금 바치면 40%는 국가에 바치고 60%는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며 돈 숨긴 것을 내놓으라고 했다. 물론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개중에 몇 명이 돈을 바치기도 했지만 약속대로 돈을 돌려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어서 신체 검사를 빙자한 고문이 시작되었다. 보위부원의 지시를 따라 모든 사람이 옷을 벗어야 했다. 옷을 다 벗자 이번에는 반복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고문을 시켰다. 소위 펌프 고문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가져온 돈을 자궁 안에 감춰 놓았었다. 혹시나 그 돈이 빠질까 조마조마해가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하기 시작했다. 보위원은 300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시켰다. 조심한다고 했지만 보위원의 똑바로 하라는 호통 소리에다가 붙잡힌 이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허약한 상태였던지라 곧 머리 속이 새하예지고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돈이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했지만 한 50번쯤 했을까… 아니나다를까 자궁 안에 숨긴 돈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급한 마음에 아직 간부가 안봤을 때 다시 숨기려고 손으로 돈을 집으려고 했지만 간부의 발길질이 먼저 날아왔다.

“이 간나 XX, 이 더러운 돈 좀 보라우, 어딜 속이고 돈을 숨기고 있는기야!”

결국 나는 돈을 다 뺏기고 심하게 뚜드려 맞았다. 때리는 매도 아팠지만 그보다 먼저 “내 생명줄이 끊어졌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위부 감옥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땀내, 화장실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잘 때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없어서 다리 위에 다리가 겹쳐서 누웠다. 식사시간이 되니까 밥을 주는데 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건이었다. 누런 옥수수 국수를 물을 한 가득 해서 끓인 것인데 국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국 안에 국수 형체가 남은 것이 없고 국물 색깔만 누런 빛이 있었다. 게다가 국에서 썩은 냄새가 났다. 그것을 작은 공기에다가 3-4숫가락 퍼주면 쭉 마시는 것이다.

나는 너무 냄새가 매스꺼워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코를 막고 불편한 속을 붙잡고 있으니까 옆에서 안먹을꺼면 자기 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내 밥그릇을 받자 마자 허겁지겁 그 국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밥을 한끼 안먹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무 배가 고팠다. 별이 머리 주위을 빙빙 도는 것 같았다. 조사를 받고 자백서를 써야 되는데 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리 냄새가 고약하고 먹을만한 음식이 아니더라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식사시간이 되었고 이번에는 눈 딱 감고, 코 막고 그 옥수수 국수 죽물을 쭉 들이켰다.

식사를 하고 2-3시간 정도 흘렀을까… 뱃속이 엉망이 되었다. 계속 화장실에서 설사를 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의식을 붙잡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먹어야 되니 식사시간에 나오는 죽물을 계속 먹었다. 그렇게 먹고 설사를 하기를 3일을 정도 지나니 항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 날도 설사가 나서 화장실에 갔는데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눈을 떴더니 사람들이 ‘이년이 아직 안죽었다…’ 하고 수근거렸다. 알고 보니 화장실에서 쓰러진 나를 사람들이 발견하고 끌고 왔지만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다음 날까지 깨어나지 않으면 사체실에 끌고 갈 것이었다고 했다.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겼다. 간수는 내가 깨어난 것을 보더니 “이 간나 뒤지지 않고 살았네 명도 길다.” 하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쳤다.

