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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행복'이란?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입력 2015. 05. 25 06:40  |  수정 2015. 05. 2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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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키에르케고어학회 공개강좌…한남대 황종환 교수 발표

한남대 철학과 황종환 교수   ©온라인 커뮤니티 캡춰

"행복한 생활은 인류의 오랜 꿈이다. 우리 공동체의 기본규범인 헌법에도 행복추구권이 명시되어 있다. 우리사회의 기성세대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가난하게 살아왔다. 오랫동안 우리사회의 행복은 경제적 발전이었다. 최근에는 행복이 경제적 발전만으론 성취될 수 없다는 자각이 나타났다. 한국사회의 행복지수와 도덕발달은 경제발전에 걸맞지 않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지난 23일 오후 한국개혁파신학연구소에서 한국키에르케고어학회 공개강좌가 열린 가운데, 황종환 교수(한남대 철학상담학과)가 "키에르케고어의 행복한 삶"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던진 첫 말들이다. 그는 우리사회의 경제발전의 차원을 넘어서는 행복추구를 키에르케고어(S. Kierkegaard)를 중심으로 찾았다. 다음은 발표문 요약이다.

"키에르케고어의 행복한 삶"

키에르케고어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인간본성과 모든 것을 알아가는 길이다(unum noris, omnes). 그에 의하면 사람은 영원한 하느님, 자기 자신, 이웃, 자연과 더불어 존엄하고 고상한 성품을 표현하며 살아간다. 또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과 신앙의 관계에서 자기를 찾을 수 있고 실존적 현상인 불안과 절망이 극복될 수 있다. 이 신앙은 윤리적 행위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검증된다. 이런 윤리적 생활은 간접전달(indirect communication)로서 이론의 합리성을 넘어서며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다만 키에르케고어의 시각에서 이타주의(利他主義)의 극단적 형태인 타자를 위해 전적인 희생은 보편화될 수 있는 윤리적 규범이 아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자존(自存)적 혹은 자율(自律)적 존재가 아니기에 신과 단독자적 믿음의 관계를 통해서만 타자에게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수가 세속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오히려 드러내듯이 인간의 고결한 행동은 상대적인 것들을 포기함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더불어 키에르케고어는 인간존엄을 신과 관계에서 찾았고 자신의 구체적 삶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또 세상의 악(惡)의 번창, 의인의 고난, 바람직한 삶 등 삶의 궁극적 물음의 해답을 신학적 철학적 논의가 아니라 구약성경의 욥에서 보듯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서 찾는다. 그는 정열이 관여하는 신앙의 역설을 통해 인간의 윤리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키에르케고어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본성은 신 앞의 단독자적 실존이기에, 자기 의지적으로 존엄을 지키려는 스토아학파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존엄은 수행한 업적에 의하여 인정되지 않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통해 드러나기에 자기다움을 지키며 스스로 편히 있을 수 있어야 한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인간은 신과 인격적 관계를 가질 때 가장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

키에르케고어에서는 자기다움을 선택하는 행위가 바로 도덕적 행위의 근거가 된다. 사람이 윤리적 행위를 위해 분투하고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본성에 걸맞은 자기다움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다움을 찾는 생활은 단지 이론적 설명만으로는 전달될 수 없고 구체적 생활이 동반되는 간접전달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고결한 성품을 추구하는 생활은 다른 것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고결한 생활이 동반되지 않는 지적 이해는 그 자체가 비윤리적이다.

고결한 행동을 통한 행복추구는 독단적으로 얻어질 수 없고 타자와 관계에서 즉 공동체 안에서 그 타당성을 검증받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승화된 고결한 생활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윤리학을 성취된 삶에 대한 학문으로 볼 때 행복은 인생 전체와 연관되기에 도덕적 아름다움은 기술적 우수보다 우선된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성공하길 원한다는 점에서 도덕과 예술에서 승화된 행복한 삶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도덕발달을 승화된 삶의 표현인 고결한 생활이라고 본다면 이런 생활은 특정 시간 즉 학교교과목으로서 윤리도덕의 차원뿐만 아니라 평생에 주어진 과제가 된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인간의 행복은 자율적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과 신앙의 관계를 통하여 출발된다. 이런 출발은 다른 사람 및 자연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완성되어 간다. 맹목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은 그리스도신앙은 도덕발달로서 타인에게 검증되며 '간접전달'을 통해 전해진다. 키에르케고어가 『두려움과 떨림』에서 제시하듯이 인간의 도덕발달과 그 행동은 종교적 근거에서 정립된다. 그에게서 그리스도신앙에 근거한 도덕적 행동은 사회적 관습을 익히는 공손함의 윤리를 넘어서서 개인의 창조적 역할을 표현한다. 그에게 하느님은 단지 도덕법칙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이들로부터 열정적 반응과 책임을 보려는 분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동정(同情)은 지성(知性)아나 보편적 이성(理性)의 차원과 달리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

