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1. 생명의 본질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현상이 어떤 기능을 가지느냐(what it does)에 관심을 가진다. 그 존재의 의미(what it is)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존재의 의미는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명의 기능적 측면을 관찰하면서 번식(reproduction)과 성장(growth)과 반응(reaction)과 신진 대사(新進 代射; metabolism)로 생명이 기능함을 찾아냈다. 하지만 이것이 생명의 본질은 될 수 없다. 과학의 발달이 속도를 더하면서 생물학자들은 생물의 존재의 의미까지 파고들 시간적 여유는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생물학자들의 영역의 밖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생명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 보다는 생명의 최소 단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유전자의 정체성을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체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하나 그 생명 단위의 조작이 가능해졌다. 심지어 인공 수정(Artificial Insemination, AID)과 시험관 수정(In Vitro Firtilization, IVF)까지 가능해지면서 생명 탄생에 대한 정의는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성서 해석의 범위를 넘어 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까지 뛰어넘으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항성과 행성 사이의 높은 온도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자유 에너지의 흐름을 정교하게 활용하여 높은 동적 에너지를 구현해 나가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럴 경우 생명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의 기준을 넘어 무생물의 영역까지 에너지의 교환만 있다면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불안정한 에너지 구조를 만든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우연이냐 섭리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학자들이 생명의 본질 문제에 대해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도 생명과학은 눈부시게 앞으로 나아갔다. 유전자 구조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축적 되면서 생명 공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술적 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명 공학의 많은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2. 생명 공학과 윤리 문제

복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clone"은 ‘자르다’라는 희랍어로부터 왔다. 오늘날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을 토대로 세포활동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진 유전자들을 인위적으로 잘라서(재결합), 그 유전자의 생산물(인슐린, 인터페론, 성장 호르몬, 예방백신, 기타)을 얻어내거나 유전자 자체를 대량으로 얻어내고자 하는 유전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대두되게 되었다.

유전공학은 유전병, 종양(암), 노화, 바이러스 질환 등의 수많은 난치병의 진단과 치료 및 예방에 새로운 희망을 주게 되었고, 의학 이외에도 농수산업이나 공업 등에도 엄청난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인해 생명현상의 궁극물질인 DNA에 대해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 중 흥미 있는 것은 DNA는 어떤 변화나 손상이 생기면 즉시 원래의 DNA로 수리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DNA 수리 체계(repair system)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서 생물체는 원래 진화가 되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DNA의 규명으로 유명한 왓슨(Watson)의 저서 ⌜유전자의 분자생물학⌟에 의하면 최첨단 분자생물학적 방법에 의해 미토콘드리아 DNA 유사성을 조사해 본 결과 모든 인류의 어머니는 한 명의 여자였다는 재미있는 보고가 있어서 성경말씀 '모든 산자의 어머니, 하와‘라는 깊은 뜻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생명의 유전정보는 진화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유전공학은 일명 유전자 재조합기술(rDNA)이라고 불리며 특정 유전자를 분리하여 플라스미드나 박테리오파지 등의 유전자 운반체에 결합시킨 후 숙주 세포(宿主 細胞, host cell)로 전달된 세포를 분리하여 대규모로 배양시켜 희귀한 유전자나 단백질을 얻어내는 기술이다.

유전 공학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고장 난 유전자를 찾아내어 진단하고 치료하는 유전자 치료(혹은 유전자 수술)이며 이를 위해서 무해한 미생물을 약간 변조시켜 유용한 유전자산물을 얻어내는 연구인데, 이를 통하여 유전병이나 종양 등의 많은 난치병을 회복시킬 수 있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분야의 연구를 적극 지지한다. 왜냐하면 질병과 고난이란 것이 결국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며,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악과 싸우기 위해 선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공학의 또 다른 연구 분야로서는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이다. 물론 무에서부터의 생명창조는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생명체를 가공하고 섞어서 새로운 생명체를 제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는 윤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특히 그 연구가 인간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유전공학 연구는 식물, 동물, 인간 등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들을 대규모로 섞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숭이와 사람과의 잡종을 만드는 실험도 있는데 이러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의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세속 정부도 이것을 인식하고 서둘러 법 제정에 나서 우리나라도 최근에 법률이 시행 되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생명체는 수억 년 동안에 걸쳐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잘 갖추어진 자신들의 실험실에서 자연히 이루어내는 업적보다 훨씬 더 나은 생명제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유전공학의 기술이 이들의 착각을 부추긴다.

