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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화)

[서진한 설교] "존재의 창조, 관계의 창조"

기독일보 편집부 기자 (press@cdaily.co.kr)

입력 2018. 11. 23 05:23  |  수정 2018. 11. 23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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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4-24, 히브리서 1:1-4, 2:5-12, 마가복음 10:2-16

대한기독교서회 서진한 사장
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서진한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제공

여성에 대한 폭행과 차별

올해 5월 3일 인도 동부 자르칸드 주에서 19살 소년이 17살 소녀를 성폭행하고, 그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소녀는 온 몸에 화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습니다. 소녀가 청혼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그랬습니다.

같은 날 같은 주에서, 16살 소녀가 남성 2명에게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됐습니다. 성폭행을 알게 된 마을 장로들이 장로회의에서, 성폭행 한 남자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벌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윗몸 일으키기 100번, 벌금 5만 루피, 우리 돈으로 80만 5,000원 정도였습니다. 이 결정에 분노한 남성들이 소녀의 부모를 폭행하고, 소녀를 산 채로 불태워 죽였습니다.

올해 1월 카슈미르 주에서 8살 소녀가 성폭행 당한 뒤, 약물을 주입당하고 피살되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올해 5월 9일자 모 일간지에 실린 것들입니다.

많은 종교학자들은 인도를 대단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숭고한 종교적 정신이 지배하는 곳, 명상의 나라 등등. 그러나 저는 동감할 수 없습니다. 여성을 그렇게 대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만연한데, 그런 사회에 무슨 거룩함이 있다는 건가 싶기 때문입니다.

인도에는 매일 100건 이상의 성폭력 사건이 보고된다고 합니다. 연간 4만 건 이상의 성폭력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피해자 가족이 '낙인' 찍히거나 보복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성폭행이 세계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2012년 말, 남자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던 소녀가, 운전사 등 남성 7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사건입니다. 그 일 뒤 인도 여성들의 항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성폭행을 인정하라! 보도하라! 처벌하라!"

인도의 역사책 중 하나인 「마하바라타」에는 "여성보다 더 죄가 많은 피조물은 없다. 여성은 독이요 뱀"이라고 말한답니다. 종교가 여성에 대한 지독한 사회적 차별과 만행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단지 힌두교만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 역시 여자를 경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여자는 뱀에 꾀여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도 먹게 했으니, 여자는 아담을, 곧 인류를 타락시킨 자, 죄를 불러들인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시대부터 계몽주의 시대까지, 이른바 이성(理性)의 시대에도 여자는 차별받았습니다. 왜냐? 여자는 이성이 없거나 이성의 흔적만 있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는 분명 여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남자 중심의 체계를 확립했습니다. 여자는 단지 '봉사'하는 역할에 한정되었습니다. 여자는 성전에서 잠잠하기를 요구받았습니다. 여성들은 숫자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복음서에도, 5,000명을 먹이신 급식 사건 등에 여성을 숫자에서 배제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남자의 머리, 남자의 영광은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 여자의 영광은 남자라며, 여자들은 예배에서 너울을 쓰라고 했습니다. 성당에서 여자들이 미사포를 쓰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명백한 종교적 차별, 존재론적 차별입니다.

중세에는 종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녀로 몰렸고 처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이른바 마녀사냥입니다. 여자는 '어둠', '달'과 어울려 '악마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카리스마적인 여성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성들은 종교적으로 나서지 말아야 했습니다.

남녀 차별의 역사는 길고, 그 뿌리가 깊습니다. 법적 사회적 인격으로 인정받고 정치적으로 투표가 가능했던 것은 겨우 몇 십 년 전부터였습니다. 우리는 남녀가 적어도 법적으로는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남녀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현안입니다. 미투운동에 이어, 남혐, 여혐 사이트가 생겨났습니다. 어제만 해도 종로의 혜화동에서 성범죄 수사와 재판이 불공정하다는, 여성들의 규탄집회가 있었습니다.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오늘 마가복음서 본문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질문은 매우 간단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그런데 생각할수록 이 질문 묘합니다. 성서공회는 성서 읽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단락마다 소제목을 붙이는데, 새번역 성서의 이 단락의 소제목은 이렇습니다. "이혼을 비판하시다."

하지만 바리새인의 질문은 '이혼해도 됩니까?'가 아닙니다. 질문은 "남편 아내 버려도 됩니까?"입니다. 문장의 뜻은 명료합니다. 버릴지, 버리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남편입니다. 아내는 버려지거나, 버려지지 않을 대상일 뿐입니다. 여성은 순전히 객체일 뿐입니다. 아내를 버리는 것을 오늘날의 이혼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혼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여성이 버려진다는 것은 아무런 울타리도 없이 한데에 내버려지는 것이고, 생존을 위협받는 일입니다.

복음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일이 많았고, 그것이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느냐?'며 되묻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답합니다.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당당한 대답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가치인 율법, 토라의 권위에 따른 대답입니다.

