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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화)

"이제야 사람으로 보입니다!" (행전 3:1-8)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9. 01. 03 07:07  |  수정 2019. 01. 0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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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교회 원로 김고광 목사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2018년 12월 30일 주일설교 전문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수표교교회 김고광 원로목사.

옛 유대교 랍비가 그 제자들과 나누는 대화가 떠오릅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오매불망하는 한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온갖 역사의 흥망과 개인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희망은 유대인들의 삶 속에 녹아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희망의 끈입니다. 그것은 언제 메시야가 오십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랍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스승에게 묻습니다. 언제 메시야가 오십니까?

이렇게 묻는 제자들에게 답합니다. 깜깜한 밤에서도 새벽이 밝아오는데, 그때 그 어둠 속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가 메시야가 오시는 때이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설교의 주제로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오늘 본문은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는 기적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그 시작점에 시선을 모으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를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오늘 사건이 일어난 시간은 밤이 아니라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 낮입니다. 유대인들이 통상적으로 기도하는 시간, 오후 3시경입니다. 장소는 '아름다운 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성전 문 결입니다. 사건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후에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은 유대인의 종교관습을 지켰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기도드리는 것은 오래된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오늘도 어제처럼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기도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즈음, 성령강림절 직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박해가 일어나 모두가 흩어지기 전입니다.

그런데 전과 같이 그 시간과 그 장소에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이 되어서 스스로 걸어서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그 시간, 그 장소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는 목적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기도하러 갔고 다른 한 사람은 구걸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에게는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완전히 사회적 약자입니다. 이런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존경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않더라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때 그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오늘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것을 인권의 기본으로 삼고 있는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 받기는커녕 사람을 사람으로 여겨주지도 않는 경우도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앉은뱅이로 구걸하는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그런 사람입니다.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no body'요 'nothing'입니다.

그의 가정배경과 가족들 상태는 본문에 나오지 않지만 다른 삶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그 시간에 그 곳에 나오는 형편입니다. 아마도 그 시간에 제일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올라오기 때문에 오후 3시경에 그 자리로 나옵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다른 입구들 보다는 '아름다운 문' 쪽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거기로 갔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람답게 살아가기 힘듭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살아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삶은 이렇게 하루하루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모르긴 몰라도 이 문으로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이 삶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보았고, 그제도 보았습니다. 성령강림절 이전에도 보았고 그리고 성령강림절 이후에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거기 그 시간에 언제나 나와 있었으니까요. 한 사람은 구걸하며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요 또 구걸하는 사람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기도하러 자기 발로 걸어 올라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습니다.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었고, 모양도 차림새도 그랬습니다. 시간과 장소도 똑같았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구걸하는 일이나 베드로가 하려는 일이나 또 같습니다. 한 사람은 구걸하고 또 한사람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같고, 장소도 같고, 사람도 같고, 하는 일도 똑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는지 왜 달랐는지 본문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에 달라졌다고 주목하는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도 조금은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본문을 보는 우리의 눈도 달라져야 하겠고, 예수의 이름을 듣는 우리의 귀도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앉은뱅이, 거지고 보는 우리의 가슴도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사건에서 달라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달라져야 하겠습니다. 저도 이 점에서 참 깊은 성찰과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지금까지는 거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거지가 보였을 뿐입니다. 앉은뱅이가 보였을 뿐입니다.

그는 거지를 거지로 보았지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거지를 거지로 보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되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눈에 무엇으로 보일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거지를 거지로 보았고 오늘도 같은 거지를 보고 있는 데 한 가지 분명히 다른 것은 그 사람이 더 이상 거지로 보이지 않고 비로소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달랐습니다. 크게 달랐습니다.

이제야 베드로에게도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달라진 베드로이기에 앉은뱅이 거지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왜 오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같은 사람을 다르게 보였을까요? 그 거지가 갑자기 출세를 했기 때문입니까? 그 거지가 새 옷을 다르게 입었기 때문입니까? 그 앉은뱅이가 먼저 쳐다보았기 때문이겠습니까? 그가 먼저 일어나 걸었기 때문입니까?

그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는 여전히 꼭 같은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은 달라진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달라질 사람은 우리 자신입니다.

