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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6 (일)

[서진한 설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01. 24 22:46  |  수정 2018. 01. 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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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본문 시62:5-12, 욘3:1-5.10, 고전 7:29-31, 막 1:14-20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
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기독교사상 발행인 및 편집인)

[설교] 오늘 성서일과 본문(욘 3:1-5, 10, 고전 7:29-31, 막 1:14-20)은 세 가지 말씀이 아주 명료하게 연결됩니다.
예언서 말씀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했는데, 지도자와 백성들이 단 하루 만에 다 반성하고 이전 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서신서 말씀은, 과거와 완전히 다르게 살아라. 아내 있는 사람은 아내 없는 사람처럼, 남편이 있는 사람은 남편 없는 사람처럼......삶의 현실과 대비하면 참 심각한 문제의 말씀처럼 보이지만 이는 과거와 완전히 달리 살라, 전혀 다르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총괄복음, 즉 예수님께서 삶과 말씀이 집약되어 있는 그런 말씀을 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물고기를 낚으며 살던 사람을 그걸 딱 끊게 하고 사람을 낚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전환, 완전한 전환입니다!
주현절인 지금 읽은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으로 나타나셨고, 그것을 본 우리는 삶을 완전히 전향해야 된다는 그런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향할 자신이 없어집니다.
늘 우리는 뭔가를 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제자로 살아라’ ‘작은 예수가 되라’ 등등...
대단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지치잖아요?
저는 이 말씀에 이어서 다른 말씀(롬 5:19-20. 시 51;5)을 살펴봤습니다.

 바울 사도의 로마서 본문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구원,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대비합니다. 이 말씀은 구원은 율법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는 대목이지만, 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언어,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의 언어 중에는 현대인들에게 생소하거나, 낯설거나, 또는 낡게 느껴지는 언어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우리가 오늘 생각할 죄(罪)라는 언어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의 이 부분에서 죄가 아담으로부터 들어오고, 예수로 말미암아 그 죄가 끝났다고 이야기 합니다.
아담으로 부터의 죄란, 인간의 DNA가 죄(罪)성으로 바뀐 것이어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누가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흔히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 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몇 해 전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지진해일이 일어나도, 특히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을 해 적지 않은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죄, 죄는 이렇게 세상 속에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짐을 못 벗었다. 죄 탓이다. 이렇게 죄라는 단어를 무수히 사용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참 납득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과거 그리스도교 역사를 살펴보면, 죄라는 것은 살아 있는 현실, 아니 현실보다 더 현실이었습니다. 죄는 사람을 살리고 죽일 만큼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죄인으로 낙인찍히면 더 이상은 그 사회에서 생활 할 수 없었습니다. 파문을 당하고, 심지어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이미 아니지 않습니까? 죄는 그 어떤 상징도, 의미도, 현실도 아닙니다. 좀 더 냉정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죄는 이미 낡은 신화적 언어가 아닐까요? 현대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런 개념들을 그 개념들에 묻어 있는 신화적 요소, 사람들의 왜곡된 잘못된 흔적을 지워내고 현대화 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음을 봅니다. <폴 틸리히>는 죄를 ‘소외’라고 번역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죄를 ‘관계 단절’로 읽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근본주의, 보수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죄를 실감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말 그런가 하는 것을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근본주의, 보수주의적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신앙생활과 교회생활, 주일과 평일, 성과 세속, 이 사이에 갈라져서 전자에만 국한된 개념으로 작동한 것 같습니다.

 대전교도소에 출입하던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본인도 옥살이를 했고, 흉악범 선교를 하시던 분입니다.
당시 교도소에서는 행정 비를 줄이기 위해서 죄수들 가운데 일정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했는데, 매점 운영 즉 돈을 만지는 일은 절대로 기독교인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 일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자기가 총을 들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일상에서 지키기 위해 군대를 가지 않고 복역 중인 사람들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혹시 기독교는 좋아하지 않더라도, 기독교인과의 거래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됐습니다.
이미 기독교인들에게 죄라는 것은 내 삶을 결정하는 살아 있는 힘이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박물관에 있는 낡은 개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라고 하는 것은, 사회법에 걸려서 재판을 받는 일. 그것만 죄로 남았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을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단히 이데올로기적인 언어이기도 했습니다. 중세 가톨릭, 천주교가 자기 체계 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파문당한 죄인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복권되지 않았습니다.
예전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고, 그 사회는 대체로 종교적 신념체계 안에서 굴러갔습니다. 그 체계에서 밀려난 사람들, 그 체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었습니다. 종교적 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과 같이 다니셨다는 사실은 다 아시는 기록입니다.