깨어나서 내 처지를 곰곰히 생각하니 너무나 억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체포와 북송, 조사와 고문을 겪으며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 섭섭했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아무런 약도 쓰지 않고 방치했을 뿐 아니라 깨어난 사람에게 명이 길다며 조롱하며 지나가는 간부의 모습에서 조국이 나를 심하게 천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졌다. 비록 탈북은 했지만 내가 조국이 싫어서 강을 건넜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국 시골 깡촌에 있었지만 사람들이 북한의 실정을 지적하고 김정일을 욕할 때 앞장서서 김정일 장군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지 아느냐며 변호했고, 어머니 조국을 그리워했다. 탈북하기는 했어도 내 나라 내 조국 잊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악을 쓰며 변호했던 조국은 내가 죽어갈 때 돌보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약 한 주먹 주지 않았다. 원래 배신감이 더 억울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서러움과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살아서 이 나라를 고발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두려움에 떨다가 갑자기 분노와 고발의 의지가 생기자 이상하게 담대해졌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공안들의 추적에 걸려 집에서 잡혀온 탈북 여자는 보통 노동단련대 형을 받았지만 한국행을 하다가 걸리면 얄짤없이 교화소 행이었다. 기간도 최소 4년 이상이었다. 열악한 감옥의 위생과 식사, 심한 강제 노동, 악화된 건강상태 등을 생각할 때 4년 징역은 거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러했는데 이후 북송된 탈북 여성에 대한 처벌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니 그 끔찍함은 이루 말로 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행을 하다가 붙잡힌 나는 당연히 교화소 행일 것이고, 이 몸 상태로 교화소에 가면 죽음이 가깝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다. 살려면 도망쳐야 한다.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하는 중에 같이 잡힌 노란 머리 염색한 젊은 처자를 만났다. 이 아이는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지 눈이 툭 튀어나온 아이였다. 비좁은 감옥 안에서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아이와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보니 그 아이도 나와 똑같이 탈출할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곧 그 아이와 빠져나갈 궁리를 시작했다. 보위부 조사기간에는 감옥에만 갇혀 있지만 조사가 끝나고 집결소로 이동하기 전 대기 기간에는 외부로 노동을 나간다. 소위 꼬빠꾸라고 불리는 외부 노동 때 일을 하다가 기회를 타서 도망가자고 약속을 했다. 문제는 일단 도망을 가더라도 익숙치 않은 지리를 잘 해치고 강변으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 아이가 자기가 강 위치를 잘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던 중 한 할머니가 붙잡혀왔다. 그리고 옆 남자 감방에서 한 청년이 맞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위원이 “X새끼야!” 하면서 뚜드려 팰 때마다 남자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리는 겁에 질려 웅크렸다. ‘왜 저 남자는 취조실이 아닌 감방에서 맞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던 중에 때리는 소리가 멈췄다. 곧 보위원이 오더니 방금 들어온 할머니를 끌고 갔다. 할머니는 20분 있다가 울면서 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까 비명을 지르던 청년이 할머니 아들이었다고 한다. 보위원이 청년에게 죄수들이 밥으로 먹을 국수 죽을 가져오라고 심부름 보냈는데 틈을 타서 도망쳤다가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칼이 쭈뼛이 섰다. ‘도망치다 잡히면 저렇게 맞아 죽는구나...’ 도망 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생하게 머리 속에 각인이 되었다. 같이 도망가자고 약속은 했지만 너무 무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출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는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침내 조사가 끝나고 대기를 위한 구류장으로 이동을 했다. 여기서 대기하다가 자기 고향 인근 지역 집결소로 이동해서 형에 따라 교화소나 노동단련대로 보내지게 된다. 구류장에서는 보위부에서 먹는 것과는 다른 밥이 나왔다. 옥수수 알을 다 털고 남은 속갱이를 분쇄를 해서 2숫가락 정도를 담아주고 소금물을 국이라고 같이 줬다. 먹는데 씹히지가 않았다. 약처럼 조금 먹고 물로 삼키면서 억지로 뱃속에 집어넣었다. 소화가 되는 것이 기적이었다.

이제 일을 하러 나가야 되는데 문제가 생겼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나를 간수가 일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도망치려면 나가야 되는데 도통 나갈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기회를 못잡겠다 싶어서 아침에 일을 나가겠다고 자진해서 손 들었다. 간수는 “이 허약이가 비칠비칠 한 년이 무슨 일을 한다는기야?” 하고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래도 나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다행히 간수는 귀찮다는 듯이 그럼 한번 나가보라는 식으로 나를 일하는데 포함시켜주었다. 처음에는 일단 정찰을 했다. 이번에 맡은 일은 마을 안에 간부 사택을 짓는 일이었다. 시멘트가 없으니까 진흙을 풀과 이겨서 벽돌 만들어 집을 지었다. 일하는 장소가 마침 마을 안이었기 때문에 잘 숨으면 도망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같이 가기로 한 노랑머리 처자와 2일 정도 낌새를 보았다. 우리가 지금 짓는 건물은 상당히 완성되어가고 있어서 잘못하면 작업장이 바뀔 것 같았다. 작업장이 바뀌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은 무조건 도망가자고 약속을 했다.

