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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4 (수)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이슬람 편향성 문제는"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0. 31 06:50  |  수정 2018. 10. 31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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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란인교회 이만석 목사의 '이슬람 전문칼럼'

한기연·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장 이만석 목사
한기연·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장 이만석 목사 ©홍은혜 기자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며 자라나는 차세대 일꾼들을 바르게 양성하는 매우 중차대한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육공무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편향적으로 특정 사상이나 종교에 편중되어 기술된다면 그것을 기초로 가르쳐야 하는 교사들의 교육행위는 학생들을 기형아로 만드는 범죄행위가 되어 버리고 만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학생들이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접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어 비교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교과서는 객관적이고 진실을 기초로 한 균형 잡힌 내용으로 집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중등세계사 교과서들은 심각한 수준으로 이슬람 편향적으로 왜곡되어 집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많은 이유 중 세 가지만 생각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는 자라나는 세대가 사상적 혹은 종교적 기형아가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슬람이라는 사상에 점령당하면 보편타당한 윤리관을 가질 수 없고

셋째는 이슬람이라는 사상에 심취하면 타문화권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의 왜곡의 두 가지 방법

교과서 왜곡은 두 가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소극적 왜곡이 있고 둘째는 적극적 왜곡입니다.

소극적 왜곡이란 장점과 단점이 있는 것 중에서 단점을 제외하고 장점만 기술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편향적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 해악은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에 국한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극적 왜곡은 사실이 아닌 것을 미화시켜 조작된 거짓 내용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받아 세뇌되면 후에 바로잡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혹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거짓 교육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고 난 후가 될 것이며 시간도 오래 걸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세계는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슬람권은 세계의 화약고라고 불릴 만큼 끊임없는 전쟁과 분쟁으로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까지 그렇습니다. 그것은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율법의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복종이라는 뜻입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고 무조건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알라는 절대 신으로서 명령하면 인간은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 시스템입니다.

전 세계 어느 사회든지 무슬림들이 숫자가 많아지면 반드시 충돌과 불협화음이 발생하게 됩니다. 유럽의 똘레랑스(관용)의 문화와 노블레스 오블리주(귀족들의 의무)사상이 생활에 배어 있기 때문에 못 가진 자들을 도와주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소위 다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국적 피부색 문화 종교 인종 국적 성별 사상 등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양보하면서 포용함으로 평화공존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 평화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대표적인 유럽의 선진국들이 막대한 재정적인 후원과 홍보에도 불구하고 다문화 정책의 실패를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나 영국의 데이빗 캐머런 전 총리나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등 소위 강대국이자 선진국의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해 봐도 무슬림들 때문에 다문화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음을 선언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 등 모든 면에서 선진화 되어 요람에서 무덤까지 총체적 복지를 실천하며 지상천국 같았던 유럽이 거의 매일 발생하는 무슬림들의 테러와 집단 강간과 살인 폭력 등 강력 사건들 때문에 차츰 공포의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무슬림들이 테러범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테러범은 무슬림인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선진국들이 이슬람 때문에 실패한 다문화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유럽의 강대국들도 감당치 못해서 쩔쩔매는 국가적 재앙을 교과서 내용까지 미화시켜가면서 이슬람의 불씨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교과서의 이슬람 편향성의 문제점

첫째 종교별 분량 배당 문제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역사교과서의 종교서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슬람이 46.1%, 불교 19.0%, 천주교 15.5%, 힌두교 10.4%, 개신교 3.0%(국민일보 2018.9.12.)라고 합니다.

2016년 12월20일자 조선일보에 보면 대한민국 종교인구별 통계를 보면 무종교를 표방한 사람들이 56.1%, 기독교가 19.7%, 불교15.5%, 천주교7.9% 순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종교에 이슬람이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채 안 됩니다. 즉 5천만 인구 중에서 50만 명에도 못 미칩니다. 그런데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교과서 종교서술에서 46.1%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현상이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는지 따지는 것도 필요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은 무슨 변명을 해도 적절치 않으니

잘못된 것을 알았으면 즉시 시정하는 지혜가 있어야 피해가 적습니다. 속히 시정하기 바랍니다.

둘째 내용상의 오류의 원인은 이슬람의 교리 때문

대한민국 교과서의 오류문제는 소극적 오류와 적극적 오류가 총망라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교과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슬람에는 타끼야(Taqiyya)라는 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슬람을 위하여 유익이 된다면 거짓말을 허용하는 교리입니다.