이런 점에서 죄(罪)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우리에게 비판적으로 성찰이 될 언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죄라고 하는 낡은 말, 박물관에 있어야 할 낡은 언어를 제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좀 더 생각해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주 오랜 기억입니다만 <함석헌> 선생이 씨알소리에 <하나님>이란 단어에 대한 새로운 담론에 대해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쓴 동기는 당시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안병무> 등 젊은 신학자들이 <함석헌> 선생에게 <하나님>이란 단어는 낡았다. 여기에는 온갖 왜곡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한데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젊은 학자들은 <하나님>이란 언어를 왜 계속해서 쓰는가? 다른 언어를 쓸 수는 없나? 라고 말합니다. <유영모>는 ‘없이 계신 하나님’ 라는 언어를 썼습니다.
이에대한 함 선생의 대답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나도 이해하겠다. 나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언어, 그 단어에는 수많은 세대와 수많은 인민들의 한, 열망과 희망과 기다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이 이렇게 명료하게 말하지 않았더라고 상관없습니다. 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혹은 'God'라고 번역하는 그 언어, 사람들이 '데오스'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사회 사람들은 그 언어로 불렀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는 단어에는, 그 단어에 삶을 걸고, <하나님>이란 그 단어를 외치면서 죽어간 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로 새 힘을 얻고 고통과 현실을 이겨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란 단어, 그 단어에는 수 천년동안 수많은 한숨과 눈물들이 겹겹이 싸여 있다. <하나님>이란 단어, 언어, 그것은 민초들의 서민들의 눈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저의 어머니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6명이나 되는 형제를 남겨두고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서 늘 새벽기도를 갔었는데, 어머니는 날마다 죄를 고백하며 펑펑 울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그렇게 우실만큼 큰 죄를 지을 힘도 없어 보이는 어머니는 그렇게 죄 이야기를 하고 울면서 하루를 살 힘을 얻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하나님’과 기독교 종교가 된 ‘종교의 하나님’은 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교회 하나님과 로마제국이 말하는 하나님도 같은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왜곡, 변질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란 언어가 숱한 사람들의 한이 서려있는 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나님>이란 단어에 담긴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비판하지 말자는 뜻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담긴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 종교적 변질을 비판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눅5:8에서는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이때는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입니다.
베드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습니다. 밤새 그물질을 했다는 것은, 자기 삶을 위해 온갖 수고를 지치도록 하며 살았다는 얘깁니다. 날이 밝아오자 어떤 선생이 배를 타고 오더니 빈손인 자신에게 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말처럼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의 물고기가 잡힙니다.
순간 베드로는 사태를 파악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상의 말씀이 아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이다.’ 이것이 베드로를 베드로로 만든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뱃속, 애기 집 안에 있는 이 조그만 생명체가 무슨 죄 인식이 있으며, 또 무슨 죄를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미의 피가 죄라면 죄겠지요!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혈액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면서 기껏 해봐야 뱃 속에서 꼼지락 거리고, 발로 툭 차고 그런 정도인데, 거기에 죄가 어떻게 깃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우리가 교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원죄(原罪), 아담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그 원죄를 말하는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떤 죄를 짓게 되면 3~4대까지도 벌을 내린다는 무서운 경고를 받아들이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절대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벗어날 수 없는 원죄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시편 기자의 이런 고백에는 인간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 인생, 자기 공동체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뇌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존재,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선 존재입니다. 빛 앞에 서면 내 그림자가 땅에 비춰지듯이, 혹은 거울 앞에 서면 내 모습이 지저분하고 초라해지듯이, 그런 지경에서 자기 존재, 조국 이스라엘을 말했을 겁니다.
나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부족하고, 못났고 ,죄인이고, 속되다. 그 분 앞에서 그런 고백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앞서 언급했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지적처럼 최근 그리스도교에서는 죄를 ‘관계 단절’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단절’입니다. 나와 이웃 사이의 관계 단절이고 나와 자연 사이의 관계 단절입니다. ‘총체적 단절’입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이고, 사람도 창조물이라면 근본적으로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그 관계 단절은 자기 중심화라고 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중심입니다. 그 외 모든 것은 주변이고 버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을 향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게로 끌어 들이고,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블랙홀입니다.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 입니다. 그것은 신조차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즉, 내가 신이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라고 말하는 자기 교만입니다.
민중 신학자 <안병무>는 말년에 자기 중심화라는 것을 ‘공’의 사유화라 표현한 적 있습니다. 그 공은 공산주의 공(共)이 아니고 공공성 할 때 ‘공(公)’입니다.
자기중심화 혹은 자기소외라는 표현들은 신정통주의 신학이 생겨난 후에 만들어진 인본주의적 향취가 풍깁니다. 그렇지만 공(公)의 사유화란 것은 정치사회적 지평을 겨냥합니다.
