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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동주 시의 '부활'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6. 02. 26 02:31  |  수정 2016. 09. 0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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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윤동주 시인의 짧은 생애는 한편의 영화와 같다. 최근 개봉한 영화 <동주>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그래서 스크린에서 만난 시인 ‘동주’는 1943년 일본의 한 형무소에서 취조를 받으며 시작된다. 흑백화면은 1900년대 만주 북간도를 보여준다. 절친이자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송몽규와의 우정과 당신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슴 먹먹한 감동을 주고 있다.

명동(明東)소학교에 입학하여 송몽규, 문익환 등과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고, 이후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창씨개명 문제로 갈등하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교대학·동지사대학에서 공부하다 태평양 전쟁의 말기인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의 죄목은 ‘당면한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시켜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할 수 있도록 일반대중의 문화앙양 및 민족의식 유발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이로 인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도중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복역하는 중에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사인이 되어 죽음을 맞게 되며 함께 복역 중이던 친구 송몽규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감옥에서 사망하게 된다.

출간된 윤동주 시집은 그의 죽음 이후인 생전에 친구였던 정병욱과 연희전문학교 이양하 선생에게 한 부씩 맡겼는데 정병욱이 보관하였던 원고이다. 그 시는 추모 2주기에 동지사대학 선배이며 경향신문에 있던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경향신문 1947년 2월13일자에 ‘쉽게 씌여진 시’가 발표되고, 김용호시인이 발행하던 <문화창조>1947년 3월 1일자 특집호에 김기림, 여상현, 신석정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며 게재되는데, 발표된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로 인하여 한층 더 알려지게 되었다. 그 다음해 추모 3주기를 앞두고 경향신문사 기자로 있던 연희전문학교 친구 강처중이 정지용 시인에게 발문을 부탁해 1948년 31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정음사에서 10부를 추모식용으로 발간하는데 갑작스런 시집의 출판이라 벽지를 책표지로 사용할 정도로 출판하게 되며 윤동주 시의 부활을 가져왔다.

1955년 정음사에서 보급판은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혜원이 만주에서 6.25전쟁중에 3.8선을 넘으며 가지고 온 노트 두권의 초기 시 80여편을 추가하면서 111편의 시를 묶어 2종으로 출판하여 시의 화려한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70년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며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시인 윤동주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한다.

영화 ‘동주’는 진잔함속에 강한 메세지를 함유하고 가슴 한가득 그 메세지를 전달받게 한다.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빚깔로 빚어 두 평행선이 대치하면서 달리고 있다. 두 친구, 두 사상, 기독교신앙과 공산주의 사상, 예수그리스도와 군국주의 등 결국 펜과 총으로 대변된다. 일제의 총·칼앞에 펜으로 맞선 그가 주는 감동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지막 장면이 끝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윤동주 ‘고백의 시학’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기독교와 민족정신의 만남은 윤동주시인이 식민지 청년 지식인이라는 정체성과 함께 증조부 때부터 북간도로 이주해서 살아온 실향민 후손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면서 기독교 세계관의 영향을 받은 신앙인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이 그가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조화를 이룬 고백의 시학을 구축할 수 있었다.

윤동주 시인 서시

윤동주 시인이 최고의 민족 시인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한글을 말살시킨 일제의 조선어 금지 정책이 시행됐던 와중에도 끝까지 한글로 시를 쓴 시인이자,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처절한 삶과 철저한 참회를 통해 ‘등불을 밝혀 어둠을 몰아내고 /시대처럼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시인)’라는 고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쓰기는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고백함과 동시에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의 시 ‘병원’에서처럼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회복에 대한 치유와 위로의 심정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아픈 시대를 꾸역 꾸역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그를 '유약한 지식인'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이들은 자신의 약함을 가감 없이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강함임을 알고 있다. 그런가하면 부끄러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평생 부끄러움으로 고백하고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할 줄 알았기에 그의 시는 참회자의 토설하는 고백적 언어들로 나타나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그의 시 ‘참회록’은 그래서 울림이 크다.

그렇기에 그의 시나 영화를 읽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일제의 억압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또한 영화의 묘미는 윤동주 시인 본인이 겪었던 상황, 감정, 역사적 사실들이 나레이션으로 들려오는 시각과 청각으로 들려오는 심상들이 정말 탁월했다.

시인 윤동주는 교회가 간직해야 할 소중한 믿음의 선배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때문에 행복했던 시인,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참회할 줄 아는 기독인의 표상이 되기에 잊지 말아야 하겠다. 한국교회에는 암울한 역사속에서도 시인의 마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간 크리스천 윤동주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시-십자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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