예를 들면 이슬람의 경전에 그렇게 많은 폭력과 테러를 사주하는 구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꾸란에는 평화를 말하는 구절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꾸란 2장256절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말하는 구절은 폭력과 전쟁을 강요하는 꾸란9장5절 즉 “유예기간을 주었는데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자들을 만나면 어디서 만나든지 살해하라”는 구절에 의해서 이미 취소된 구절입니다. 두 구절 다 지켜서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꾸란의 내용 중 서로 모순되는 구절이 있을 경우에는 “나중 계시가 처음 계시를 취소하고 대체된다”는 취소교리(만쑤크)교리와 대체(나쓰크)교리가 있습니다. 그 구절에 의해서 평화를 말하는 구절은 취소된 것은 이슬람학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힘이 없을 때는 평화를 말하다가 어느 정도 무슬림 숫자가 많아지고 힘이 생기면 그 때부터 여러 가지 명분을 들먹이면서 자생폭력단체들이 그 흉한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타끼야는 이미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거짓과 폭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이슬람의 전략입니다. 헌신적 무슬림들은 그 사회에 들어가서 거기서 제공하는 모든 혜택과 특혜까지 받아 누리며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평화를 말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의 목적은 그 사회의 제도를 파괴시켜 이슬람율법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끼야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키트만(kitman)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이는 숨기는 것입니다. 물론 타끼야와 유사한 점도 많지만 이를 실천하는 데는 일부를 감춤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즉 꾸란 구절을 인용하되 일부분만 인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 성경에 “하나님이 없다”말씀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구절은 없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편14편1절에 그런 말이 분명히 있다고 목소리를 높혀 주장합니다. 그 구절을 찾아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하도다”는 말씀입니다. 즉 앞에 부분을 떼어내고 뒷부분만 인용하는 것입니다. 이슬람 학자들이 써 놓은 저서들을 보면 꾸란의 구절도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스컴을 통해서 무슬림들의 입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꾸란에는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온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는 말씀이 있다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강변합니다. 꾸란에 정말 그런 구절이 있다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가 맞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꾸란5장32절을 인용한 것이지만 키트만에 의해서 앞부분을 살짝 감춘 것입니다. 원래는 유대인들에게 무고한 한 사람(즉 무슬림)을 죽이는 것은 온 인류를 죽이는 것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경고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그 다음 절 즉 5장 33절을 읽어 보면 무고한 사람이란 알라와 무함마드를 따르는 무슬림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알라와 무함마드를 대적하고 지상에 해악을 뿌리는 자(즉 이슬람을 거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든지 십자가에 못 박든지 손발이 대각선으로 잘리든지(오른손을 잘랐으면 왼발을 자르는 등) 또는 추방을 당할 것이며 이는 현세에서의 치욕이며 내세에서는 무거운 징벌이 그들에게 있으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꾸란5장33절을 읽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5장32절의 가운데 토막만 읽어 줍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이라는 부분을 빼고 마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말처럼 인용하는 것입니다. 누가 일일이 꾸란을 찾아서 확인해 보겠느냐는 계산이 깔린 행위이지요. 이것이 이슬람의 키트만 교리입니다.

이러한 이슬람의 거짓을 허용하는 타끼야와 키트만이라는 교리 때문에 그들은 심지어는 꾸란의 내용까지 미화시켜서 거짓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꾸란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내용이 거짓으로 미화 번역되었는데 지면 관계상 그 중 한 구절만 생각해 보자면 꾸란 3장 54절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음모를 하나 알라께서는 이에 대한 방책을 세우셨으니 알라께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자이시니라’

여기서 음모, 방책, 계획으로 기록된 단어는 마카라라는 하나의 아랍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꾸란을 번역한 사람이 펴낸 아랍어 사전을 보면. ‘마카라’라는 단어는 ‘속이다, 기만하다’의 뜻 외에 다른 뜻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경전도 이렇게 마음대로 미화시키는 사람들이 교과서를 만드는데 직접 간여하여 미화시켰는지 아니면 교과서 내용을 저술한 사람들이 이슬람을 전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슬림들이 만들어 놓은 거짓 자료를 보고 속았는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 교과서에 이슬람이 미화되어 기술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슬람의 최고의 가치인 지하드를 교과서에서 빼 버렸다