우리든 공기(空氣)나 땅, 재화,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라 공적(公的)인 것이란 겁니다. 그 공적인 것을 나누지 않고 독차지하면 그것은 공의 사유화가 되는 것입니다.
공(公)을 사유화하는 것, 같이 누리고 나눠야 할 것을 사유화 하는 것, 그것이 죄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삶이란 것 자체가, 산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성, 자기 중심화를 전제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인간은 살고 있는 땅 모든 세계를 자기화 해서 삽니다. 이 세계에서 삶이란 것은 자기의 것 즉 소유를 전제로 가능합니다.
대자연속의 짐승들은 새끼를 아주 헌신적으로 키우지만 때가 되면 쫓아냅니다. 그 영역 안에서는 더 이상 같이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미는 어느 정도 자란 새끼를 내가 소유한 영역 밖으로 쫓아내고, 내 쫓긴 새끼는 또 거기서 새로운 영역을 만들게 됩니다. 사람에게 길들여진 강아지도 아침에 풀어놓으면 동네를 돌면서 자기의 영역을 표시합니다. 이처럼 동물들은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웁니다. 그것은 물러설 수 없는 싸움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보텐 같은 거대한 선인장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물을 저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선인장들을 자세히 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습니다. 이렇게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새끼가 너무 가까운데 떨어져 뿌리를 내리면 그 말려 죽인다고 합니다. 조밀 조밀하게 붙어 있으면 부족한 수분과 뜨거운 햇볕아래서 모두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 ‘이기적 유전자’란 말이 굉장히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 후에는 ‘이타적 유전자’라는 반대의 개념도 등장합니다. 이타적 유전자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이타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보다 자기 종족을 보존하는데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어느 주장이 옳든 자기 유전자를 보전하기 위한 것을 택한 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적인 유전자입니다 .
인간사회의 삶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생산을 극대화해서 아주 적은 지역에서도 오밀조밀 모여살 수 있도록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좁은 도시,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 많이 모여 살다보니 다른 동식물들보다 훨씬 더 명확한 소유개념이 만들어 집니다.
재산은 물론 사람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람관계는 소유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상대는 나와 특별한 관계여야 합니다. 벗도 그렇고, 남녀 사이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남녀사이는 누가 절대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매우 특별한 관계여야만 합니다. 그것이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독특한 관계는 영역에 관계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사회의 관습과 법률이 엄격하게 지켜줍니다 .
이렇게 사람들은 독점적 관계 안에서 자기 존재를 유지합니다. 또 자기 존재를 새로 생산하고, 외로움을 덜면서 편안함을 추구하며 누리고 삽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런 연관 속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최근 영화 ‘1987’이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는 당시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고문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당시 영화처럼 고문을 당했던 한 인사가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 모 씨에게 전기고문을 당했던 경험담입니다.
그 분은 갇혀 있는 동안 이 씨가 교대 근무자로 들어 온 것을 알게 되면 그 때부터는 두려워서 잠도 못 자겠고, 먹을 것도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증언을 하시던 분은 매우 연로하신 분이었는데 말하는 내내 눈물을 글썽이면서 기술자로 불리는 그 이 씨는 전기고문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전합니다.
더 마음 아팠던 얘기도 전합니다.
“당시 그 이 씨의 아들이 그 때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남영동 대공분실에 아침마다 들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이 씨가 오라고 한 것 같아요. 밤을 새기도 하는 아버지가 집에 못 들어가니까 아들더러 오라고 한 것이지요. 아들이 오면 아버지는 아들에게 누가 괴롭힌 놈 없냐? 학교에서 때린 놈 없냐? 따뜻하게 입어라. 그런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분은 이 말을 듣는 순간은 고문을 당할 때보다 더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자기 새끼는 그렇게 귀한데, 남의 새끼는 개처럼 취급하는 구나’하는 설움에서 그랬답니다.
내 세계, 내 소유, 내 특별한 관계만이 내게 의미가 있는 영역입니다,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른 생명을 통해서 자신이 살아갈 영양분을 얻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누군가의 생명에 의존하고 그 생명을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동물복지에 관한 주장도 많습니다. 예를들어 식용 가축이라도 좁은데 가둬두지 말고 조금 넓은데서 쾌적한 생명을 유지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그렇게 키우다가 잡아먹으나, 조금 불편하게 했다 잡아먹으나 결과는 같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 않습니까?