당시 이혼증서는 여자가 재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버려지는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이 '모세의 허락'이라는 것은 신명기 24장 1-4절에 있습니다.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 여자가 집을 떠나가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둘째 남편도 그 여자를 싫어하여 이혼증서를 써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그 여자와 결혼한 둘째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으므로, 그를 내보낸 첫 번째 남편을 그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주님 앞에서 역겨운 일입니다."

적어도 약자인 이혼녀를 보호하는 인도주의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이 명령에 깔린 기본적 인식이 참 몰여성적입니다. 이혼 뒤의 재혼만으로도 여성은 '이미 더럽혀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남편은 그 여자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더럽혀지고, 남자는 여러 여자를 거쳐도 끝내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이 부당하다고 하면, 곧바로 토라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이혼 허락' 곧 토라의 권위를 넘어서기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끌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녀를 만드셨고, 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창조주를 끌어들여 모세의 법을 무력화시킵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의 명령, 율법에 따른 관행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집에 들어갔을 때, 스승에게 이것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어서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을 때, 남자와 여자를 동일선상에 놓고 본다면, 그 말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일이 선(先)이고 주(主)입니다. 아내의 일은 후(後)이며 부(副)입니다. 사회적 부와 관계가 남성 중심으로 짜여 있던 당시의 가부장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은 할 수 있는 일도,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의 질문처럼,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의 경우와 아내의 경우를 다 언급한 것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럼 아내는 남편을 버려도 되느냐는 불필요한 반론을 사전에 봉쇄하는 형식적 균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핵심은 '아내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율법의 권위로, 사회적인 힘으로 유지되던,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회적 불평등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어 이 말씀이 뭐지?'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드는 남자는 아내에게 간음을 범하는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간음'이라는 죄가 적용되는 대상은 오직 '여자'입니다.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문제를 일으켜도, "간음을 범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그 버림받은 아내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말씀에도 이리 되어 있을까요? 앞으로 생각할 질문거리로 남겨둡니다.

창조 이야기 : 남성 중심주의, 인간 중심주의

오늘 창세기 본문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우주적이고 장엄하며, 말씀이 강조되고, 말씀에 따라 창조가 차례차례로 이루어집니다. 이에 반해 2장의 창조 이야기는 인간 창조에 집중합니다. 우주보다는 이 세계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이 아니라, 직접 손에 흙을 묻히면서 사람을 포함하여 여러 피조물을 창조하십니다.

이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눈에 띄는 데가 두 곳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사람만 아니라 하늘의 새와 땅의 짐승까지도 똑같은 재료, 곧 흙으로 만드셨다는 점입니다. 창조의 자리에서 보면, 짐승과 새와 인간이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다른 하나는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그 문장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24절) 남자와 여자의 결합, 결혼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의 주체는 남자입니다. 제대로 하자면, 남자만 아니라, 여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남편과 결합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남자'가 장성해서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룬다고 합니다. 결합의 주체는 남자이고, 여자는 단지 그 결합의 객체입니다.

페미니즘 신학자들이 이 2장의 창조 이야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습니다. 중요한 창조가 맨 나중에 이루어진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 비추어, 여자가 남자보다 더 늦게 창조되었다는 점을 들기도 합니다. 남자는 흙에서 비롯되지만, 여자는 살아 있는 사람의 중요한 부위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돕는 사람"으로 여자를 만드셨는데, 그때 '돕는'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을 돕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쓰는 단어와 동일하다는 점을 부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이 창조 이야기가 남자 중심적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고, 그 여자의 존재를 '여자'라고 부른 것도 남자입니다. 이 창조 이야기 중심에는 남자가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언어는 그 시대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와 제도의 한계 안에 있는 언어입니다. 그 시대의 한계는 가부장주의입니다. 또 다른 한계는 인간중심주의입니다. 온 세계가 창조됐는데,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히브리서도 1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시므로,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하셨다고 합니다. 만물을 발아래 두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연이 파괴 오염되고, 온 바다가 미세플라스틱으로 넘쳐나고, 많은 생물 종들이 멸종위기에 내몰리고, 기후가 급변하여 재난이 끊이지 않게 된 데는 인간중심주의가 있습니다. 인간이 세계만 아니라, 우주의 중심이라는 이른바 '인간 중심주의'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니라, 다원 주체 중 하나이고, 여러 생명체 중 하나입니다.