소극적인 오류란 부정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긍정적인 부분만 소개하는 것인데 교과서에서 빠진 부분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슬람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지하드(Jihad)입니다. 어떤 책에는 지하드를 성전(聖戰)이라고 번역했는데 지하드는 거룩하다는 뜻이 없습니다. 지하드란 생명과 재산을 바쳐 알라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 하는 자는 진짜 무슬림이라고 코란이 설명하고 있습니다.(꾸란49:15) 이는 어떤 율법이나 교리보다 우선하는 것인데 무슬림들은 이를 “죄악과 싸우는 영적, 내면적인 투쟁”이라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제2의 경전이라고 하는 하디스에 의하면 지하드는 알라와 이슬람을 위해서 비무슬림들을 죽이는 전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무슬림들의 의무라고 꾸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꾸란2:216)

이슬람의 제2 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라의 선지자에게 와서 “지하드와 상급이 동등한 행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니 “그런 행위는 없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고는 “무슬림 전사가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동안 그가 전쟁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모스크에 들어가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도의식을 행하며 금식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아부후라이라는 “지하드 용사는 그가 탄 말이 긴 줄에 매어서 어슬렁거리는 발자국들 까지도 상급이 있느니라”고 말했다.(Sahih Bukhari: Volume 4, Book 52, Number 44)

아직도 뜻이 분명치 않다면 아래 하디스를 보면 전쟁터에서 이방 여인들을 잡아 성폭행하고 노예로 팔았던 분명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사이드야 네가 알라의 선지자께서 질외사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말이냐?” 그는 “그렇다니까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라의 선지자와 함께 빌무스탈릭으로 원정을 갔을 때 멋진 아랍 여자들을 생포했어요. 오랫동안 아내와 떨어져 있어 성적으로 굶주렸기 때문에 그 여자들을 범하고 싶기도 했고 팔아서 돈을 벌고 싶기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질외사정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 때 우리는 알라의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계신데 물어 보아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그분께 찾아가서 물었지요. 그랬더니 ‘부활의 날까지 태어나기로 작정된 자는 다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어요.” (Sahih Muslim: Book 16 Hadith 147)

이슬람은 전쟁을 통해서 아라비아 반도를 점령했습니다. 무슬림이 아니라면 남자들만 죽이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생포해서 이용하거나 노예로 팔고 탈취물들은 나눠가졌습니다. 심지어는 꾸란8장은 안파알(anfaal)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여기서는 탈취물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란의 에스파한이라는 도시에 가면 켈리써예 방크(Kelisaye Vank)라는 곳에 기독교 박물관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2015년 오스만 터어키 때 터어키 전역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 150~200만 명을 집단 살해했던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이슬람에 대해 배운 것 중에 기억에 남은 것은 “한 손에 칼, 한 손에 코란”이라는 표어였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보편적인 상식이었으며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 교과서에서는 이런 내용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넷째: 이슬람에서 여성의 인권문제가 빠졌다.

또 한 가지 소극적 왜곡의 사례는 이슬람의 여성 인권에 관한 내용이 모두 빠져 있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여성의 인권이 남성의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성들의 상속은 남성들의 절반에 해당하며(꾸란4:11) 법정에서도 여성 2인의 증언은 남성 1인의 증언과 동등한 효력이 있습니다.(꾸란2:282)

더구나 이슬람권에서는 매년 5천 명 정도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친족을 살해하는 명예살인이 일어난다든가, 여성 성기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잘라버리는 여성 할례 문제로 고통받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실제로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국제적으로 여성할례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처벌한다고는 하지만 2016년 UNISEF의 보고에 의하면 소말리아 여성의 98%, 기니 97%, 지부티 93%, 씨에라레온 90%, 이집트 87%, 수단 87%, 부르키나파소 76%, 감비아 75%, 에디오피아 74% 등의 여성들이 할례의 고통으로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이슬람 옹호자들은 여성할례는 이슬람과 관계없으며 이것은 그 민족이나 국가의 풍습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여성할례 피해자들이 대부분 무슬림들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슬림들은 세상 법은 언젠가는 바뀌겠지만 알라의 법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는 철칙을 준수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세상 법으로 막고 처벌해도 이슬람율법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절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매년 300만 명(매일 평균 8,200명) 이상의 여성들이 할례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권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딸락’(이혼이라는 뜻의 아랍어)이라고 세 번 구두로 통보함으로 이혼이 가능합니다. 심지어 어떤 나라들은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딸락을 세 번 보내도 가능합니다.(꾸란2:230)