키에르케고어에게 행복한 삶과 도덕적 생활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서 삶이 승화될 때 구체적으로 가능해진다. 그에게서 '신의 기대(God's expectation)'는 도덕발달로 표현되는 이중운동(double movement)으로서 자기교육의 핵심이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혜와 소명(召命)을 의식했다. 그는 영원한 하느님과 교제하는 자신의 영혼의 활동이 영원한 행복을 확신하게 했고 이런 확신은 고결한 성품으로 표현되는 도덕발달이 되었다. 그는 하느님과 절대적으로 믿음의 교제를 하게 되면서 세상의 시련을 상대적으로 받아들였다.

키에르케고어에서 도덕발달로 드러나는 영(靈)적(Spiritual) 자기교육은 하느님에 대한 침묵의 순종과 기쁨으로 표현되었다. 자신의 일생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죄의 용서에 대한 확신이 들었고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부터 그는 타인에게서 위로를 구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를 갚는 삶을 살고자 했고 실천했다. 키에르케고어에서 타인을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신을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찾는 것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그리스도신앙의 핵심을 자기교육이라고 고백한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윤리적 행동은 신과 단독자적 신앙의 실존에서 가능하다. 그에게서 도덕교육은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자기교육을 통해서 표현된다. 물론 그에게서 자기교육의 핵심은 영원한 하느님과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이 교제하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이런 교제에서 우선적 행동을 취하고 특정인에게 더 많은 기대를 하며 자신을 더 깊은 종교적 차원으로 이끈다는 확신을 했다. 자기교육에 근거하는 도덕교육에서 갈등의 순간은 이 세상의 안정과 신앙에 근거하는 도덕적 생활 사이의 선택이다. 물론 키에르케고어에서 삶의 궁극적 안정은 하느님과 신앙의 교제다.

개인이 삶을 전체로 생각하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 반드시 좋은 상황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도덕발달이 공동체와 연관해서 고찰된다면 사적(私的) 언어가 있을 수 없듯이 공동체의 도덕적 양육이 중요시 된다. 키에르케고아에서 자기교육으로서 도덕교육은 이론적 차원을 넘어서 구체적 생활을 통해 전달되는 간접전달이기에 다른 사람도 비슷한 수준에 다다랐을 때에만 이해된다. 그에게서 도덕교육은 새로운 도덕발달에 대한 이론습득이 아니라 신과 종교적 관계의 심화를 통해 형성된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감각적 향락을 통해 행복을 얻고자 하는 생활에는 불안의 동요가 있고 윤리적 분투에는 내면성과 지속성에서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자신의 의지(意志)에 의존하는 윤리적 생활의 분투에서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뉘우침 속에서 스스로 윤리적일 수 없는 자기모순을 보게 된다. 이런 내재(內在)적 한계를 키에르케고어는 죄(罪)라고 한다. 그에게 죄는 하느님과 교제하지 않고 이상적 생활을 추구하려는 시도다. 이런 자각에서 인간의 영혼은 자연스럽게 초월적 존재를 사모하게 된다.

키에르케고어에서 인간행위는 자신의 영(靈)적 본성(本性, nature) 즉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에서 연원한다. 고대로부터 행복을 공동체 안에서 삶의 성취하려고 했다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사회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자기를 찾아가는 행복추구는 자기중심적 쾌락주의가 아니며 물질적 대가로 환원되지 않는 존엄한 행위를 통해 덕스러운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스토아(Stoa)학파와 같이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생활이 아니라 실존적 불안과 절망 등 인간조건을 천착했다.

인생전체에 성취를 가져올 때 행복한 생활은 인간본성에 걸맞은 고결한 성품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드러나기에 도덕적 호소력과 직관적 매력을 갖는다. 이런 호소력은 상호간의 매력을 발산하며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행복은 상대와 관계에서만 성취되는 것이라면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쉴 때까지는 안식이 없었나이다.'라는 어거스틴(Augustinus)의 고백은 행복이 인간의 자율적 노력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는 토로(吐露)다.

키에르케고어의 지적대로 의지(意志)중심적 윤리생활은 완벽주의(完壁主義)를 지향할 수 있을 뿐이지 행복한 생활의 객관적 표현인 도덕생활을 할 수 없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에서 소위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통해 종교적 신앙에 근거하여 윤리적 생활의 분투와 모순적 결과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종교 윤리적 차원에서 윤리적 행동의 가능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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