사실 어느 누가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고 싶었겠습니까? 누가 거지로 살고 싶겠으며 어느 누가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장애인이 되고 싶었겠습니까? 이 사람도 비록 태어나기는 이렇게 불행하게 태어났지만 좋은 부모 밑에서 구걸하는 거지 생활은 면하고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있어 이 사람이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사는 것은 이 사람이 죄가 많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감히 말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주변사람들을 호되게 비난하셨습니다(요한 9:1-3).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 그렇게도 자주 예수님의 눈에 보였던 사람들이 왜 제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가요? 갑자기 그런 사람들이 사라지기라도 했던가요? 한때 거리의 불량배들을 소탕한다고 보이는 노숙자들과 걸인들을 수용했듯이 말입니다? 옛날에는 종종 그랬는데 지금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무슨 행차나 행사가 있으면 거리의 약자들, 병들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일시로 수용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의 눈에는 가는 곳마다 그렇게 눈에 자주 눈에 보였던 그 사람들이 제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요?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니 눈입니다. 우리 귀입니다. 우리 욕심입니다. 우리 태도입니다. 우리 가슴입니다. 우리 영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햇수로 따지면 베드로의 그것보다도 길면 길었지 짧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직분을 가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제자와 사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이상의 권위와 지위, 그리고 영광과 부귀를 누리는 목사들도 많이 있고 장로들도 많이 있지만... 그리고 한국교회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많은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기적적인 일들도 행하는데 그런 우리 눈에는 아직도 부자는 부자로 보이고 거지는 거지로 보이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보이고 힘없는 사람은 그렇게만 보이고 사람자체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큰 문제입니다. 오늘 모든 세상 문제의 근원입니다.

나는 사람으로 보이고, 나는 사람 중에서도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아직도 사람 그 자체로 보이지 않고 그의 모습, 입은 것, 가진 것, 배운 것, 쓰고 있는 감투 등으로 보이는데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사람을 보이는 외부의 모습으로 볼 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에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장애인인 걸인으로 보일 뿐, 사람으로 나와 같은 사람으로 나의 다른 얼굴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예수님께서 위해서 죽으신 사람입니다.

너희 아버지는 한 분 뿐이요 너희는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런 식으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나타난 다르게 보입니다.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주어먹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닌가요? 태어나면서 장애인은 사람이 아닌가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본다고 해서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은 나보다 못한 무엇, 무엇 같은 것으로 보이고, 저 사람은 나보다 잘난 무엇, 무엇 같은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무한히 교만해지고 나보다 잘난 사람 앞에서는 무한히 비굴해 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다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본다면, 그래서 구별하고 차별하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다른 것으로 보인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멀고도 먼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모습으로 판단합니다. 크게는 인종으로, 작게는 나와 이런 것이 다르다고 사람을 사람취급을 하지 않고 무엇 무엇으로 취급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잘난 사람은 나도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다른 그 무엇 무엇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않으면 나도 바로 그 다른 사람에게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요? 유유상종이 꼭 나쁜 사람들만 끼리끼리 노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끼리만 노는 것도 같은 유유상종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내 눈의 문제요, 내 마음의 문제요, 내 성격의 문제요, 내 믿음의 문제입니다.

겉으로 보인 사람과 그 사람의 참된 모습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오로지 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나와 무엇인가 조금 다르거나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면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도 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고 또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구별을 하고 차별을 하는 이분법적인 성품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도 사람으로 볼 수 있고 나보다 잘난 사람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나와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우리는 보지 않고 듣지 않습니다.

한걸음 나아가 그 다른 사람이 바로 나의 다른 얼굴입니다. 바로 나의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나 아닌 사람을 나의 다른 얼굴이요 나의 다른 모습이요 나의 다른 존재, 즉 타자로서 자기를 바로 아는 사람이야말로 오늘 본문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웃, 그것도 나와 전혀 다른 이웃, 내 생각과 취향과 행동양식과 반대되는 사람들에게 나는 친밀감을 느끼거나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와 너,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별이 생기고, 차별을 생기고 너와 나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외면하거나 멸시하거나, 반대하거나 증오합니다.