관계의 창조 : 현재적 창조

그런데 이런 말씀과 달리 오늘 구약 본문을 읽으면서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사람더러 그 이름을 짓게 하셨다는 대목입니다. 창세기 본문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내가 한 강아지를 선택하고, 그 강아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강아지와 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형성됐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반려견의 죽음을 몹시도 슬퍼하는 것은 그 특별한 관계 때문입니다. 한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면, 그 아기와 나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시인 김춘수의 시 한 구절이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는 내 삶에 의미가 되었다, 내 삶에 관계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지 시적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는 우리의 이름에 결부됩니다. 특히나 고대인들에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고, 어떤 이름은 신성시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자는 여자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자신의 살과 뼈라고 외치는 것은 자신과 가장 귀중한 관계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모든 관계 중 가장 소중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는 가장 고통스러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 인간은 제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존재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存在者)들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존재(존재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인간은 유전자를 변형하여 우수한 작물로 품종을 개량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량이지 창조는 아닙니다. 존재에 관해 인간이 한다는 것은, 고작 마구 사냥하거나, 환경을 파괴해서 그 존재의 씨를 말려 멸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존재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존재의 창조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짐승과 새를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 부르게 하심으로써, 그들과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관계의 창조는 사람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존재의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지만, 관계의 창조는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관계'란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관계란 상호적인 힘에 의해 변하고 바뀌는 것입니다. 관계는 깊어질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평화로울 수도 있고, 폭력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호 소통할 수도 있고, 일방적이고 폭압적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란 사랑의 일일 수도 있고, 증오의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관계의 창조'는 정말이지, 진행 중인 창조이자, 현재적인 창조입니다. 존재자(피조물)의 창조는 일단은 완성된 창조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창조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드는 관계의 창조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창조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창조입니다.

관계를 창조하는 책임은 막중합니다. 관계는 존재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은 관계망 안에 있으며, 상호적입니다.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다른 관계에 비할 수 없습니다. 여자는 인간 존재의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여자의 가슴에 안겨 자라납니다. 그러니 자기의 출생과 양육의 기반을 짓밟고 훼손하는 모순되고 어리석은, 그야말로 머저리 같은 존재가 인류 사회의 '남자들'입니다.

최근 텔레비전의 한 교양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도시건축 전문가 김진애 씨, 한 6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요?, 아무튼 그가 과거 서울대 이공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이공대학에는 여자 화장실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남자들과 같이 화장실을 썼다고 합니다. 교수들도 다 남자였다고 합니다. 여자 교수가 없는 것이지요. 남녀의 사회적 차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남녀 차별의식은 우리 언어에도 깊숙이 배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법관 임명을 둘러싸고 진보적이라고 하는 언론들이 하는 비판 중에 하나가 "또 '서오남'이냐?"는 것입니다. 늘 서울대 출신, 50대, 남자 법관이냐는 겁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학연, 그리고 50쯤 되었느냐고 따지는 나이 기준, 그리고 남자라는 성별을 따져서 대법관을 추천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서오남'이라는 용어에도 남성 중심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가장 많은 사람들을 탈락시키는 기준은 성별입니다. 여자는 대부분 탈락합니다. 그리고 50대라는 나이를 기준으로 털어냅니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바탕에서 서울대, 연대, 기타 대학을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장 많은 사람을 떨어뜨리는 차별, 그래서 가장 큰 차별은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차별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남오서'(남자, 오십대, 서울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본문의 뱀발(蛇足)

이혼하지 말하고 하는 마가복음 본문에 사족 같은 게 달려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대목입니다. 이것은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부분과 어울리지 않고, 실제로 다른 맥락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성서일과를 짤 때, 둘을 한 덩어리로 묶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이 관련 본문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며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고서 어린 아이에게 복을 빌어주셨습니다. 주석이나 설교자들은 흔히 이 대목에서, 어린이는 순진무구하고, 순결하며, 절대 의존한다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뜻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제자들이 예수께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성가시고 중요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셀 때 숫자에도 들지 않는 사회적 약자의 상징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의 이 이야기는 세 번의 수난 고지 중, 두 번째 고지(9장 30절 이하)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수난 고지 후, 제자들은 누구의 위상이 더 높은가로 다투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면,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하시면서, 어린 아이 하나를 가운데로 불러 세우시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그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9장 37절)

어린 아이는 오늘날에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기존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이고, 그래서 그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입니다. 아이들은 자기를 보살피는 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이 세계에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 그들은 식민지 팔레스타인의 바닥 사람들, 민초입니다. 어린이는 그 힘없는 땅의 사람들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약한 어린이를 하나님과 직결시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흔히 성서가 가리키는 관계는 공정하고 공평한 관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관계'는 공정하거나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성서는 여기저기서 배부른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고, 가난한 자를 배불리 먹이신다고 공평치 못한 말씀들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경건한 사람들, 힘 있는 권세가들과는 맞섰습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사회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 세리와 창기, 죄인들에게는 친구가 되셨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인간사회에서, 약자를, 약한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고 높이는 불공평을 통하지 않고는 공평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더 귀하게 여길 때 이 세상은 공평에 좀 더 가까울 것입니다. 인간 사회가 여자를 더 귀하게, 더 높은 존재로 세울 때만이 남녀 사이의 관계는 지금보다 훨씬 공평해 질 것입니다.

모든 관계의 창조는 지금도 우리에게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의 창조자'입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0월 7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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