동물 복제 기술의 역사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긴 편이다. 그 중에서도 1996년 2월 영국에서 복제된 복제양 돌리(Dolly)가 유난히 소동(Dolly phenomenon)을 일으킨 이유는 생식세포가 아닌 일반적인 체세포(體細胞)를 이용하여 지금까지는 불가능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포유류의 복제에 성공함으로써 인간의 복제도 가능하다는 길을 열어놓는 데 있다. 흔히 생식세포라 불리는 정자와 난자는 유전자의 절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정자와 난자와 결합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완전한 세포가 되어 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체세포는 처음부터 완전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얻은 핵이 난자의 핵과 치환되어 세포분열이 가능하다면 생명의 복제가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동물복제의 문제는 과학자들에게 있어 이론적인 난제가 아니라 기술적 난제와 윤리적 문제만의 장애물이 있다. 즉 누군가가 먼저 이 난제를 극복하는가가 문제일 따름이었다. 이제 이런 문제가 하나씩 벗겨져 가고 있다. 즉 언젠가 직면할 충분히 예측된 사건이 우리 앞에 다가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어쩌면 이제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인간 복제를 못하던 시대는 마감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96년 이미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의 실버 교수는 "앞으로 6년 안에 복제 인간이 탄생하게 되더라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였으니 이제 그 탄생 소식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 생물학자들이 생명 복제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학문적, 경제적, 의학적 이유 등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복제를 통한 형질 전환(transgenic)을 통한 우수 동물의 대량 보급이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육질을 인간에게 제공해 준다거나, 우수한 성능의 동물을 복제하여 경제적 유익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우수한 경주마 등의 복제는 상당한 경제적 유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여기서 유혹이 생긴다.

둘째, 인체 유용 물질을 생산하는 데 이 생명 복제 기술이 응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과학자들은 인터페론, 인슐린 등 난치병의 치료 약제를 보다 쉽게 확보하는 데 이 기술이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셋째, 세포 주기(週期)의 기전 연구 등을 통한 암 등 난치병 치료의 전기가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생명공학자들은 갖고 있다.

넷째, 환경오염에 의한 생태계 파괴로 인한 생물의 다양성이 파괴되어 가는 이 때 동물 다양성 보존을 위한 유리한 환경 조성에 복제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다. 생명공학, 그 중에서도 생명복제가 가져다주는 역작용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기독교적으로 복제의 문제는 여러 가지 우려되는 부작용이 상당부분 있는 게 사실이다.

첫째로 이 기술이 선한 쪽보다는 악한 쪽으로 응용될 때의 문제이다. 인간은 모든 과학 기술적인 발견에 대해 늘 선하게만 이용해 오지는 않았다. 많은 기술적 성과들이 살상 무기 등 파괴적으로 응용되어 온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미생물 무기, 생체 실험, 핵무기, 컴퓨터와 통신을 이용한 음란물의 범람, 컴퓨터 범죄, 쾌락과 현실 도피를 위한 약물 남용, 무분별한 맹독성 농약의 사용 등은 사람들이 얼마나 과학 기술을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생명복제라는 이 미묘하고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그저 중립적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인 것이다. 이미 이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먼저 단순한 악의 세력이 아닌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1994년 까지 OECD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과 멕시코에서 형질 전환 작물(trasgenic plant)이 방출된 사례가 적어도 90 차례가 되었는데, 이 중 3분지 1이 미국의 몬산토(Monsanto)와 칼진(Calgene) 그리고 스위스의 가이기(Ciba Geigy)와 같은 다국적 기업의 소행이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다국적 기업이 비도덕적이라면 그보다 더 심각한 사태는 언제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둘째로 경제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은 생명 공학과 생명 복제가 사람들에게 많은 부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이것도 극히 위험하고도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아마도 생명 복제의 큰 열매가 생긴다면,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만 엄청난 혜택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본다. 이미 인간 신체 기관 판매 시장은 세계적으로 큰 번성을 구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96년, 인간 장기 시장 규모는 이미 연간 6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 생명 공학의 발달은 경제적 이득에 눈이 먼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지를 것이다. 이들이 바로 자신의 배를 채우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사실 생명 공학을 연구하는 비용은 그리 만만한 비용이 아니다. 부가가치가 큰 연구일수록 그 혜택은 대중이 공유하기보다는 극히 일부에게 돌아가는 것이 지금까지 역사의 교훈이다. 복제양 돌리(Dolly)를 만들기 위해서만 로슬린(Roslin) 연구소는 자그마치 5만 달러를 투자하였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도 2005년 이후 앞으로 정부에서만 250억 이상의 공식 연구비 지원을 약속 받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투자하는 순진한 기업이나 정부는 없다. 연구에 경제적 유익이 없다면 기업이나 각국의 정부는 공을 들어 재정적 지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로 생명 복제가 인류에게 가져다 줄 윤리적인 문제이다. 인간 복제가 가능해 진다면 인류의 기존 도덕과 윤리는 모두 흔들릴 것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기독교계는 현재 아무런 구체적인 대안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윤리, 도덕적인 혼란의 유형으로는 복제가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주신 가정 제도의 무질서, 친족 위계 질서의 혼란(아버지를 닮은 복제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길 수 있는가 하는 등의 혼란), 인간 복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부적절한 유전자를 지닌 생명체의 폐기(즉 태아 살해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복제 인간의 비인격적 대우(노예, 가정부 취급 또는 치료 목적을 위한 복제), 복제 생명의 영혼 존재 여부와 구원 여부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이 직접 세상에 만드신 두 가지 제도가 있다. 바로 가정과 교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정과 교회를 철저히 보호하고 유지시킬 책임이 있다. 생명 복제, 특히 인간 복제의 문제는 그런 면에서 앞으로 가정과 교회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더욱이 치명적인 것은 복제의 과정 중 본의 아니게 반드시 발생하는 부적절한 생명체의 처리 문제이다. 복제 양을 만든 영국 로슬린(Roslin) 연구소의 아이언 윌머트(Ian Wilmut)도 277회의 시도로 돌리를 만들어 냈다. 276회의 실패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277번의 시도로 6일 이상 생존한 오직 29개의 배아(胚牙)를 얻었다. 이것을 13마리 양에게 이식하여 29개 중 하나가 성공한 것이다. 28개의 배아도 어느 단계에 죽었거나 비정상이었다는 결론이다. 성공한 과학자가 이 지경이니 세계적으로 실패를 거듭한 나머지 과학자들이 단순히 실험용으로 사용하다가 폐기한 어린 생명과, 실패로 인한 폐기한 생명은 부지기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이것이 인간의 경우였다면 분명한 태아 생명의 살해가 아니겠는가? 지극히 작으므로 이들은 생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생명 복제의 시대에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예레미야를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대하신 것도 그가 이미 복중에 있을 때부터였다.​