유유상종도 타자로서의 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교만이요 죄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그 사람 있는 그대로를 보셨는데, 그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후세의 교회의 믿음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구별하고 차별하고 살리고 죽이고 했을까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개혁자 루터가 믿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역시 죽일 사람과 살릴 사람의 엄연한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독일의 시인, 철학자였던 쉴러의 시에 붙인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독일에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죽어갔습니다.

서구에서도 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Martin Buber의 '나와 너' 관계를 '나와 그것'과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했고, 그리고 '타인의 얼굴이 다름 아닌 나의 얼굴'이라고 보았던 레비나스, 나아가 '타자로서의 나'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리꾀르 등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철학사유도 현대에 와서야 회자되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 반향은 현실에 밀려 미미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타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있었다는 것은 작지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 중기부터 시작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파와 정파의 분열은 같은 집안이요 동문수학의 학우요 한때는 사상과 정치적 이상을 같이 했던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습니다. 이런 현실은 조선왕조 중기 이후부터 후기에 이르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에게 많이 알려있지 않았던 '호론(湖論)과 낙론(洛論)' 분쟁 중에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던, 그래서 잘난 것도 잘못한 것으로 만들고 살릴 수 있는 사람도 죽이는 무서운 미친바람 속에서도 낙론에 속한 젊은 20대의 홍대용을 비판하기를 계속했던 호론의 중진학자, 김종후가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함은 나를 사랑함에 다름 아닌 것이다...그렇다고 해도 나를 사랑함이 남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남이 곧 '하나의 큰 나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것이 어찌 가하겠는가?"(조선, 철학의 왕국. 이경구. 286 재인용)

외국에서 잠시라도 살거나 여행을 다녔거나 아니면 국내에서도 다른 지방을 여행하면서 모두 같은 이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작은 차이가 얼마나 크고 많은 오해와 문제를 가져오는지를...

지금도 우리는 인종문제로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과 내면은 다르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인종청소가 어찌 다른 나라의 지나간 일일까요? 우리나라의 특수한 현실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서로에게 잔인합니다. 증오합니다. 인종이 지역의 문제와 겹치거나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권력싸움으로 변질되면 인간은 악마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종교가 끼어들고 영토와 개인적인 이해관계, 거기다가 생긴 것이 다르다고 말투가 다르다고, 눈 색깔이 다르다고, 남녀가 다르다고, 나이가 다르다고, 지위가 다르다고, 가진 것이 다르다고 취미가 다르다고, 학교가 다르다고, 사는 곳이 다르고, 사는 수준과 정신이 다르다고 싸웁니다.

심지어 교회가 다르다고 해도 서로 남이 됩니다.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상대가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구별하고 싸우고 죽입니다.

언제나 타자의 그 다른 모습들이 나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서로 인정하는 날이 올까요? 그날이 오는 때가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가 아닐까요? 그런 때가 이 땅에 희망이요 이렇게 만드는 교회가 이 민족의 희망이 아닐까요?

나면서 앉은뱅이 장애인도 항상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그 시간에 그 장소를 지나면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도 왜 어제는 보지 못했을까요? 어제는 그 장애인이 나오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어제는 베드로가 기도하러 가지 않았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어제도 그제도 그 장애인은 그 시간에 거기 있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베드로가 기도하러 갈 때마다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루라도 일찍 그를 고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는 베드로에게 그 장애인은 많은 장애인들 중에 한 장애인으로 보였습니다. 그 장애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예수님의 형제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길래 지나쳐 갔습니다. 왜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의 구걸하는 장애인으로 보였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제야 베드로도 사람으로서 눈을 뜬 것입니다. 이제야 베드로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바로 일어선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입니다. 눈입니다. 마음입니다. 그리고 손이요 말입니다. 거기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고 그래서 기적이 일어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령을 받았다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벌고 재미를 보고 명예를 누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사실은 사이비성령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교회에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에게조차도 희망을 걸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일 때는 언제가 될까요?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아이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배운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장로도 평신도도, 목사도 교인도 모두가 같은 사람으로 보일 때가 교회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야 기적이 일어나고 희망이 솟아날 것입니다.

예수께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 그대로도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우리에게도 사람이 오직 사람으로 보이는 그 때가 메시야의 시대가 이루어지고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새해에는 이렇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때가 이루어져서 참된 기적과 희망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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