식물도 생명체입니다. 다른 생명체를 섭취하는 같은데 식물에 대해서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덜 하는 것은, 식물은 동물과 특히 사람과는 유전적으로 멀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구 온난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자동차 몰고 다닙니다. 사람이 편리함을 추구하고, 값싸고 좀 더 좋은 제품을 골라 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생활로 환경파괴가 이어지고, 불평등 교역이 이뤄집니다. 어떤 나라, 어떤 지역은 매우 힘들어 지고 망하기도 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은 저개발 국가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과 땀을 먹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한 집단 안에서 제가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받고 싶어 했던 다른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승진한 사람은 기쁘지만, 그 승진의 기쁨 뒤에는 탈락한 사람의 슬픔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먹고 사는 삶, 그것이 삶의 사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고통과 죄의 사슬입니다.
기독교적 죄의 언어로 말하자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가 죄의 고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내 선택 이전의 죄입니다. 그것이 원죄라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합니다. 역설입니다.
은혜를 얻기 위해 죄를 더 지으라는 말은 물론 아닙니다. 해 뜨는 새벽이 가장 반가운 사람은, 그 추위 속에서 해 뜨기를 기다리던 파숫꾼일 것입니다.
8.15 해방이 가장 기뻤던 사람은 압제의 고통을 겪고 또 겪어 억압이 목까지 차오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산가족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이번에도 이산가족 만나자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이산가족의 눈물을 보면 그것을 보는 우리도 다 울게 됩니다.
떨어져 산 세월이 너무 길었고 보고 싶은 그리움이 그만큼 넘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했습니다. 아! 저 사람들이 만나서 그래서 한 마을에 같이 살게 되면 지금은 더 없이 좋지만, 10년 쯤 뒤에는 원수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투고. 그럴 수 있겠지요? 저는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그리움 넘칠 때, 못 만났을 때 그럴 때 만나면 기쁜 것이겠지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묻습니다. (눅7:18)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전해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전하라 합니다.
눈이 멀었던 사람이 눈 뜰 때 기쁨은 말할 수 없습니다. 늘 보는 사람은 내가 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이지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씀은, 다리 저는 사람은 다리가 낫고, 가난한 사람은 별도로 복음을 듣는다는 말이 아니라, 옥에 갇히고 병들고 눈멀고 피부병 걸리고...이런 자들을 총체적으로 칭하는 말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치유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어둠을 보는 사람!...
도대체 내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왜 이렇게 못사는 것인가 하고 고민 하는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 구조 속에서 여린 양심에 생각 많아지는 사람,
내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내게 잡스러운 것이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에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나는 태중에서부터 죄인이라 고민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쁨이시지 않겠습니까!
어둠 깊은 곳에서 빛이 극명하게 빛나고 절망 큰 곳에 희망이 더 놀라운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한 발은 빛에 한 발은 어둠에 두고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도 이렇게 두 세계가 나옵니다.
삶은 은총이기도 하지만, 삶은 바로 그 순간 죄이기도 하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들여다 볼 때, 그것을 가슴 아프게 들여다 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가 되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제자가 되려고 해도 이게 과연 제자인지 아닌지 생각이 복잡합니다. 전 세계에 기독교인이 12억 명이라면 저는 12억 명 제자 중에 맨 뒤에 있는 그 1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합니다.

사족을 달아봅니다.
제가 문외한 영역, 물리학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법칙은 일정한 계 내에서 에너지는 불변한다는 겁니다. 물이 떨어지면 낙하 에너지입니다.
제2법칙 엔트로피는 불가역적으로 증가한다는 법칙입니다. 에너지는 사용하면 할수록 무질서도가 증가한다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지금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확립된 법칙인 것 같습니다. 삶이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짐승에게 삶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삶은 사람입니다. 삶이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사용합니다. 제가 아무리 소비를 줄이고 제가 사용할 에너지 사용을 최소화 한다 해도 제 삶은 구조적으로 엔트로피를 증가 시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물리학적인 세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내 육체의 삶이 자고 먹고 배설하는 세월의 깊이만큼 자연계의 혼란을 가중시키듯, 제 정신의 삶 제 신앙의 삶 영혼의 삶, 그것은 하나님이든 자연이든 이웃이든 관계를 맺고 이어져 온 만큼 숱한 상처와 아픔을 남긴 것 같습니다.
특히 제가 살아오고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상처를 증가시켜온 세월입니다. 제 삶의 흔적은 그래서 쓰레기 더미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제가 했던 모든 것이 산산히 잊혀지기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 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새 해를 주셨고, 새 날을 주시고, 새 세월을 허락하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우리 설교에서 한 말들을 다 지키지 못해도, 제가 못나도, 제가 밝은 그 순간 악을 갖고 있다 해도, 저는 그 분에게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갖습니다.
저는 제게 은혜가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늘 하나님 빛 앞에 세워주시기를 원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세워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살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그 은총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는 지난 2018년 1월 2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현절 셋째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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