넷째로 과연 복제 생명이나 형질 변경 동물이 늘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유전적 결합으로 인한 실패율이 높은 것이 그것을 증거 한다. 형질 좋은 생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하는 복제는 당연히 유전적 결함을 더욱 많이 나타낼 것이다. 그럴 경우 오히려 기형의 새로운 변종의 탄생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보는 것이 과학이 상식이다. 사실 DNA 염기쌍 15만 쌍 중 하나가 손상되어도 암을 유발할 수가 있다. 이것들이 동물이기에 망정이지 사람을 마음대로 이렇게 복제하거나 장기 이식하였다가 미숙한 처리로 장애를 만들거나 살해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의료윤리회보'(Bulletin of Medical Ethics)의 편집자 리처드 니콜슨(R. Nicolson)에 따르면 완벽하다고 가정되고 있는 이종간(異種間) 장기 이식(臟器 移植)의 경우에도 겨우 기대 수명의 0.02%만 늘릴 뿐이다.​

1996년 세계 최초로 체세포 복제에 의한 복제 양을 탄생시켜 세계에 파문을 던진 복제양 돌리(Dolly)가 다른 동갑 양들에 비해 많이 노화됐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조사 결과 돌리는 다른 양에 비해 짧은 텔로미어(telomia)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태어난 지 3년 된 돌리가 6세의 어미로부터 세포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 돌리의 나이는 9세이지 않겠느냐는 해석도 나왔다. 아직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어쩌면 돌리가 조로(早老)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 견해인 것이다.

그렇다면 돌리의 텔로미어는 왜 정상에 비해 짧은 것일까. 돌리에게 유전자를 제공한 어미양의 나이는 6세이다. 즉 이미 여러 차례 분열을 거친 세포의 유전자로 돌리가 탄생한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만든 수정란의 유전자를 '원본'이라면 6세의 어미 양으로부터 얻은 유전자는 수정란 유전자의 '복사본'에 해당한다. 원본에 비해 복사본에 흠집이 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복사가 품질이 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만일 복사기의 원리가 그대로 생체 복사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앞으로 생명복제의 기술이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단계까지 가기에는 상당히 험난한 장애들이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돌리가 과연 또래의 양들에 비해 늙었는지 알 수 있으려면 좀더 시간을 두고 몸의 생리기능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양의 평균수명은 13년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여 년 동안 돌리의 건강상태를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로'는 단순히 일찍 늙은 현상을 넘어서, 노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각종 질병마저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돌리는 2003년 결국 사망한다. 아니 죽음을 예측한 과학자들에 의해 사전에 도축되었다. 생명 복제 연구를 통해 여전히 다양한 복제 생물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품을 흉내낸 미숙한 복제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복음주의 과학관은 생명 복제에 큰 희망을 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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