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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6 (금)

[이효상 기고] 어찌할꼬! 신사참배결의 80주년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9. 11 19:19  |  수정 2018. 09. 1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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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상 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교회건강연구원장 이효상 목사

2018년 9월, 장로교단 총회를 맞으며 ‘신사참배결의’ 80주년이 되었다.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제2일째 회의가 열렸다. 이 총회에는 27개 노회 대표 171명(목사 86명 장로 85명)과 선교사 22명, 합 193명의 총대가 참석했다. 일제 수뇌부는 미리 친일파 목사 이승길, 평북노회장 김일선 등과 신사참배를 결의하기로 합의했으므로, 석전 평남지사, 경찰부장, 고등과장, 경무과장, 평양서장, 고등계 주임 등이 동석했다. 일반 방청은 금지시켰다. 문밖에는 30여 명의 정복 경관이 경계를 섰고, 총대들 사이에 경찰관이 앉아서 반대표 이탈을 막았다. 이미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채정민 등 신사참배 반대 지도자들은 예비검속 상태였고. 친일에 앞장서는 국민 총동원을 목표로 예수교장로파 정동연맹을 결성(매일신보1939.9.13)하고 ‘신사참배 결의’를 계획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총회개회 후 안건 심의에 들어가자마자 계획대로 평양노회의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요 국가의식”이라고 결의하고 성명서를 채택하자는 안을 발의했다.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가 동의하고,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재청으로 표결에 들어갔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동의안에 대해 “가(可)하시면 예라고 답하시오.”라고 했으나, 소수의 몇몇 사람만 “예”라고 답했다. 다수가 침묵하자 당황한 홍택기는 경찰들이 일어나 우협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否)는 묻지 않고 안이 통과되었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이런 불법의결 선포에 대해 방위량(Blair), 한부선(Hunt) 선교사 등은 "불법이오!"를 외치며 항의했으나 오히려 경찰에 의해 밖으로 끌어냈다. 항의가 인정되지 않자 선교사 일동은 퇴장했다.

한국교회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신사참배’ 가결은 이렇게 사전 각본과 불법과 강요로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 강요에 의해 결정한 ‘신사참배’는 세속권력을 절대화하고 인격을 신격화한 우상화행위이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영적 암흑기’를 맞으며, 교단적으로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1938년 10월에는 평양신학교가 폐교(동아일보1938.10.2)되고, 감리교는 제3회 총회후 7천성도 무운장구 기원, 신궁참배와 총독부 방문(동아일보1938.10.8)을 하기도 했다.

1920년부터 일제는 건국신과 메이지신을 모시는 경성 남산에 신사 신궁을 건립,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신사참배’와 창시개명한 기부자 명부로 돌계단을 만들어 ‘친일’과 ‘신사참배’를 합리화 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의 역사는 식민통치와 궤를 같이 한다.

그후 28회 총회때는 '동방요배‘가 예배를 대신하고, 찬송가 대신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고, 그리고 1942년 31회 총회때는 창씨개명과 ‘조선장로교’ 이름을 단 전투기 헌납을 결의하였다.

그런가하면 일제가 강압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찬송가 44곡을 흠집내고 기미가용와 우미유카바, 황금신민서사 등을 수록한 신정찬송가를 발행케하여 예배시 일본 천왕을 찬양토록 탄압하였다. 더 나아가 쇠부치, 금모으기를 위해 금속회수부 설치, 장로교회중 1540개 감리교회 교회종과 철문을 헌납(매일신문 1943년 10월 6일)케 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저항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해서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대부분 일제의 회유와 핍박에 굴복한 교회의 협공까지 받아 이중적 박해와 수난으로 순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당시로써 ‘신사참배’는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불의한 세속권력의 강요에 굴복하여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존을 포기한 변절행위이자 마치 베드로처럼 우리 죄를 대신하여 가야바의 법정에 서신 예수그리스도를 부인케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때문에 이것은 아무리 시대상황과 말씀과 교리로 합리화를 꾀하여도 자신의 신앙양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해방직후 이에 대한 철저한 참회로 이 상처를 치유하고 더욱 겸손하게 민족을 섬기며 봉사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해방되자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대한 가시적인 참회를 요구하는 주장과 자신의 합리화와 은폐로 교권을 유지하려는 측이 대립하여 교권다툼과 교파분열로 이어져 상처는 더 깊어만 갔다. 사실 교계는 이 때 ‘참회기도회’를 통하여 민족적 죄를 통회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거의가 부끄러운 상처이기에 침묵하고 심지어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호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1945년 12월 북한 5도연합노회에서 “전 교회는 신산참배의 과오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 할 것”을 결의하였고, 6.25 전쟁이 끝난 1954년 4월 제 39회 장로교총회에서 다시 신사참배 경의를 취소하는 성명서와 신사참배로 제명이나 처벌한 것에 대한 취소를 의결하였지만 이에 상응하는 통절한 참회운동과 정화운동이 뒤따르지 못했다.

어떻든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라는 죄책과 상흔을 치유하려면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선배들의 숭고한 정신을 이 시대가 본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적인 참회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들은 분명 거짓과 불의한 사회와 변절한 교회에 대하여 온 몸으로 경고한 예언자적인 신앙의 용장들이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신앙인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거짓에 맞서 싸웠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감당했던 신앙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고 ‘순교신앙’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 가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후세는 그들을 평가하기를 ‘보수신앙의 희생자’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수준의 신앙과 사상을 가졌건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비추어 살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이에 항거하다 목숨을 버리고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것이 낫다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 그들의 존재의의는 역사에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해방직후 자체의 회개와 정화에 실패한 교회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아니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신사참배결의’ 80주년을 보내고 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 행한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뼈아픈 상흔으로 기억될 것이다. 민족적 죄를 안고 “이것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요, 내 죄”라고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찌할꼬1”가슴치며 통회 자복 하므로 재부흥의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회개운동을 넘어 순교신앙’을 계승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민족적 참회운동은 현재적 사건으로 오늘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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