메카 방향으로 기도할 때 그 기도자 앞으로 개나 당나귀나 여자가 가로질러 가면 그 기도는 무효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불순종할 우려가 있을 경우는 때려도 된다고 합니다.(꾸란4:34)

이런 사실들을 감추고 교과서의 교육과정에서 배제한다면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할 것이고 이에 대한 바른 대책을 세우는데 방해가 될 것입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굳이 특정 교과서를 거명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의 모든 교과서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요 관용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슬람이 평화와는 상관이 없는 종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무슬림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보면 인류가 알라의 종교에 무릎을 꿇게 되면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며 그렇게 되기까지 전쟁을 통해서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은 평화를 위한 과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온건한 무슬림이란 존재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매스컴은 순식간에 대중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중을 속여 큰 피해를 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세월호의 선내 방송을 들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가 중심을 잃고 기울었을 때 “당황하지 말고 방에서 기다리라”는 선내 방송을 여러 차례 내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 만일 “선실에 있으면 위험하니 모두 갑판으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을 했다면 한 명의 피해자도 없이 모두 구출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슬람에 관한 정보도 이와 같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이슬람의 테러 사건들이 온 세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가르치고 있으면 세월호 참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규모의 국가적인 재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자는 이슬람에는 온건한 이슬람도 있고 급진적이거나 폭력적인 이슬람도 있기 때문에 모두 같은 기준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온건한 무슬림들은 우리가 사회복지를 통해서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혜택을 주고 권리와 활동을 보장해주면 전혀 문제없이 그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선량한 미국시민 3,000 여명이 목숨을 잃은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슬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가 전세계 무슬림들의 반발이 일어나자 말을 바꾸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들은 우리의 친구요 이웃이지만 테러를 저지르는 무리들은 철저히 응징하고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19명의 테러범들이 모두 무슬림들이었으며 이것은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철저히 계획된 의도적인 테러였다는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가 문제이지 이슬람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온건하고 선량한 무슬림이라는 말이 과연 제대로 된 표현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소위 온건한 무슬림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오히려 온건한 무슬림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무슬림은 온건할 수 없으며 온건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꾸란 9:123)

여기서 싸우라는 말은 아랍어 원문에 까틸루(Qatiloo)고 쓰여있는데 그 어원은 까탈라(Qatala)입니다. 이는 “죽이다, 자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는 말은 서로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하거나 뺨을 때리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싸워야 할 이유는 그들이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꾸란의 명령이며 모든 무슬림들의 행동지침이라면, 그런 지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비무슬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이슬람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은 꾸란의 그 구절은 전쟁 시의 지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꾸란 9장은 전쟁 시의 지침이 아닙니다. 1절에 이웃과의 평화조약을 취소하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고, 2절에는 4개월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개월이 지났어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불신자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는 것이 5절의 내용입니다.

이슬람에서 불신자들을 죽이는 전쟁을 ‘지하드’라고 하며 이는 알라(Allah)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聖戰)’이라고 부르지만 원문에는 거룩하다는 의미는 없습니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의 통치자가 되어 군사적인 힘이 생기자 주후 624년부터 평화롭게 공존하던 이웃 마을 사람들이라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격하여 남자들은 잔인하게 죽이고 그 아내들과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삼든지 팔거나 물물교환을 했다는 것은 이슬람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이슬람이 뭔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귀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이들이 무슬림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꾸란49:14), 진정한 무슬림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었습니다. 진정한 무슬림이란 아래 3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꾸란49:15)

첫째: 알라와 무함마드를 믿어야 한다.

둘째: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생명과 재산을 바쳐 지하드(전쟁)해야 한다.

거부하면 죽이겠다는 위협에 마지못해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웃 사람들은 다른 이웃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러 가는 전쟁에는 참여를 꺼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이웃과의 전쟁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하는 의무사항이라는 계시가 내려왔다고 했습니다(꾸란2:216). 전쟁을 해본 일도 없고 싸우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자 무함마드는 이들을 위선자라고 정죄하였습니다. 이들을 '신자인 체 하는 자들일 뿐 사실은 불신자(Kafir)들'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꾸란3:167). 무함마드가 불신자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슬람의 적으로서 살해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겠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은 평화를 말하고 있고 그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이슬람의 실체를 숨기고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또는 몰라서 속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꾸란이 폭력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테러나 폭력을 의무사항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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