드디어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계획한대로 간수에게 배 아파서 화장실을 간다고 하고 일터를 빠져나왔다. 화장실을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면서 골목을 돌다가 한 블럭 정도 지났다 싶었을 때 냅다 뛰었다. 약속했던 노란머리 아이도 어느새 따라왔는지 나와 같이 뛰었다. 정신없이 뛰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대낮에 뛰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꼬빠꾸 생들이 도망친다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곧 우리를 추적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뛴다고 해도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허약 상태인 우리가 추적을 따돌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뛰었지만 도저히 추적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게 죽자사자 뛰는데 산 언덕에 옥수수 밭이 보였다. 당시 옥수수 키가 꽤 컸다. 도저히 더 뛸 힘이 없어서 그 밭으로 뛰어들어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추격하던 사람들은 옥수수 밭에 다다르더니 한 고랑씩 붙어서 수색하기 시작했다. ‘난 죽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매를 맞아 죽은 청년의 비명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매를 맞더라도 단번에 숨이 끊어져야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하나님 살려주세요...’를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하’ 자도 모를 때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았는지 신기한 일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셨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위기 상황은 계속되었다. 옥수수 밭이 해쳐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몇 이랑 옆에 사람 발이 보였다. 나는 혹시 보일까 싶어서 땅에 코를 딱 박고 엎드렸다.

그 일촉즉발의 때에 아래에서 “야 점심시간이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보초 세워놓고 밥 먹고 와서 찾자 하는 이야기가 들렸다. 몇 이랑 옆에 수색하던 사람들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보초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꼭꼭 숨어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너무 놀라 일어났더니 다행히 함께 도망친 노란머리 처자였다. 우리를 추적하던 사람들이 보초를 세우지 않고 다 밥 먹으러 내려갔던 것이다. 한숨 돌리고 보니 내 몸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밭을 해치고 나와보니 우리가 들어간 밭은 농장 밭이 아니고 개인 밭이라 정말 자그마했다. 이 밭에 2명이나 숨어있었는데 안 붙잡혔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기했다.

나중에 성경을 읽으며 다윗이 사울에게 추적 당하는 장면에서 나는 이 옥수수밭의 일을 떠올렸다. 지근거리에서도 사울의 눈을 가리시고 다윗의 안위를 보존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나는 ‘이것이 다윗의 사건이 아니라 내 사건이구나...’ 하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당신을 알지도 못한 때에 그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은혜를 경험하게 하셨다. 그렇지만 아직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탈옥범이 나오면 집집마다 숙박 검열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우리는 감히 어디 이동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산에 2일간 숨어있었다. 낮에는 꼼짝 하지 않고 있다가 밤에 옥수수 대를 꺾어 먹으면서 버텼다. 그러다가 3일째가 되었다. 더 이상은 버틸수 없다는 생각에 강으로 가기로 했다. 밤이 되어 강을 찾아가는데 큰소리 치던 이 노란머리 처자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안그래도 익숙치 않은 곳인데 밤에 이동을 하다보니 더욱 햇깔렸다.

그렇게 강을 찾아 길가에서 해매고 있는데 갑자기 “누구야?” 하는 소리와 함께 후레시가 우리 얼굴을 비췄다. 우리는 너무 놀라 도망도 못가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나를 본 그 사람은 꽃제비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에 노란머리를 한 아이를 보자 도강자인줄 알고 바로 우리를 붙잡았다. 염색 머리가 너무 튀었다. 결국 이렇게 잡히는가 하는 생각에 너무나 허탈하고 앞으로 닥쳐올 일이 두렵기도 하면서 ‘왜 이 년은 왜 머리에 색깔을 칠해가지고 이 고생이냐…’ 하는 생각에 너무 원망이 되었다.

천만 다행으로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우리는 도강하려고 도망나온 것이 아니냐는 추궁에 절대 그런 것이 아니고 배고파서 강냉이대 꺽어 먹으려고 나온 거라고 끝까지 우겼다. 만약 도망치던 그 때 잡혔으면 아마 맞아 죽었을 것이고 또 강변에서 잡혔으면 정치범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히 길가에서 잡혔고 3일동안 도강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어줍잖은 변명이 먹혀들어갔다. 우리는 도망쳤던 꼬빠꾸 나간 곳으로 보내졌다. 새벽에 간수가 죄수들을 다 깨우더니 우리를 세워놓고 “발로 한번만 차도 명이 끊어질 녀석들이... 어딜 도망을 치냐!” 그러면서 죄수들에게 사상비판 하라고 시키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서있는데 죄수들이 우리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느그들 때문에 잠도 못자고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하며 욕하기도 했고, “도망을 치려면 제대로 치지” 하는 비판 아닌 비판도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큰 처벌 없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생각에 크게 안도했다. 물론 그 일 이후로 우리는 외부로 일을 나가지 못하고 계속 안에만 있었다. 그러고는 결국 집결소로 이송되었다. 그때는 비록 생존은 했지만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는 큰 절망감에 빠져있었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이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 집결소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축복의 장소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옥수수 밭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을 이뤄가고 계셨다. (계속)

/출처: 오픈도어선교회 북한개발소식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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